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기] 유료방송 가입·해지 마케팅 겪어보니

정보 약자 위한 배려 아쉬워

방송/통신입력 :2018/12/26 08:15    수정: 2018/12/26 12:46

앞으로는 방송이나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를 해지할 때 해지 방어 부서 상담원과 지리한 입씨름을 벌이지 않아도 될 전망입니다.

지난 19일 방송통신위원회가 도입하겠다고 밝힌 해지 간소화 시스템 덕분이죠.

해당 시스템은 타사 서비스에 가입하면 이전에 사용하던 서비스를 자동 해지해줍니다. 현재 이동통신 서비스처럼요. 오는 2021년쯤 시범적으로 도입될 예정입니다.

이런 시스템이 도입된 배경에는 해지방어로 인한 괴로움을 호소하는 소비자들의 민원이 있었습니다. 서비스 해지 의사를 밝혀도 현금이나 경품, 요금 할인 등의 카드를 쥐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며 전화를 계속 돌려대는 식의 대응이 만연한 탓입니다.

이 시스템의 또다른 장점은, 가입자가 스스로 깨닫지 못한 채 동종 서비스에 이중 가입돼 있는 상황을 예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상황을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할머니한테 제보를 받기 전까진 말이죠.

사진=픽사베이

어떻게 된건지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때는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할머니 댁 근방은 A케이블사의 방송 권역입니다. 당시 해당 권역에서 광범위하게 방송 송출 장애가 발생했습니다.

장애 해결에 시일이 걸리자 참지 못하고 타사로 갈아타는 가구도 있었습니다. 이웃집에선 위성방송을 선택했죠. 서비스 기사가 설치를 끝내자 TV가 멀쩡해진 것을 보고 할머니는 "저희 집 TV도 제대로 나오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할머니 댁에 방문한 서비스 기사는 A케이블사의 회선이 설치돼 있어 이를 해지해줄테니, 자사 상품으로 바꾸라고 권유했다고 합니다. 이를 수락하고 위성방송 서비스에 가입했는데, 통장 정리를 하다 보니 여전히 A케이블사의 요금이 청구되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알아차린 시점에서 서비스 기사한테 어떻게 된 것이냐고 전화로 따졌더니, 그는 이미 퇴사했다며 소위 '배 째라' 식으로 대응을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까지 들은 저는 과제를 정리해봤습니다. ▲이 모든 게 사실이 맞는지 자초지종 확인하기 ▲현재까지 이중으로 낸 요금에 대한 보상 여부 확인하기 ▲두 가지 서비스 중 하나를 해지하기.

우선 A케이블사의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첫 시도는 실패했습니다. '가입자 명의의 휴대폰 번호를 입력하세요'. 할머니, 할아버지 중 어느 분이 가입자인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번엔 주민번호 앞 자리가 발목을 잡았습니다. 세 번의 전화 끝에 해지 부서와 연락이 닿을 수 있었죠. 이를 통해 현재 월 2천원 할인 받아 3천500원을 내는 상품에 가입돼 있고, 별도의 약정은 걸려 있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어서 위성방송 고객센터에 전화했습니다. 이전보다 난이도가 높았습니다. '스마트카드'라는 것에 적힌 번호를 입력하라 합니다. 셋톱박스에 꽂혀 있는 카드인데, 나이가 지긋하신 기자의 할머니는 셋톱박스가 무엇인지도 잘 알지 못하십니다. 이 방법은 포기하고, 요금 청구서 하단에 적혀 있다는 고객번호로 대체하는 편이 조금 더 쉬울 것 같아 이를 부탁드렸습니다.

스마트카드(출처=KT 스마트 블로그)

어렵사리 연결된 고객센터 상담원을 통해 먼저 현재 가입된 상품과 약정 가입 여부를 확인했습니다. 월 5천500원짜리 상품 2개였습니다. 5년 약정 조건으로 가입돼 있어 2년여가 지난 현 시점에서 이를 해지하려면 약 50만원을 위약금으로 내야 한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지금까지 받은 총 할인액이죠.

이 시점에서 상담원에게 사연을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가입된 서비스를 대신 해지해줄테니, 자사 서비스 가입을 권하는 식으로 영업 방침이 본사에서 내려지기도 하는 건지 물었습니다. "각 지국에서 필요한 상황에 따라 그런 식의 마케팅을 펼치기도 한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이 상담원은 "지국이 아닌 본사 고객센터에 전화를 주신 건 매우 잘하신 일"이라며,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해당 사연을 담당 지국에 상세히 전달했으니 지국에서 상황을 파악한 뒤 며칠 내로 연락을 줄 것이라 했습니다. 만약 이런 사실이 확인되면 보상이 있는지 묻자, 확인이 된다는 전제 하에 이중 부과된 요금에 대해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답변도 줬습니다.

그러나 보상을 받을 수 있겠다는 기대감은 들지 않았습니다. 서비스 기사가 당시 한 발언이 확인돼야 하는데 그는 이미 퇴사했고, 딱히 해당 발언에 대한 녹음 같은 증거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뒤 지국으로부터 제 예상과 같은 답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A케이블사의 상품 해지는 실패했습니다. 반드시 가입자 본인이 통화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빠른 음성 안내 때문에 ARS 이용이 어려운 할머니를 위해 고객센터에 전화 상담 예약을 대신 해드리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것의 전부였습니다. 나중에 어떻게 됐는지 확인했더니, 상담원이 "가장 싼 상품을 이용하고 있는데, 왜 해지하냐"는 말만 반복해 더 이상 절차를 이어갈 수 없었다고 합니다.

한정된 시장에서 마케팅 경쟁이 심화되는 것은 흔한 현상입니다. 특히 약정상품 위주의 방송통신 업계는 더욱 그런 경향이 있죠. 이 같은 해지 방어를 위한 상담과 과도한 가입 권유는 사실 타사에 대해서도 흔히 제기되는 비판입니다.

그러나 직접 체험해보니 '무서울 정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움을 청할 사람이 마땅치 않은 정보 약자가 비슷한 일을 겪게 되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로 피해를 겪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노인들에겐 다소 복잡하고 어렵게 느껴질 수 있을 ARS 시스템도 걱정이 됐습니다. 평소엔 체계화된 ARS 시스템에 대해 효율적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이번 경험을 통해 노인들이 ARS를 이용하기엔 음성이 상당히 빠르게 지나가고, 상담원 연결까지 거쳐야 하는 절차가 많다는 생각도 할 수 있게 됐죠.

일단 이런 상황을 미연에 방지해줄 수 있는 방통위 시스템이 안착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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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료방송 외 정보 약자의 피해를 막기 위한 대책 마련도 다방면에서 필요할 듯합니다. 이동통신 대리점을 통해 '요금 폭탄'을 맞거나 명의 도용을 당한 노인, 장애인에 대한 뉴스가 이따금씩 등장해왔던 것을 고려하면 말이죠.

IT 산업 경쟁력 뿐 아니라 정보 약자를 위한 사회 인프라도 해외에서 참고할 만큼 탄탄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