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구코너]컴퓨터의 대공습

타임 올해의 인물에 컴퓨터(1983년 1월3일):일상생활 속의 전자두뇌

일반입력 :2009/12/31 13:47    수정: 2010/04/15 04:09

이재구 기자

[이재구코너]컴퓨터의 대공습

타임, 올해의 인물에 컴퓨터(1983년 1월3일): 일상생활 속의 전자두뇌

■55년만에 기계가 올해의 인물에 오르다

이 해 세계는 혼돈스러웠다. 브레즈네프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사망하고 안드로포프 전 KGB 의장이 승계했다. 이스라엘의 베긴 수상은 PLO 제압을 명분으로 레바논에 진격, 난민 대량살상으로 중동을 뒤흔들었다. 아르헨티나는 영국에 포클랜드반환을 요구하며 전쟁을 벌였다가 톡톡히 대가를 치렀다. 레이건 미대통령은 10년 만에 인플레를 잡았지만 예산적자는 1800억달러였고 실업자는 대공황 이래 최악인 1200만명이었다. 전세계 24개국이 수십억달러의 빚잔치를 하며 금융위기를 맞고 있었다.

1982년. 올 한해 전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은 인물로 도대체 누구를 선정해야 한단 말인가?

‘올해의 인물’ 선정 논의를 하던 타임(TIME)지의 편집진은 고심 끝에 55년의 전통을 깨고 ‘기계’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그것은 충격이었다. 편집자 스스로도 이 결정이 독자에게 줄 충격에 거듭 고심할 정도였다. 그래서 ‘편집자의 편지’를 통해 독자들의 놀라움을 진정시키려는 시도를 할 정도였다.

1982년도 '올해의 인물'로 선정된 것은 다름아닌 ‘컴퓨터’였다. 그래서 표지제목도 ‘올해의 인물(Man of the Year)’이 아닌 ‘올해의 기계(Machine of the Year)’로 이름붙여졌다.

편집진은 상업 미술이라며 제작을 고사하던 세계적 조각가 조지 시걸에게 이 표지그림을 위한 조각을 요청했다. 조지 시걸은 ‘책상에 앉아 퍼스널컴퓨터(PC)를 보면서 작업하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3원색과 흰색으로 대비시켜 컴퓨터시대의 도래를 강렬하고도 극명하게 형상화했다.

1983년 1월3일자 새해 벽두의 타임지는 1982년도 '올해의 인물'을 그렇게 탄생시켰다.

컴퓨터사제단의 시대

타임지 편집진의 결론은 정확한 것이었다.

그때까지 컴퓨터사용 권력은 이른바 ‘컴퓨터사제단’으로 불리던 국가,대학,연구소내 컴퓨터전문가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다. 물론 사용처는 군사,과학,학술용계산,일기예보 및 선거결과 예측까지 다양했지만 개인에게 미치지 못했다.

과거 1950년대 말 60년대 초 MIT. ‘괴물컴퓨터’로 불리던 수백만달러짜리 IBM704, IBM709 등을 보면 이들 컴퓨터는 보통 방 하나를 통째로 차지하고 있었고 이를 돌볼 전문요원들이 항상 대기하고 있었다.

컴퓨터실은 컴퓨터 내부의 진공관이 데이터를 파괴시킬 정도까지 과열되지 않도록 특수에어컨 가동으로 각별히 보호되는 신성한 공간이었다. 경보벨이 울리면 기술자들이 달려와 이 괴물의 내장이 녹지않도록 컴퓨터의 덮개를 허겁지겁 벗겨내곤 했다.

컴퓨터산업은 컨트롤데이터 같은 회사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여전히 홀러리드식 천공카드기술을 사용하며 70년대 중반까지 전자데이터처리시스템(EDPS)범주에 머물르고 있었다.

천공담당자들은 카드를 판독기에 넣고 나서 컴퓨터에 달린 스위치와 단추를 누를 수 있는 권한을 가졌는데 흔히 ‘사제단’으로 일컬어졌다.

컴퓨터 사용자들에게 가장 골치 아픈 일은 작성한 카드를 갖다주고 그 결과를 받아 보기까지 긴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지루함이었다. 또한 명령어들 중에서 한글자라도 실수하면 처음부터 명령어를 완전히 다시 작성해야 했다.

메인프레임 선발업체 IBM의 사업모델은 이 신성한 컴퓨터를 기업에 판매하고 컴퓨터사제단의 유지보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80년대 들어 PC가 일반인들에게 보편화되면서 컴퓨팅 작업을 할 수 있는 '권력'도 사제단에게서 일반인들에게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힘의 이동이었고 혁명이었다.

■부품세트같은 PC 군웅할거 시대

70년대 중반 컴퓨터사제단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탄이 잇따라 쏘아 올려진다.

1975년 1월 파퓰러일렉트로닉스는 최초의 PC라 할 알테어8800 키트를 커버스토리로 다룬다. MTS사의 애드 로버츠가 일련의 스위치 조작만으로 앞면에 늘어선 전구에 불을 밝히고, 수작업으로 메모리 뱅크에 입력시켜 이진법 문제의 해답을 표시하도록 컴퓨터를 설계한 것.

PC시대를 내다본 실리콘 밸리의 교사 밥 알브레히트가 몇몇 동료와 함께 만든 컴퓨터동호회 홈브루(Homebrew Computer)를 만들어 회원을 늘려가고 있던 때였다.

“워즈, 우리 애플이란 이름으로 사업을 시작해 보는 게 어때?”

PC사업의 가능성에 눈을 뜬 홈브루 회원 스티브잡스가 곧바로 친구 워즈니악을 끌어들였다.

1976년 여름 애틀랜틱 시티에서 열린 제 1회 퍼스널컴퓨터 축제를 기점으로 PC에 대한 시장경쟁은 불붙기 시작한다.

PC시장에서는 코모도어, 아타리,탠디의 라디오섁,IMSAI,프로세서테크놀로지,제록스 등이 저만치 앞서 나가고 있었다. 바야흐로 PC시장이 개화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

메인프레임의 패자 IBM도 PC부문에 대해 손을 놓고 있지는 않았다.

IBM은 60년대 후반 생산된 IBM의 SCAMP에 이어 75년 5110을 기종을 내놓는다. 이 기종은 이 해 탠디사가 TRS80 PC에 장착돼 성공을 거두었지만 가격이 1만달러여서 타사제품의 몇배에 달하면 주목을 끌지 못했다.

1980년 드디어 IBM은 자체 운영체제(OS)를 장착한 시리즈I의 실패를 벌충하기 위해 MS로부터 OS를 아웃소싱하는 등 다가오는 일반인 대상의 컴퓨터시장에 대한 진출의 고삐를 조이기 시작한다.

PC 보편화시대 물꼬트다

하지만 이들 PC가운데는 극단적으로 말하면 부품세트에 불과하달 정도의 제품까지 있었다.

애플은 애호가들만이 쓸 수 있는 부품세트를 모아놓은 주기판같은 PC 대신 일반인들까지 사용할 수 있는 PC가 필요함을 간파했다. IBM은 각 회사가 독점적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고유 규격으로 시장에 뛰어들고 있어 시장이 무질서해지고 있는 점에 주목했다.

77년 4월 15일 개막된 웨스트코스트컴퓨터박람회에서 신개념의 애플II를 내놓은 애플은 선명한 역동적 이미지로 큰 호응을 얻는다. 이어 12월 라스베이거스에서 플로피디스크를 선보이고 79년 비지캘크 프로그램을 적용하면서 일반에게도 PC를 판매하기 위한 순항을 시작한다.

1979년 학교에서 PC를 사용해 본 고등학생들이 드디어 크리스마스 선물로 애플II를 사달라고 조르는 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해 워드프로세싱 시장이 형성되고 수표장부 정리용 비지캘크가 등장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IBM은 소비자에게 선택상의 제한을 주는 부담스런 PC가 아닌 표준PC를 만들기 위해 고심하고 있었다. 결국 구매자들을 대량으로 이끌어 낼 이른바 IBM컴패터블이란 이름으로도 불리는 PC의 표준, IBM 5150모델을 출시한다. 81년 8월 12일 등장 이후 이 컴퓨터는 PC의 대중화를 주도한다. 찰리채플린을 광고모델로 세운 이 해 IBM은 거의 10억달러의 수입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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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과 IBM PC의 등장은 일반인들에게 PC를 구매할 핑계거리를 만들어 주었다. 컴퓨터를 다룰 수 있는 권한이 사제들에게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분배되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이는 미국인들의 지속적 사랑의 대상이 자동차와 TV에 이어 컴퓨터로 옮아가는 순간이기도 했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