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조스 불륜사진 공방, 미국 언론계를 흔들다

[김익현의 미디어 읽기] 워터게이트 영웅도 가세

데스크 칼럼입력 :2019/02/12 06:51    수정: 2019/02/12 09:23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 기자 페이지 구독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워터게이트의 부활이다.”

밥 우드워드가 워싱턴포스트 사주인 제프 베조스를 극찬했습니다. 타블로이드 신문의 협박에 굴복하지 않은 건 아주 훌륭한 행동이라고 칭찬하는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 관련기사)

밥 우드워드는 워싱턴포스트 재직 당시 워터게이트 특종 보도를 주도한 원로 언론인입니다. 최근엔 ‘공포’란 책을 통해 트럼프가 이끄는 백악관의 내밀한 모습을 폭로해 많은 관심을 모으기도 했습니다. 워싱턴포스트 뿐 아니라 미국 언론을 대표하는 스타 언론인입니다.

베조스의 최근 행보를 보면 ‘워터게이트 운운’하는 게 부적절해 보입니다. 잘 아는대로 베조스는 지난 달 불륜사실이 공개됐습니다. 내셔널 인콰이어러란 타블로이드신문이 베조스와 전직 앵커인 로렌 산체스가 주고 받은 문자 메시지를 토대로 불륜 보도를 했습니다. 이 보도가 나오기 직전 베조스는 부인과 이혼에 공식 합의했습니다.

제프 베조스 아마존 CEO 겸 블루오리진 창업자 (사진=블루 오리진)

■ 내셔널 인콰이어러의 불륜보도 둘러싼 공방

지난 주엔 더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베조스가 “내셔널 인콰이어러 모회사인 AMI가 나체 사진을 빌미로 협박 메일을 보내왔다”고 폭로한 겁니다.

AMI의 요구는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내셔널 인콰이어러의 불륜 보도는 정치적 의도가 없었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할 것.

둘째. 내셔널 인콰이어러의 문자 메시지 입수 경위 조사를 중단할 것.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그냥 흔한 불륜 사건처럼 보입니다. 밥 우드워드 같은 원로 언론인이 ‘워터게이트의 부활’ 운운하기에 적합하지 않아 보입니다.

그런데 속내를 들여다보면 조금 복잡합니다. 내셔널 인콰이어러는 친 트럼프 성향 잡지입니다. 2016년 대통령 선거 당시엔 트럼프와 관계를 맺었다고 주장하는 여성에게 돈을 주고 입을 막았다는 의혹을 받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연방검찰 수사에 협조하는 대신 소추를 면제 받는 ‘불기소협약’을 했던 전력도 있습니다.

게다가 트럼프는 워싱턴포스트를 극도로 싫어합니다. '가짜뉴스 온상'이란 원색적 비난까지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베조스가 내셔널 인콰이어러의 불륜 보도에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다고 주장하는 건 이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설 탐정까지 동원해 자신과 산체스가 주고 받은 문자 메시지가 잡지사 손에 들어간 경로를 조사했습니다.

베조스는 미디엄에 올린 글에선 “워싱턴포스트가 비판 기사를 쓸 때마다 (트럼프가) 나를 적이라고 잘못 결론내린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베조스는 “워싱턴포스트 인수를 후회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워터게이트의 부활’이란 밥 우드워드 발언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우드워드는 “1972~1974년 워터게이트 보도 때도 정부와 상식, 그리고 사생활에 대한 엄청난 공격이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베조스가 협박에 굴복하지 않고 담대하게 대처한 것은 “매우 용기 있고 올바른(very gutsy and definitely right)” 행동이라고 칭찬했습니다.

물론 꼭 그렇게 보기 힘든 부분도 있긴 합니다. 정치적 의도가 아니더라도, 베조스 정도 되는 인물의 불륜은 타블로이드 신문의 좋은 먹잇감이기 때문입니다.

전 오히려 이번 사건을 전하는 미국 언론의 논조가 더 흥미로웠습니다. 선정적인 보도를 자제하고 핵심 쟁점만 잘 전해주고 있습니다.

■ 담담하게 핵심쟁점 전하는 미국 언론의 보도는 인상적

이번 공방의 쟁점은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AMI가 베조스에게 보낸 이메일은 ‘협박죄’에 해당될까?

베조스 측은 당연히 협박이라고 주장합니다. 반면 AMI는 ‘협상’이라고 맞서고 있습니다. 적당한 선에서 분쟁을 끝내려는 선의에서 나온 행동이란 겁니다. 일부 매체들은 메일 발송 주체가 변호인인 점이 법정에 갈 경우 AMI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둘째. 내셔널 인콰이어러가 사진을 공개할 경우 어떻게 될까?

문제의 사진은 베조스(혹은 산체스)가 직접 찍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따라서 내셔널 인콰이어러가 공개할 경우 ‘저작권 침해’에 해당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불륜 보도의 기초가 됐던 문자 메시지 입수 경로에 따라선 또 다른 범죄가 성립될 수도 있습니다. ‘

셋째. 이번 공방에 트럼프 행정부가 개입돼 있을까?

앞의 두 가지 쟁점은 베조스와 AMI에만 해당됩니다. 하지만 트럼프와 AMI가 관련 있다는 부분이 드러날 경우엔 사건이 좀 커질 수도 있습니다. 밥 우드워드가 ‘워터게이트의 부활’이라고 한 건 이런 부분을 염두에 둔 것으로 추측됩니다. 물론 아직까지는 트럼프 행정부가 개입돼 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이번 사건은 제프 베조스의 불륜 보도가 출발점이 됐습니다. 이후 베조스 측이 내셔널 인콰이어러의 보도 경위에 대한 조사에 착수하면서 사건이 흥미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내밀한 사생활을 담은 사진’을 둘러싼 흔한 공방으로 보기 힘든 건 그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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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이번 사건은 어떻게 전개될까요? 그건 좀 더 지켜봐야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번 사건 보도를 보면서 한 가지 부러운 건 있습니다. 미국 언론들이 ‘부적절한 추측 보도’를 자제하고 있다는 겁니다. 가급적 사건의 본질에 집중하려는 모습이 두드러져 보입니다. 사실 여부도 불확실한 추론으로 온갖 추잡한 보도를 쏟아낸 최근 국내 어떤 사건과는 사뭇 달라보였습니다.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sini@zd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