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큰별 졌다'...시대를 앞선 경영자 故 구자경 회장

'럭키금성'서 '글로벌LG' 도약...'강토소국' 연구개발 열정 쏟아

디지털경제입력 :2019/12/14 13:54    수정: 2019/12/14 15:52

14일 오전 94세 일기로 별세한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은 LG를 '초우량'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킨 경영인이자 불모지였던 70~80년대 대한민국 화학·전자 산업의 중흥기를 이끈 선구자이다. 고인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시대의 열정을 가진 경영자였지만 은퇴후 자연을 벗 삼아 간소한 자연인의 삶을 사는 등 경영인의 모범을 보여준 재계의 큰별이었다.

고인은 구인회 LG 창업주의 장남으로, 1925년 경남 진주시 지수면에서 태어났다. 1945년 진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를 하던 구 명예회장은 1950년부터 락희화학공업(現 LG화학) 이사로 취임했다. 1969년 구인회 창업회장의 별세에 따라 구 명예회장은 1970년 LG그룹 회장을 맡아 25년간 그룹 총수를 지냈다. 1987∼1989년 사이에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도 역임했다.

검정 뿔테안경에 경상도 사투리가 트레이드 마크인 구 명예회장은 안정과 내실을 중시하는 경영스타일로 유명했다.

고인이 이끌던 LG는 '보수적인 기업'의 대명사로 불렸고, 대기업의 부침이 심했던 전두환·노태우 정권 때도 특혜나 이권과 관련해 잡음을 일으킨 사례가 거의 없는 편으로 전해진다.

구 명예회장(앞줄)이 LG화학 부산사무실 직원들과 야유회 차 찾은 진해 해군기지의 함선에서.(사진=LG)
1970년 1월, 취임 당시의 구자경 명예회장.(사진=LG)

'초우량 LG', 대한민국 화학·전자 산업의 중흥기 이끈 선구자

구자경 명예회장은 창업 초기부터 회사운영에 합류하여 부친인 구인회 창업회장을 도와 LG를 일궈온 1.5세대 경영인으로 평가받는다.

1950년대에서 1960년대 말에 이르기까지 LG는 부산의 부전동공장, 연지공장과 동래공장, 초읍공장, 온천동공장 등 생산시설을 연이어 확장하며 화장품, 플라스틱 가공 및 전자산업에서 국가 경제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해왔다.

특히 플라스틱 가공제품의 국내 최초 생산 현장, 금성사의 라디오 첫 생산 과정 등을 직접 챙기며 풍부한 현장 경험을 쌓았다.

구 명예회장(가운데)이 럭키(현 LG화학) 청주공장에서 생산제품을 살펴보고 있다.(사진=LG)
1987년 5월, 서울 우면동에 위치한 금성사 중앙연구소 준공식에 참석한 구 명예회장(왼쪽).(사진=LG)

구 명예회장이 2대 회장에 오른 이후 LG는 주력사업인 화학과 전자 부문을 부품소재 사업까지 영역을 넓히며 원천 기술의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수직계열화를 이뤄 현재의 LG의 모습을 갖출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고인이 경영에서 물러날 당시 LG는 30여개 계열사에 매출액 38조원의 재계 3위 그룹으로 성장했다. 종업원도 2만명에서 10만명으로 증가했다.

구 명예회장은 그룹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키고자 연구개발을 통한 신기술 확보에 주력해 회장 재임 기간에 설립한 국내외 연구소만 70여개에 이른다.

구자경 명예회장이 강력하게 추진한 기술 연구개발의 결과로 금성사는 19인치 컬러TV, 공냉식 중앙집중 에어컨, 전자식 VCR, 프로젝션 TV, CD플레이어, 슬림형 냉장고 등 영상미디어와 생활가전 분야에서 수많은 제품을 국내 최초로 개발해 국내 고의 가전 회사로서 입지를 굳혀 나갔다.

해외 진출에도 적극적으로 나서 중국과 동남아시아, 동유럽, 미주 지역에 LG전자와 LG화학의 해외공장 건설을 추진해 그룹이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1983년 2월, 금성사 창립25주년을 맞아 적극적인 고객서비스를 위해 마련한 서비스카 발대식에서 서비스카에 시승해 환하게 웃고 있는 구 명예회장.(사진=LG)
'LG'로 새출발(1995.01.03).(사진=LG)

구자경 명예회장은 기업의 외형적 성장뿐만 아니라 선진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과감하게 실천에 옮긴 재계의 혁신가였다.

구 명예회장은 국내 민간기업으로는 최초로 기업을 공개해 기업을 자본 시장으로 이끌어 내는 역할을 했고, 국내 최초로 해외 생산공장을 설립해 세계화를 주도하는 등 우리나라 기업경영의 질적인 성장 사례를 끊임없이 제시해 왔다.

시대 앞서 21세기 선진 기업경영 길 개척...국내 고객중심 경영의 효시 '혁신 전도사'

특히 구 명예회장은 전문경영인에게 경영의 권한을 이양하고 이들이 소신껏 일할 수 있게 하는 '자율경영체제'를 그룹에 확립했다.

우리나라 기업의 활동 지평을 세계로 확장시키는 데 앞장선 것도 그의 업적이다. 재임기간 동안 50여개의 해외법인을 설립했는데, 특히 1982년 미국 알라바마 주의 헌츠빌에 세운 컬러TV공장은 국내 기업으로서는 최초로 설립한 해외 생산기지였다.

해외투자에 그치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가 독일의 지멘스, 일본 히타치·후지전기·알프스전기, 미국 AT&T 등 세계 유수의 기업들과 전략적 제휴를 통한 합작 경영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고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사진=LG)

25년간 그룹을 이끈 구 명예회장은 1995년 럭키금성 그룹의 명칭을 LG그룹으로 바꾸면서 장남인 고(故) 구본무 회장에게 회장직을 넘겼다. 같은해 2월부터 LG그룹 명예회장을 지냈다.

고인은 선친의 갑작스런 타계로 경영권 승계 준비에 대한 아쉬움이 있어, "70세가 되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날 것이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실제로 70세가 되던 1995년에 회장 자리를 넘기며 재계 첫 '무고(無故) 승계'라는 의미 있는 선례를 만들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구본무 회장도 1975년부터 20년 동안 그룹 내 여러 현장을 두루 거치면서 후계자 수업을 받게 했다. 변함없이 적용된 장자 승계 원칙과 혹독한 후계자 수업은 조용하면서도 안정적인 경영권 승계의 비결이었다고 평가받는다.

고인은 1972년 초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지냈고, 1987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으로 추대돼 2년 간 임기를 맡기도 했다. 은퇴 후에는 분재와 난 가꾸기 등 평소 생각했던 소박한 꿈들을 실천하며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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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으로는 장녀 구훤미씨, 차남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 삼남 구본준 전 LG그룹 부회장, 차녀 구미정씨, 사남 구본식 LT그룹 회장 등이 있다. 장남인 구본무 회장은 지난해 5월, 부인 하정임 여사는 2008년 1월 별세했다.

한편 구자경 명예회장의 장례는 고인과 유족들의 뜻에 따라 가족장으로 최대한 조용하고 차분하게 치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