[이재구코너]휴대폰의 아버지, 마틴 쿠퍼

1973년4월3일:뉴욕서 세계 첫 휴대폰 시험 성공

일반입력 :2010/04/01 16:45    수정: 2010/04/26 14:19

이재구 기자

■아라비안나이트의 요술램프같은 휴대폰

2007년 5월 21일. 미국의 인기있는 신문 USA투데이는 ‘25년간 미국인의 삶을 변화시킨 발명품 25개’를 선정해 발표했다.

특히 1위를 차지한 발명품은 시간이 갈수록 인류의 삶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욱더 강력한 힘으로 변화시켜 가고 있었다. 그것은 휴대폰이었다. 1983년 10월 13일 미연방통신위원회(FCC)승인에 이어 시카고에서 첫 상용서비스가 시작된 현대문명의 총아가 된 물건이었다.

인류는 이후 25년간 집중적으로 만들어진 전자문명의 이기를 통해 편리함과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고 있었다.

휴대폰의 뒤를 이은 것은 노트북 PC(2위),이메일 전송기기 블랙베리 단말기(3위), 직불카드(4위),발신자 표시장치(5위),DVD(6위),충전용 리튬전지(7위), MP3 플레이어 아이팟(8위),디지털카메라(11위), 평판TV(13위),파워포인트(15위),증권거래용 홈트레이딩시스템(18위),노래방기계(25위)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25년전 휴대폰을 발명한 중년 연구원의 라이벌은 그의 450g짜리 발명품을 ‘벽돌(Brick Phone)'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 기기는 놀라운 속도로 마치 생명체처럼 진화하고 있었다. 이제 휴대폰은 앞서의 25대발명품 가운데 10가지 정도를 합쳐놓은 기능을 처리할 정도로 똑똑해졌다.

2007년 1월에 발표된 똑똑한 휴대폰의 대명사가 된 '아이폰'은 무게가 고작 135g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이 기기는 아라비안나이트 속 요술등잔 속 ‘지니’처럼 미국뿐 아니라 전인류의 삶을 변화시킨 수많은 기기들을 고스란히 축약시켜 놓은 컨버전스미학의 결정판이다. 그야말로 손안에 든 요술호리병이다.

카메라촬영은 물론 라디오,TV,MP3P,DVD플레이어,사전,어학연습기로도 기능하며 은행예금을 송금하거나 지하철요금 및 구매상품의 결제까지도 할 수 있다. 컴퓨터와 맞먹는 인터넷 서핑, 메일 송수신은 물론, 전자책도 내려받아 읽을 수 있다. 종이신문처럼 읽을 수 있는 것은 물론이다. 심심하면 게임을 내려 받아서 즐길 수도 있다. 지도와 위치를 찾는 항법장치(GPS)로의 이용도 가능하다.

2008년 한국에서 정부수립 60년을 맞아 조사한 한 언론사의 조사 결과도 똑같았다. 한국인의 가장 삶에 큰 영향을 미친 맨 첫 자리는 휴대폰의 몫이었다.

■ “자네에게 진짜 셀룰러 폰으로 전화하고 있다네”

그가 휴대폰 전화를 시도하자 이 전파신호는 뉴욕 벌링컨솔리데이티드빌딩(현 알리앙스 캐피털 빌딩)으로 곧장 날아갔다. 신호는 이 50층 건물 타워 꼭대기에 도달했고 중앙기지국은 전자신호를 모바일스위치 장비로 연결시켰다. 음성은 PSTN을 통해 전화번호로 정확하게 도착했다. 뉴저지 벨연구소 휴대폰 연구원 책상위의 유선전화기가 울렸다.

“조엘, 나 지금 자네에게 진짜 셀룰러 폰으로 전화를 걸고 있다네, 휴대폰 말일세.” 1973년 4월 3일 뉴욕거리. 자동차들이 휙휙 지나가고 뉴요커들이 쉴새없이 오가는 빌딩숲 맨해튼 미드타운의 힐튼호텔 옆 도로였다. 한 사나이가 길거리로 나와 직육면체의 덩어리를 들고 소리지르고 있었다.

그는 곧 호텔 2층에서 열릴 기자회견에 앞서 2파운드(900g)짜리 전화를 들어 연결버튼을 눌렀고 처음에 잘못 걸렸던 전화는 곧이어 제대로 상대편을 찾았다.

벽돌같은 것은 플래스틱으로 하우징한 최초의 휴대폰 ‘다이나 택(Dyna Tac 8000)’이었다. 이 전화기를 들고 중년남자는 벨연구소에 전화함으로써 인류최초의 휴대폰통화자가 됐다.

마흔다섯 된 이 모토로라 연구소 이사의 이름은 마틴 쿠퍼였다.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 너무나도 신기한 것은 그가 태어난 해인 1928년은 모토로라라는 시카고 소재의 자동차라디오 제조회사가 설립된 해와 같다는 것이다.

게다가 미국의 인기 만화가 체스터 굴드가 휴대전화시대를 예고한 만화를 실은 신문은 모토로라의 본거지 시카고에서 발행되는 시카고트리뷴지였다. 그는 1946년 '딕 트레이시(Dick Tracy)'를 선보였는데 주인공 형사 딕은 손목시계 전화로 상사와 얘기한다.

이전까지 유행한 것은 카폰이었다. 그건 무게가 40kg이나 되는 괴물이었다. 카폰을 사용하려면 차량에서 발전되는 파워를 사용해야 했다. .

AT&T는 카폰에 한정된 최초의 시스템을 원했지만 사람들이 그들의 전화를 갖고 어디든지 갖고 다닐 수 있게 되길 원했다. 세계최대 전화회사 AT&T 부설 벨랩 연구원들과 쿠퍼와는 생각의 차이는 딱 그정도였다.

그는 1973년 10월 17일 최초의 휴대폰 발명품에 ‘라디오텔레폰시스템’이라는 이름을 붙여 특허를 출원했다. 그의 상관인 존 F 미첼의 이름도 함께 등재됐다. 미첼은 모토로라가 무선통신기기를 만들도록 강력히 민 인물이었다.

■효율성높은 셀룰러에 눈뜨다

1960년 세계 최초의 부분적인 자동차카폰시스템인 모바일시스템(MTS)이 스웨덴에서 서비스됐다. 이 카폰은 진공관과 릴레이로 만들어졌으며 40kg이나 나갔다.

이와 함께 관심을 끈 셀룰러 네트워크의 개념은 40년대 말 벨연구소가 처음 내놓은 것이었다. 기지국을 중심으로 수많은 주파수를 재사용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전송되는 아주 약한 저출력의 신호는 멀리까지 전달되지 못했다. 거리에 비례해 신호강도가 급속히 떨어졌다.

셀룰러와 MTS는 통화시 단말기들간의 신호 충돌을 막기 위해 개별주파수 채널로 고출력의 신호를 전송했다. 이렇게 해서 통화자의 목소리가 10lkm 가까이의 꽤 넓은 지역으로 전달 될 수 있었다. 하지만 특정지역에서는 서로 다른 통화자가 같은 주파수를 사용할 수 없었다.

이와 반대로 당시 유선전화 네트워크는 동시에 수백만명이 이용할 수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틴이 사용한 것은 AMPS(Advanced Mobile Phone System)였다. 저출력신호를 전송하는 셀룰러 네트워크를 구축했다는 점에서 용량면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 이 네트워크를 통해 유선전화처럼 수많은 사용자가 접속(다중접속)할 수 있는 네트워크 실현에 한발더 가가가게 됐다. 셀룰러 이통서비스의 비약적 발전 가능성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2년 만인 85년 미국내 사용자가 20만명을 넘어섰고 3년후인 88년에는 150만명에 이르렀다.

휴대폰은 점점 작아졌다. 83년 10월 시카고에서 세계최초의 휴대폰 서비스가 시작됐을 때 마틴은 2파운(900g)였던 휴대폰 단말기 무게를 16온스(450g)로 줄일 수 있었다. 디스플레이가 없고, 회로판 숫자가 30개, 한번 충전하고 이어지는 통화시간은 35분이었다. 충전에 10시간이 걸렸다. 3천995달러였던 단말기 가격은 몇년 지나자 1천달러대로 내려왔다.

마틴 쿠퍼도 개발 당시의 불편함을 잘 알고 있었던지 2003년 4월 3일 영국의 BBC방송과 휴대폰 30주년 인터뷰에서 털어놓았다. 그는 “그게 충분히 작아져서 내 벨트에 넣어도 거기 있는줄 모를 정도가 될 때까지는 결코 셀룰러폰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어요.”라고 회고했다. 마틴 쿠퍼는 아나운서에게 자신의 휴대폰은 75g 짜리라고 밝혔다. 그것은 30년전 휴대폰의 6분의 1에 불과한 무게였다.

■“어디서든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다면 그건 혁명

1983년 10월 13일 아메리테크모바일커뮤니케이션 전 사장 밥 바넷은 시카고에서 자신의 크라이슬러 컨버터블에 앉아서 느긋하게 독일로 역사적인 한통의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유선전화의 발명자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의 손자였다.

이로서 밥 바넷은 세계최초의 상용 휴대폰 통신 서비스의 주인공이 됐다. 게다가 무선에서 유선으로의 연결했다는 의미까지 실렸다. 이듬 해 미국통신업체들의 휴대폰 서비스는 워싱턴, 볼티모어, 필라델피아 등 미국 전역으로 확산된다. 아메리테크가 세계 최초의 휴대폰서비스를 개통한 83년의 10월 25일자 타임지는 ‘내일의 전화’라는 제목의 전망 기사에서 휴대폰의 미래를 이렇게 예언한다.

“정보검색 시스템으로서의 전화와 컴퓨터스크린 연계는 엄청나게 유연해질 것이다. 검색자는 스크린 상의 인덱스를 보고 이를 터치하거나 또는 이를 찍어 더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검색자는 '베이루트'라는 단어를 찝어서 세계뉴스 인덱스에 넣으면 스크린은 이 주제에 대한 완전한 보도를 보여줄 것이다. “

마치 아이폰, 또는 아이패드를 얘기하는 듯 한 에언이었다.

83년 당시 인텔은 80386마이크로프로세서를 개발하고 있었다. 전년도에 80286프로세서를 출시한 이 회사는 386칩을 통해 '무어의 법칙' 예언대로 이전 80286칩의 2배인 27만5천개의 트랜지스터 집적에 성공한다.

그것은 반도체 성능의 비약적 향상이 휴대폰을 훨씬 더 똑똑하게 만들어 줄 것이란 예언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는 꼭 2년전인 81년 여름 IBM이 내놓은 5150 PC의 성능향상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휴대폰시대의 총아 스마트폰으로의 이행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91년이 되자 디지털 방식의 GSM모바일이 등장했고 99년엔 일본의 NTT 도코모가 인터넷서비스를 시작했다. 휴대폰의 디지털화와 함께 인터넷 접속이 가능해지자 이 시장은 더욱더 뜨거워졌다. 당연했다. 컴퓨터와 맞먹는 요소기술들을 적용한 휴대폰은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했다.

■거함 모토로라 침몰의 교훈

휴대폰의 엔진인 마이크로프로세서와 운영체제(OS)를 둘러싼 기업들의 전쟁은 더욱 뜨거워졌다. 이 급부상한 황금어장에서 가장 가장 빛나는 것은 모바일OS였다.

그리고 전세계 휴대폰제조업체들은 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이제 모바일OS라는 새로운 고지를 점령하기위해 진군의 북을 울렸다. 스타트는 2010년 초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월드모바일콩그레스행사였다. 노키아, 에릭슨,인텔,MS,구글,삼성 등 세계유수의 휴대폰 제조업체들이 모였다. 이들은 기존 OS동맹을 점검하고 새로운 연합군을 찾기 위해 분주히 돌아다녔다.

전세계 휴대폰 시장에 진도 7이상의 강진과 함께 지각변동을 예고한 것은 구글의 휴대폰용 OS 안드로이드와 아이폰이었다.

83년 조그맣게 시작돼 2년뒤 200만대 수요를 형성하리라던 휴대폰 산업은 폭발적 성장세를 거듭, 이제 연간 11억 4천만대 규모로 성장했다.

2010년 초 세계통신연합(ITU)는 전세계 휴대폰 사용자가 전년보다 4억명이 늘어난 50억명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그만큼 경제적 파급이 클 것이란 의미였다.

격전장의 이들은 60억달러에 달하는 이리듐 위성전화 투자실패와 후속 히트작 불발로 가라앉은 거함 모토로라의 교훈도 잊지 않고 있다.

마틴 쿠퍼는 모토로라가 최초로 휴대폰 상용화서비스를 한 1983년 모토로라를 떠났다.

“사람들이 전화기를 가지고 어디로든 가는데 익숙해져 있는 것처럼 인터넷을 사용하는 방법도 무선으로 이뤄질 것이다. ”

2000년 초 이렇게 예언한 마틴 쿠퍼는 현재 어레이컴이라는 휴대폰 SW 및 스마트안테나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그는 당초 1주일에 1일만 일하려고 했으나 7일 근무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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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어디서든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다면, 그건 혁명일 거예요”라고 그는 말했다.

가끔 TV대담에 나오는 그는 여전히 모토로라 휴대폰(안드로이드 모토로이)을 사용하고 있다.<목요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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