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IT 시장에서 '을'로 사는 일이란…

기자수첩입력 :2015/01/12 11:32    수정: 2015/01/12 11:32

황치규 기자

이런저런 ‘갑질’들에 지친 갑오년이 끝나고, 을미년이 시작된 탓인지 요즘 IT업계에서 '을' 위치 있는 이들이 하는 '을' 얘기를 종종 들을 수 있다.

한국 IT산업에서 '을'이란 가급적 말없이 조용히 지내는 게 여러모로 나은 위치인데, '을'들이 모인 자리에 가면 '이제는 을의 시대'를 외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저 웃자고 하는 얘기겠지만 농담속에 뼈가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

한국 IT업계에서 을로 살아간다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다. 먹고사니즘을 위해 참고 또 참아내며 버텨야야 하는 것이 대한민국 IT업계 많은 '을'들의 모습이다. B2B로 불리는 기업용 솔루션 시장은 특히 그렇다. 국내 B2B 시장은 전형적인 '갑-을-병-정' 구조다. 스스로를 '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꽤 있다. 과도한 요구에 욱할 때도 많지만, 반항하면(?) 아웃당할 가능성이 크기에 참고 또 참을 수 밖에 없는 것이 많은 '을'과 그 밑에 있는 '병-정-무'들의 처지다.

그러나 참고 또 참는 것에도 한계가 있을 수 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욱'하는 을들도 가끔씩은 나오게 마련이다. 최근 한 모임에서 참다 참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갑을 걷어 차버린 어느 '을' 기업 대표 얘기를 들었다. 왠만하면 참을 스타일인데, 무덤덤하게 말하는 그는 시원섭섭하다는 표정이었다.

갑들이 아예 없는 곳으로 떠나는 '을'들도 있다. B2B 보안 기업 CEO였던 A씨는 지난해 웹기반 서비스 회사를 차렸다. 기업내 직원들을 대상으로하는 서비스지만 고객사 요구를 일일이 맞춰줄 필요는 없는 성격의 회사다. "더 이상 갑’들과 일하지 않아도 된다"는 그의 얘기에는 B2B 솔루션 시장에서 살아가는 을들의 애환이 담겼다.

갑의 비위를 맞춰줘야 하는 경우가 많은 B2B 시장을 뛰어넘어 개인 사용자들을 겨냥한, B2C 시장에서 새로 성장을 도모하려는 회사들도 있다. 꽤 괜찮은 한 B2B 솔루션 회사의 경우 요즘 B2C에 꽂힌 모습이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을 고객사로 갖고 있다고 해도 '을'은 그저 '을'일 뿐이다. 대형 '갑'하고 일하다 보면 심신이 힘들때가 많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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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소수지만 한국 IT생태계에는 태생부터 갑들의 말을 잘 듣지 않은 까칠하고 갑들에 눈에는 참으로 싸가지 없이 비치는 '을'같지 않은 '을'들도 있다. 이런 '을'들을 만만하게 대했다가 된통 당한 '갑'들도 본적이 있다.

요즘은 태생부터 싸가지 없는(?) '을'들이 아니라 원래는 고분고분했던 일부 '을'들이 '갑'과 스스로 멀리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정부는 갑을 관계 개선을 강조하고 있고, 갑들도 "을들과 상생하겠다"고 외치고 있음에도 일부 을들이 아무말하지 않고 갑과 결별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까지 을들은 세상이 바뀔거라 크게 기대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