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윤호의 Digital 評傳] 생각하는 사물, 그리고 미디어랩

안윤호입력 :2005/04/07 11:07

안윤호 (아마추어 커널 해커)

Fab Lab

2005년 한국어판 뉴스위크지에는 닐 거센펠드(http://web.media.mit.edu/~neilg/)의 패브 랩(Fab Lab)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패브 랩(Fab Lab)은 줄여서 Fab라고 부르기도 한다. Fab에 대해 뉴스위크는 이례적으로 단절적 기술(Abrupt Technology)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거센펠트의 Fab를 다루었다.

패브 랩은 ‘fabrication laboratory’(제조 작업실)의 준말이다. 2만달러정도의 예산으로 (조만간 2천달러 정도로 가격을 내리려하는) 작은 공간에 차릴 수 있는 소형 공장을 말한다.

단절적 기술이라는 용어는 새로운 기술이 과거의 기술들과 완전히 다른 변화를 가져오는 경우에 사용된다. 라디오에 대한 TV , 테이프에 대한 CD 등이 단절적인 변화를 지칭할 때 흔히 등장하는 예들이었다. 컴퓨터 업계에서는 PC와 인터넷이 그러했다.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제외하고 PC와 개발역사에서 과거의 컴퓨터 기술과 크게 다른 것을 사용한 흔적은 없었다.

기술은 보통 점진적으로 성장하다가 폭발적으로 발전한다. 사람들이 기술을 따라잡기 어려운 이유는 점진적으로 성장하는 초기의 중요한 기술에 대해 무관심하고 있다가 경쟁이 시작될 무렵 경쟁에 뛰어들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인터넷은 폭발적인 발전을 거듭하기 전까지 적어도 20년 가까이 비교적 조용한 세월을 보내면서 성장했다.

단절적인 기술이 과거의 기술과 완전히 다른 기술을 사용하는 것도 아니다. 이를테면 라디오 기술은 TV기술로 연장되었다. 마이크로프로세서는 디지털 로직 기술의 연장이었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기술이 아니라 하나의 현상이나 문화라고 보는 편이 더 적합할 것 같다. 문제는 새로운 기술이 적용되었을 때 관련업계와 사회가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변했다는 점이다. 분명히 그 이전과 이후는 달랐다.

이미 90년대 후반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온 거센펠드의 Fab 역시 완전히 새로운 기술적인 내용은 없다. 어쩌면 그의 패브라는 기술을 단절적인 것으로 보는 시각이 틀렸을 수도 있다. 패브는 개인을 위한 공장으로 통신이나 상거래를 떠나 개인적인 공장이, 정말로 무엇인가를 만들 수 있는 작은 공장이 학자들의 실험대를 떠나 비즈니스 세계에서 거론되고 있다.

그런 점들을 감안한다고 해도 뉴스위크 지면의 2페이지 정도를 차지한다는 것은 뜻밖이었다. 그 기사에 의하면 현재는 HP·소니·삼성·MS 같은 대기업들에게 개인화된 디지털 제조기술의 이점을 설득하고 있는 단계라고 한다. 디지털 기술은 이제 책상위의 컴퓨터나 노트북의 화면에서 현실세계에 직접적으로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는 단계에 이른 것인가?

얼마 전 거센펠드는 다보스에서 소비자들이 직접 각종 전자제품·완구·옷을 만들 수 있는 가정 기반 제조의 도래를 예측했다. 기업체들 역시 패브에서 제공하는 도구를 이용해 소규모로 배송 시간에 맞춰 제품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거센펠드는 최근 아마존의 CEO 제프 베조스에게 그 아이디어에 대해 브리핑했다고 한다.

필자는 가끔씩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견본 제작자들과 만나는 것이 번거로울 때가 많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 분명히 설계가 끝난 보드들과 간단한 케이스 그리고 구동장치의 구현을 위해 샘플을 제작하고 발주하는 일은 고행에 가까우며 많은 인내심도 함께 필요하다. 설계도에서 만들어진 제품들은 여러 가지 복잡한 미로와 같은 과정을 가쳐 시제품으로 만들어진다.

임베디드 시스템은 IT 업계에서 만들어내는 코딩과 같은 논리적 과정 뒤에 엄청난 물리적 구현노력이 있어야 하나의 제품으로 모습을 갖출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정말 간단한 작업에도 많은 저항을 극복해야 한다. 그것도 구현을 할 때마다 언제나 마찬가지다. 작은 플라스틱 금형 하나를 만드는 일조차 쉬운 일이 아니다.

이론적으로 가능하다면 만들어져야 한다. 혼자서 쉽게 할 수 있다면 더 좋은 일일 것이다. 생각과 구체적인 아이디어만 있으면 바로 물건을 만들 수 있는 것, 이러한 프로토타이핑이 가속화된다면 제품개발의 사이클은 급속도로 짧아지게 된다.

생각과 아이디어 그리고 이것을 구현하도록 지시할 수 있는 지식이 있다면 해커의 손에 의해 컴파일을 거쳐 마술적인 코드를 뿜어내는 컴퓨터처럼 패브에서는 마술과 같은 소량의 시제품이 나온다. 경우에 따라서는 필요할 때마다 제품을 뽑아낼 수 있다. 패브는 공장인 것이다.

간단히 설명하면 패브는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는 공개 소프트웨어, 사용하기 간편한 컴퓨터로 조종되는 레이저 절단기·밀링 머신 같은 설비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실제로 패브의 초기의 구현은 컴퓨터로 구동되는 작은 밀링머신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다음은 플라스틱 레진으로 3차원 성형을 만드는 기계였다. 얼마 지나면 MEMS나 나노기술을 이용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거센펠드가 90년대 초에 3차원 프린터라고 부른 것들이 바로 이것이다. 더구나 요즘은 드문장비도 아니다.

이론상으로 패브에서는 거의 모든 재료를 이용해 거의 모든 것을 제작할 수 있다. 플라스틱 완구에서 집적회로판·로봇에 이르기까지. 거셴펠드는 지난 2년 동안 인도·가나·노르웨이·코스타리카·미국 등지에 패브 랩을 세우고 실험했다. 이 프로젝트는 미 국립 과학재단(NSF)이 후원하는 1400만달러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고 한다.

뉴스위크는 노르웨이에서 순록떼를 추적하는 무선 안테나와 인도의 농민들이 지하수를 찾아낼 수 있는 기계를 만들어 자신들도 사용하고 남에게도 팔고 있는 예들을 소개했다. 거센펠드는 “이제 디지털 통신은 한물 갔다. 차세대 혁신은 개인화된 디지털 제조기술”이라고 말했다. 그는 새로운 책 ‘패브’(Fab)에서 “언젠가는 포드 공장 같은 제조 능력을 개인 차고에서 구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전망했다.

또한 완제품을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디자인을 인터넷으로 다운로드받아 직접 만들 수 있는 설비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적었다. 과장도 있겠으나 개인이 거의 모든 것을 집에서 직접 만들 수 있다는 발상은 다양한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장비로 만들 수 있는 것들이 실제로 예상외로 많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큰 기대를 갖고 있다. 제조업은 산업혁명의 우울한 분위기의 공장과 헨리 포드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것인가?

마이크로프로세서의 초기 시절에도 “집에서 만드는(home brew)” 컴퓨터의 붐이 있었다. 물론 기존 제조업체의 사업모델의 붕괴나 테러에 악용될 소지도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고있다. 설계자들로부터 발주자까지 수십단계의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패브가 본격화되면 제품의 개발주기는 더 짧아지고 개발단계는 집이나 사무실에서 끝난다.

개인적으로 컴퓨터를 사용하고 싶다는 사람들의 열망을 마이크로프로세서가 채워주면서 PC업계의 폭발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성장이 시작된 것처럼 패브 역시 이것으로 무엇인가를 만들기 원하는 수없이 많은 잠재적인 사용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거센펠드에 따르면 웹은 아직 완벽하지 않다는 것이다. 원하는 물건을 포인터로 지정할 수는 있으나 아직은 아이들이 쇼핑 카탈로그를 뒤지면서 이것저것을 고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비트(정보)를 아톰(물질)으로 만들어 내지 않는 한 완벽한 구현은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의 시스템으로는 화면상에서 사물을 가리키긴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만들 수 없을 때 느끼는 좌절감이 문제라는 것이다. 만약 이 문제가 해결되면 많은 일들이 일어나게 된다. 컴퓨터만이 유비쿼터스한 것이 아니라 그 창조물들도 그렇게 될 것이다.

현재 발표되고 있는 소프트웨어나 하드웨어의 발전에 따라가는 일에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 대부분의 개발자들은 급진적인 변화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히 변화가 오고 있고 변화가 대세라면 변화를 따라가고 즐기는 것도 반드시 나쁜 일을 아닐 것이다.

또 변화는 예상보다 천천히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듯이 천천히 올 수도 있다. 분명히 아직까지는 실험실의 작은 컴퓨터 시스템과 공작기계를 묶어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돈과 제반 시스템이 더해진다면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

상당히 복잡한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임베디드 시스템이나 유비퀴터스 컴퓨팅과는 또 다른 이야기이다. 비트에 의해 영상이나 데이터가 아닌 아톰이 눈앞에서 만들어지는 세상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비슷하면서도 눈높이가 조금 다르다.

생각하는 사물(Thing That Think)

퍼스널 공작소인 Fab의 프로젝트의 연구를 진행한 거센펠트는 단순한 사람은 아니었다. 원래의 전공인 물리학을 떠나 기술적 영역파괴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미디어 랩에서 연구생활을 계속했다.

거센펠드는 자신은 학부시절에 우주에 대한 심오한 질문을 하기 위해서 철학을 공부하다가 그 심오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기 위해 물리학과로 옮긴 다음 결국 개념을 다루는 것보다 사물을 다루는 것이 더 즐겁다는 것을 깨닫고 공과대학 지하에 있는 기계공작실로 돌아갔다고 한다. 철학자가 기계공의 눈높이와 도구를 사용하는 것으로 바뀐 것이다.

얼마 후 미디어랩에 갔을 때 그곳이 과학을 하는 곳으로는 생각되지 않았지만 자신이 원하던 작업을 계속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MIT의 비트-아톰 센터(Center for Bits and Atoms, http://cba.mit.edu)를 운영한다. 비트는 정보를 의미하며 아톰은 현재의 물리적 세상의 실재하는 물건들이다. 비트와 아톰은 네그로폰테의 ‘Being Digital’이라는 책이 소개되면서 생소한 단어가 아닌 것으로 변했고 책이 나온지 몇 년이 지난 요즘은 책에서 주장한 내용들이 실제의 생활이 되어가고 있다.

초기의 미디어랩의 주장들은 당시의 인습을 타파하기 위한 것들이 많았으며 마빈 민스키나 제롬 위스너같은 창립자들의 견해도 지금에 이르러 되돌아보면 선문답같은 것들이 많았다. 결국 사회가 이들의 주장처럼 변해가자 이들의 독단적으로 보이는 견해들도 점차 스마트하고 세련된 방향으로 변해갔다. 초기의 미디어랩에 대해 스튜어트 브랜드(http://www.well.com/user/sbb/)가 쓴 책 '미디어랩'은 당시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한다. 디지털로의 이행 여명기에 이 연구소의 역할과 철학에 대해 진지하게 적은 것이다.

미디어랩의 창설자들은 다소 이단적으로 보이기는 했으나 걸출한 사람들이 많았다. 미디어랩은 파격적인 인물을 배출하기도 했는데 나노기술의 시작은 미디어랩에서 역시 이단적인 학생인 드렉슬러에게 학위를 주기 위해 시작되었다.

처음부터 미디어 랩은 디지털 기술과 현실의 융합이 가능하다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당시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었지만 이제는 현실로 되었다. 정보와 현실의 오버랩이 일어난 것이다. 소설이라는 것은 인쇄된 아톰과 CD 롬의 비트 이상의 것이라던가 가상현실이 현실이 되었다던가 하는 말들이 나름대로의 설득력과 마술을 띄게 된 것이다.

거센펠드는 미디어랩에서의 연구와 자신의 생각을 ‘When Things Start To Think’라는 책으로 썼으며 책은 꽤 많이 팔렸다. 우리나라에서는 ‘생각하는 사물’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거센펠드는 책에서 이러한 접근법이 미디어랩과 자신의 이야기만은 아니며 보편적인 변화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적었는데 1999년 ‘생각하는 사물’이 출판되었을 때와 비교하면 책의 내용에 대해 수긍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은 분명히 중요한 변화이다. 일상과 보편이라는 단어는 중요한 변화가 구체화되는 과정을 암시한다.

그리고 거센펠드처럼 명쾌하고 좋은 내용의 책을 쉽게 읽을 수 있는 글로 쓸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재능이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널리 알릴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도발적인 제목의 이 책은 분명히 읽을 가치가 있다.

책 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사물(TTT : Things That Think)이라는 프로젝트명으로 기업들과 미디어랩의 연구자들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 프로젝트(http://ttt.media.mit.edu)도 있는데 거센펠드도 연구자중의 하나다.

이 프로젝트의 소개페이지에는 TTT는 디지털적으로 보강된 사물들과 환경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과학과 공학 , 디자인과 예술분야의 선도적인 연구자들과 기업의 연결을 통해 지금까지의 갑갑한 컴퓨터 환경의 경계를 파괴하고 새로운 조망을 제공한다는 것이 프로젝트의 요지라고 한다.

아직 Fab는 출판되지 않은 상태이므로(2005년 4월중 발행된다고 한다) 그의 과거의 책 ‘생각하는 사물’에 대한 견해를 요약하면 유비쿼터스 컴퓨팅만으로는 문제가 있다고 한다. 복고적인 견해의 ‘유비쿼터스(ubiquitous)’는 컴퓨터의 능력을 어디에서나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지만 거센펠드 자신은 ‘표나지않는(unobstrusive)' 컴퓨팅에 더 관심이 많다고 했다.

기계와 사람과의 인터페이스가 아직은 너무나 불편하다는 것이 책의 주장이고 더 스마트한 방법이 많다는 것으로 이를테면 스마트한 기술을 개발한 것이 아니라 기술을 어떻게 더 스마트하게 사용하는가를 연구하는 것이다. 단순한 사물들이 어떻게 대화하는가를 연구함으로서 이들의 대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손은 마우스나 키보드를 떠나 3차원적으로 컴퓨터의 포인팅을 할 수 있으며 실제로 이들은 첼리스트 요요마의 첼로 연주를 인터페이스 한 적도 있다. 노트북보다 똑똑한 책상이나 스마트 약품같은 아이디어들이 연구되고 기업체와 공동 연구된 적도 있다.

사람들의 주위가 컴퓨터로 가득 찼을 때 컴퓨터들은 생물들의 생태계처럼 표나지 않아야 하고 한편으로는 스마트해야 한다는 주장이나 정보기술이 어설픈 사춘기를 벗어나 더욱 생활에 가까이 다가옴에 따라 드러나지 않으면서 더욱 유용하게 되기위한 ‘사물들의 권리장전’같은 것들도 연구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비트를 아톰으로 만든다는 패브가 조금 더 구체화되어 언론에까지 보도되는 시점에 왔다.

그래서 필자같이 단순한 임베디드 개발자는 혼란스러울 때가 많다. 아톰과 비트의 경계가 점차 없어지는 복잡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은 것이다. 혹시 이런 변화들을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지. @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