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과 상처' 간직한 윈도95를 위한 변명

탄생 20돌…진정한 GUI 효시-끼워팔기 원조 엇갈린 평가

데스크 칼럼입력 :2015/08/25 15:27    수정: 2015/08/25 15:43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 기자 페이지 구독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1995년 8월 24일. 화요일이었던 그날은 마이크로소프트(MS)에겐 축제일이었습니다. ‘시카고’란 코드명으로 비밀리 개발돼 왔던 윈도95가 본격 발매된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MS는 윈도95 발매일에 맞춰 어마어마한 마케팅 비용을 쏟아부었습니다. 뉴욕의 상징인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전체를 윈도95 로고색인 빨강, 노랑, 초록색으로 치장한 건 오히려 약과였지요.

영국에선 유력지 중 하나인 더타임스(The Times)에 실릴 특집판을 위해 4억5천만원 가량을 지불했습니다. 당시 더타임스는 200년 역사상 처음으로 스폰서를 받은 특집판 150만부를 제작했습니다.

1995년 8월 24일 출시된 윈도95.

미국 서부 워싱턴주 레드먼드에 자리잡은 MS 본사 역시 화려한 축제의 장으로 탈바꿈했습니다. 음식, 곡예사, 놀이기구, 서커스 등을 총동원했지요.

하지만 압권은 윈도95 홍보 영상이었습니다. 당시 MS를 이끌던 빌 게이츠는 인기 록밴드 롤링 스톤스의 히트곡 ‘스타트 미 업(Start Me Up)’을 사용하기 위해 1천만 달러를 웃도는 로열티를 지불했습니다.

MS가 윈도95 홍보 영상에 롤링 스톤스 음악을 사용한 의도는 분명합니다. 윈도95가 모든 컴퓨팅 활동의 시작이란 점을 강조하기 위한 거지요. 물론 '시작 메뉴’가 생겼다는 걸 홍보하려는 의도도 있었구요. (그 홍보영상엔 start exploring, discovering, learning, doing...을 거쳐 creating, playing, moving까지 계속 나옵니다. 그런 다음 start window95로 마무리합니다.)

이 모든 이벤트의 중심엔 빌 게이츠가 있었습니다. 당시 빌 게이츠가 어느 정도 영향력을 발휘했는지 잘 모르시는 분 있나요? 아이폰 출시 무렵 스티브 잡스와 비슷하다고 하면 설명이 될까요? 그 땐 윈도 새 버전이 출시되면 미국에선 밤새 줄서서 기다렸다가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 시작버튼과 멀티 태스팅 새 시대 열었던 OS

윈도95는 운영체제(OS) 역사에서 한 획을 그은 작품입니다. 도스(DOS)의 잔재가 여전히 남아 있긴 했지만 윈도95는 이전 버전과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플러그 앤 플레이' 기능이 처음 도입됐구요, 멀티태스킹도 가능해졌습니다. 당시 PC 사용자들은 저절로 새로운 프로그램을 설치해주던 윈도의 놀라운 능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윈도95가 특히 달라진 부분은 직관적인 이용자 인터페이스였습니다. 이전 모델까지 사용됐던 '프로그램 관리자'를 시작 메뉴, 작업줄 같은 것으로 좀 더 구체적으로 바꿨습니다. 한 마디로 ‘시작 버튼의 원조’인 셈입니다.

그 뿐 아닙니다. 요즘 우리가 많이 쓰는 마우스 오른쪽 버튼 기능이 본격적으로 적용된 것도 윈도95였습니다. 도스 때부터 한계로 여겨져 왔던 ‘이름 8자 + 확장자 3자’란 파일 이름 한계도 깼습니다. 긴 파일 이름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겁니다.

윈도95를 발표하던 빌 게이츠의 모습. (사진=씨넷)

씨넷 기자였던 이나 프라이드가 "2001년 시장에서 사라질 때까지 윈도95는 데스크톱 컴퓨터의 중심이었다"고 평가했을 정도입니다. (프라이드 기자는 이후 올싱스디지털을 거쳐 지금은 IT 매체인 리코드에서 활약하고 있습니다.)윈도95가 출시되던 1995년은 세상의 중심이 PC에서 인터넷으로 막 넘어가던 무렵이었습니다. ‘PC의 시대’엔 두려울 것 없는 MS였지만, 세상의 문법이 조금씩 바뀌고 있는 걸 두려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특히 윈도95 발표 직전 단행된 기업공개(IPO)를 통해 대박 신화를 만들어낸 넷스케이프가 무섭게 치고 들어오던 때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윈도95는 ‘시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범죄자가 된’ 불우한 OS였습니다. MS가 곧바로 윈도95에 익스플로러 끼워팔기를 했기 때문입니다.

■ 익스플로러 끼워팔기로 유명세 치뤄

MS는 처음엔 '플러스 포 윈도95'에 익스플로러를 넣어서 배포했습니다. 이후 MS는 OEM PC업체들에게 윈도를 공급하면서 아예 익스플로러를 기본 탑재해서 제공했습니다. 반면 넷스케이프를 쓰려면 일삼아 내려받아야 했습니다.

이게 운영체제 시장의 독점적 지위를 남용했다는 혐의를 쓰게 됩니다. 결국 미국 법무부가 1998년에 MS를 제소합니다. 그 유명한 브라우전 전쟁입니다.

'브라우저 전쟁'은 이후 MS에게 '독점기업'이나 '악의 축'이란 오명을 안겨주게 됩니다. 빌 게이츠가 2000년 최고경영자(CEO) 자리에서 물러난 것도 따지고 보면 브라우저 전쟁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아픔이 있긴 했지만 윈도95는 MS 역사에선 각별한 작품입니다. 윈도95 홍보 문구대로 배우고, 탐구하고, 즐기고, 연결하고, 조직하는 모든 활동의 시작점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익스플로러 1 버전. (사진=위키피디아)

윈도95는 3년 뒤 윈도98이 등장하면서 무대의 중심에서 내려왔습니다. 하지만 윈도95는 명실상부한 GUI 기반 운영체제의 시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때 만들어졌던 ‘시작 버튼’은 우여곡절 끝에 최근 발표된 윈도10에서 새롭게 부활했을 정도입니다.

MS가 야심적으로 윈도10을 준비한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8월24일에 출시할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명실상부한 ‘윈도 원조’인 윈도95 탄생 20돌에 맞춰서 내놓는 것도 의미가 적지 않을 것이란 게 그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MS는 ‘윈도95 20주년’이란 획기적인 마케팅 기회는 활용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오는 9월 12일 '윈도95팀 리유니온(Windows 95 Team Reunion)' 행사가 열린다고 합니다. 시애틀 베나로야홀에서 열릴 그 행사에는 MS 직원 수백명이 모일 예정이라고 외신들이 전해주고 있습니다.

■ 덩치 커진 MS, 하지만 위상은 "아, 옛날이여!"

20년 사이에 MS의 위상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일단 외형적인 덩치는 엄청나게 커졌습니다. 1995년 당시 직원 1만7천800명에 매출 규모가 59억 달러였던 MS는 이젠 직원 11만7천 여 명에 매출 936억 달러 규모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상황이 좀 다릅니다. PC 시대의 지배자였던 MS는 2000년대 중반 이후 급격하게 영향력이 쇠퇴했습니다. 태블릿과 모바일 시대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때문입니다. 결국 MS는 1980년대 자신들에게 무참하게 패배했던 스티브 잡스가 화려하게 부활하는 모습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윈도 출시 행사 때 밤샘 줄서기를 했던 고객들은 이젠 아이폰 쪽으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윈도95의 힘을 빌어 정복했던 브라우저 시장에서도 이젠 밀려났습니다. 빌 게이츠의 뒤를 이어 MS호 선장이 된 스티브 발머는 시장이 어느 쪽으로 향하고 있는지 전혀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관리에는 능했지만, 비전은 약했던 지도자의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이지요.

당대 최고 기업으로 군림하면서 PC 시대를 지배했던 MS는 요즘 모바일 시대의 강자로 거듭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 CEO 사티아 나델라 (사진 = 씨넷)

‘PC 시대 최강’으로 한 때 ‘악의 축’으로까지 불렸던 MS. 그리고 그 기반이 됐던 윈도95. 애증이 대상이던 윈도95는 쇠락한 후손들 때문에 쓸쓸한 기념일을 맞이할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윈도95 이후 20년’은 “절대 강자는 없다”는 비즈니스계의 속설을 그대로 보여줬습니다. 윈도95 탄생 무렵 생사의 기로에서 방황했던 애플은 지금 세계 최고 기업으로 군림하는 반면, 당시 최강이던 MS는 부활을 위한 안간힘을 다하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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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막중한 임무를 맡은 사티나 나델라 최고경영자(CEO)가 취임 직후 직원들에게 의미심장한 메일을 보냈습니다. 어쩌면 그 메일 속에 ‘윈도95 탄생 20주년’을 맞이하는 MS의 속내가 그대로 담겨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산업은 전통을 존중하지 않습니다. 혁신만 존중할 따름입니다.”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sini@zd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