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미디어 거버넌스 개편 논의’를 논하다

방송/통신입력 :2021/11/09 11:47    수정: 2024/02/26 13:52

고삼석 동국대 석좌교수(前방송통신위원회 상임위원)

말 그대로 둑이 터졌다. 최근 미디어 정책 및 규제 기구 개편, 즉 ‘미디어 거버넌스’ 개편 논의를 두고 하는 말이다. 연일 토론회가 열리고, 관련 소식으로 언론 지면이 채워지고 있다. 미디어업계와 학계뿐만 아니라, 시민사회 진영과 국회에서도 한 목소리로 미디어 거버넌스 개편을 외치고 있다.

미디어를 관장하고 있는 정부 각 부처도 셈법은 다르나 불감청고소원인 듯 하다. 목소리는 제 각각이지만 출발점과 지향점은 동일하다. “현재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미디어 거버넌스를 전면 개편하자”는 방향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주장과 논의가 현실에 대한 냉정한 분석과 평가, 그리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토대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기득권 구조와 세력으로부터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아니 그 틀 안에서 ‘기득권의 대리전’ 양상으로 변질되고 있다. 기득권에 기반한 개편 논의는 거버넌스 개선은 커녕 개악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미디어 거버넌스 개편 논의인지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야 하는 이유다.

모든 조직은 특정 목표와 기능을 전제로 설계되고 작동된다. 조직의 미션이 그것이다. 그런데 조직은 만고불변의 존재가 아니다. 환경 변화에 따라 인간과 사회가 진화하듯 조직 또한 현실 요구에 끊임없이 대응하고 혁신하면서 발전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조직은 도태되기 마련이다.

고삼석 동국대 석좌교수(前방송통신위원회 상임위원)

다른 한편으로 조직은 의외로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특히 정부 조직이 그렇다. 한번 조직이 만들어지면 조직의 기능을 중심으로 정책 및 산업 생태계가 조성되고, 견고한 ‘이익 카르텔’도 형성되기 때문이다. 조직 운영의 생리도 쉽게 변화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 조직을 재편하거나 새롭게 만드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작업일뿐만 아니라, 분명한 정책 비전과 목표를 전제로 정교하게 추진되어야 할 일이다. 내년 대통령선거와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더욱 활발해질 미디어 거버넌스 개편 논의가 보다 효율적으로, 보다 미래지향적으로 진행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몇 가지 제언을 하고자 한다.

첫째, 현 미디어 거버넌스에서 무엇이 문제인지 객관적인 분석과 평가, 반성이 선행되어야 한다. 미디어 관련 조직 구조가 잘못되었는지, 조직은 잘 구성되어 있지만 정책이 부재한 것인지, 부처 간 협력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지, 청와대로 대표되는 정책 컨트롤타워가 막강한 권한에 비해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 것인지 등등에 대한 정밀 진단이 필요하다.

막연히 현 미디어 거버넌스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통합해야 한다, 재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병명도 모르고 수술칼을 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정확한 진단없이 좋은 처방이 나올리 없고, 설사 개편을 하더라도 만족할만한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

둘째, 미디어 정책을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미래 비전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 형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정부조직 개편이 정부와 시장을 둘러싼 환경변화에 대응하여 새롭게 등장한 시대적 혹은 사회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라면, 과제를 선별하고 비전을 정립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미디어와 관련된 미래 비전은 거버넌스 개편의 좌표가 되고, 관련 조직 간 기능 배분의 기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미디어 거버넌스 관련 논의를 살펴보면, 선후가 뒤바뀌었다. 미래 비전 제시도 없이 기능적 개편 방안을 중심으로 일방 주장만 늘어놓는 경우가 다반사다. 목적지도 없이 망망대해를 항해하겠다고 배부터 띄우는 꼴이다. 특정 조직의 기득권 유지 내지 강화를 배경으로 작동하는 카르텔을 타파하기 전에는 극복이 쉽지 않은 문제인 것은 분명하다.

셋째, 미디어 거버넌스 개편 논의는 현재 우리 미디어업계가 직면한 현안 해결의 전환점이 되어야 한다. 미디어업계 가장 큰 현안으로는 전통적으로 ‘미디어의 공공성 강화’와 ‘미디어 산업의 활성화’를 꼽을 수 있다. 지금까지 미디어 영역에서 두 가지 현안은 항상 양자택일의 문제로 해결책을 모색해 왔다. 미디어 거버넌스 개편 논의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미디어의 공공성 확보를 위해 위원회 형태 규제기관의 독립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과 산업의 활성화를 위해 독임제 정책기관의 권한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평행선을 달려왔다. 그러나 미디어의 공공성 강화와 산업 활성화는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의 두 바퀴와 같이 균형있게 해법을 모색해야 할 핵심 현안이자, 정책목표가 되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최근 미디어 거버넌스 개편 논의가 대부분 ‘미디어 산업의 활성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또 다른 불균형을 초래하지 않을지 적지 않게 걱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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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거버넌스 개편은 소위 ‘민생 이슈’는 아니지만,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다방면에서 국민생활에 직접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히 지금처럼 방송과 통신이 하나로 융합하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상황에서 미디어의 사회경제적 역할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미디어 거버넌스 개편 논의 시 정부 조직의 이익보다 미디어 이용자, 미디어 기업 같은 ‘정책 고객’의 입장을 중심에 놓아야 하는 이유다.

또한 넷플릭스를 비롯한 글로벌 OTT사업자 주도로 국내외 미디어 시장의 질서가 근본적으로 재편되고 있는 것도 미디어 거버넌스 개편 논의를 촉진시키고 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해 디지털 대전환의 시대 미디어의 새로운 역할과 미디어를 통해 우리가 달성해야 할 미래 비전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이를 실행하기 위한 수단 혹은 전략으로 미디어 거버넌스 개편 논의를 진행하는 것이 정상적인 순서다. 혹시라도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우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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