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구코너]위키피디아의 등장

2001년 1월15일 무료백과사전 위키피디아 탄생…브리태니커를 무너뜨린 힘은?

일반입력 :2010/01/14 15:50    수정: 2010/01/16 14:57

이재구 기자

■브리태니커와 MS를 무너뜨리다

“2009년 12월 31일까지 MSN 엔카르타 웹사이트는 중단됩니다. MS는 학생판과 프레미엄SW제품은 6월까지만 판매됩니다.”

지난해 3월 30일 MS는 이러한 내용의 짤막한 발표문을 내놓았다.

MS로서는 차마 내리기 힘든 결단이었다. 16년 전 펑크 &웨그널스란 회사의 백과사전을 인수해 야심차게 키워왔던 CD롬 백과사전사업 및 온라인서비스 사업이었다.

“전통적인 백과사전과 관련 자료가 변화하고 있습니다.오늘날의 사람들은 상당히 다른 방법으로 정보를 찾고 소비하고 있습니다.”

MS는 사이트에 일부러 질의응답(FAQ)란까지 마련하면서 사업 실패와 후퇴의 변을 늘어놓았다. SW의 거인이 웹사이트에 내건 변명은 그랬다.

판매부진이라든가 무료 온라인 백과사전의 급성장 때문이라든가 하는 더 이상의 부연 설명은 없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천하의 MS가 만든 지 8년째를 맞은 무명의 무료 온라인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www.wikipedia.org)에 밀려 결국 항서를 썼다는 것을.

MS는 짤막하게 한마디 더 붙였다. “미래기술 솔루션을 개발할 것입니다.” 그뿐이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IE)로 90년대 중반 인터넷시대를 평정할 듯 보였던 마크 앤드리센의 넷스케이프를 곧장 거꾸러뜨렸던 MS에게도 벽은 있었다. 2009년 10월31일은 패배를 모르는 SW거인에게 치욕의 날 중 하나로 기록됐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사이버세상에서 예고된 수순이었는지도 몰랐다.

■집단지성 앞에 무너진 236년 권위

2004년 7월 28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의 기사를 본 전세계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지지 않을 수 없었다. “네티즌들이 함께 만들어 가는 온라인 백과사전 ‘위키피디아’가 백과사전의 대명사인 ‘브리태니커’를 압도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FT는 “위키피디아의 수록 건수가 브리태니커의 3배인 30만건을 넘어섰고 하루 평균 870만방문건수를 기록했으며, 조회 건수도 브리태니커 유료사이트(연간 60달러)를 크게 앞질렀다”고 보도했다. 2년후 위키피디아의 항목은 브리태니커의 5배로 늘어난다.

그것은 236년 전통을 자랑하는 브리태니커의 침몰을 알리는 둔중한 조종소리였다.

골리앗을 무너뜨린 다윗은 증권 및 선물거래인 출신인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지미 웨일스란 청년이었다.

1995년 급부상한 넷스케이프의 성공은 그를 자극했다. 이듬 해에 서른살의 나이로 보미스란 포르노사진 웹사이트를 만들었다가 실패한 경험도 갖고 있었다.

그는 이어 98년 백과사전을 편집해 온라인에서 서비스하는 모델에 착안한다. 전통적인 종이백과사전 편집방식을 따랐다. 1년간 12만달러를 투입했지만 성과는 미미했다. 누피디아(Nupedia)로 불린 이 사전의 작성 목록은 달랑 24개였다. 전문가 학자들을 위촉해 주제별로 검토하고 승인하는 7단계를 거치도록 했기 때문이었다. 발간은 지체될 수 밖에 없었다.

누피디아가 폐쇄되기 직전에 한 직원이 아이디어를 냈다. “검토,승인 과정을 생략하고 누구라도 글을 올리고 편집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결과는 놀라왔다.

2001년 1월 15일. 지미 웨일스는 웹에 위키피디아를 올렸다.

첫해에만 1만6천800개의 항목이 확보됐다. 그의 부모가 살던 하와이어에서 쓰는 ‘위키(wiki)’라는 말의 의미 그대로 여러 사람의 손을 빌어 백과사전을 ‘빨리’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익명성 보장과 신뢰성 사이에서

하지만 전통과 권위를 무너뜨린 집단지성의 결과물에도 약점이 있었다. 익명성을 악용해 거짓 정보나 음란물, 특정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을 올리며 사이버 질서를 파괴하는 이른 바 ‘사이버 반달리즘(Vandalism)’은 골칫거리였다.

위키피디아는 누구나 정보를 올리고 수정할 수 있기에 반달리즘의 대표적 희생양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각종 통계수치의 숫자를 슬쩍 바꾸거나 엉뚱한 정보를 올려놓아 이용자들을 골탕 먹이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지난 2007년 8월 영국의 BBC 방송이 기사화한 것 같은 극단적인 사례가 발생하는 경우였다. BBC는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로마 교황청이 전세계 인터넷 이용자들이 사용하는 온라인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의 편집을 조작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미국과 앙숙인 아마디네자드 이란대통령 항목에 대한 악의적 편집, 카톨릭신자인 아일랜드 IRA지도자의 살인사건 연루혐의 내용을 지운 컴퓨터의 IP가 각각 CIA와 교황청의 컴퓨터인 것으로 확인됐다는 보도와 함께.

영국의 한 교수가 위키피디아에 자신이 히틀러 소년단 출신으로 소개돼 있는 것을 보고 기겁했다는 일화는 약과였던 셈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지미 웨일스는 정보제공자들이 여전히 익명으로 활동하는 대신 제출한 이력서의 전공 분야에 한해 정보를 올리도록 하고 있다.

함께 논란이 돼 위키피디아의 정확성 문제는 사그라들었다. 지난 2006년 네이처가 제기한 ‘브리태니커의 부정확성’이슈기사로 촉발된 논쟁에서 판정승하면서 매듭지어졌다.

치명상을 입은 브리태니커는 오늘날 백과사전포털로, 쇼핑몰로 생존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2010년판 32권짜리 종이 브리태니커는 사이트(www.britannica.com)에서 1395달러에 판매되고 있다.

■위키노믹스의 화려한 등장

대중에 의한 협업의 성과물인 위키피디아의 등장과 성공은 인터넷 주변의 새로운 조류를 형성했다.

위키피디아는 개념과 형성과정에서 5세기까지 고대 최고 최대의 도서관이었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비유된다. 알렉산드리아의 프톨레미 3세는 도시방문객 누구에게나 언어나 분야에 상관없이 책을 한권씩 들고 들어와야 입성을 허락해 인류최대의 지식보고를 만들도록 했다.

그는 이 책들을 복사해 새 책을 만들어 도서관에 소장케 하고 원본은 돌려주는 지식 공유 방식을 택했다고 한다.

특히 오늘날 기업인들에게는 이같은 대중의 힘, 또는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을 기반으로 한 비즈니스 지혜의 창고가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상황이 아닌가.

캐나다의 돈 탭스콧은 위키피디아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인터넷 협업이 이른 바 ‘위키노믹스(Wiki+Economics)'로 불리는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을 들고 나왔다.

그는 새 금맥을 찾지 못해 도산 직전이던 한 금광회사가 경품행사를 통해 전세계 사람들의 금맥찾기 아이디어를 수집해 회사를 살린 실례를 위키노믹스의 대표사례로 꼽는다.

위키노믹스는 사공 많은 배는 산으로 가는 게 아니라 목적지에 더 빨리 도착한다는 말로 요약된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기본적으로 폐쇄성이 강한 금광업계에서 과감히 열린 마음으로 정보를 공개,공유하고 참여를 유도해 성공으로 이끈 사고의 전환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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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간 200만달러에 이르는 운영비 부족으로 고민하던 지미 웨일스는 네티즌의 참여를 호소해 목표액보다 많은 620만달러를 모금했고 지속적인 지식공유 작업을 이어갈 수 있게 됐다.

이 시대의 대표적 문화코드로 등장한 위키피디아에는 2009년 11월말 현재 1300만 항목의 자료가 수록돼 있고 그 가치는 약 30억달러 정도로 평가받고 있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