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체인을 위한 자본시장법이 필요합니다"

이정엽 판사가 블록체인법학회를 만든 이유

컴퓨팅입력 :2019/06/05 08:15    수정: 2019/06/05 08:16

판사가 블록체인에 관심을?

판사가 블록체인법학회를 만들었다고 했을 때, 처음엔 왠지 의아했다. 법을 다루는 사람은 신기술을 그리 환영할 것 같지 않다는, 편견이 내재해 있던 탓이었다.

하지만 그는 법과 신기술, 그 떼래야 뗄 수 없는 두 관계의 합이 사회 발전에 얼마나 중요한지, 잊고 있었던 당연한 이치를 되짚었다.

그가 블록체인법학회를 만든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절실하지만, 부재한 법과 신기술의 '티키타카'를 위해.

블록체인법학회 회장을 맡고 있는 이정엽 의정부지방법원 부장판사를 만나 그가 생각하는 블록체인과 블록체인 선도국으로 가기 위한 방안에 대해 들어봤다.

■ "지금은 정보의 인클로저 운동"

이정엽 블록체인법학회 회장. (사진=이정엽)

-블록체인법학회는 왜 하게 되셨나요?

"일단 블록체인에 관심이 많았어요. 하지만 완전히 '아, 이거 가야겠다' 이렇게 생각해서 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이 길에 뭔가 있을 것 같았어요. (길을) 가봤는데 뭔가 없으면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안 갈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 뛰어들었어요.

그런데 공부를 점점 할수록 블록체인은 사회적 기술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더라고요. 디지털 세상으로 가면서 법 자체도 코딩하는 시대로 가는 거죠. 블록체인에서 필요한 알고리즘이 결국 법을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로 바꾸는 거에요. 블록체인 업계에서 말하는 합의 알고리즘, 예를 들면 '어떤 일이 생겼을 때는 어떻게 한다' 이 자체가 법인 거죠."

-법률가가 하는 일을 더 자세히 말씀해주신다면요?

"예전에는 여러 가지 네트워크를 문서로 처리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문서를 처리하는 조직을 없애니까 그 자리에 컴퓨터 알고리즘이 들어오는거죠. 그런데 프로그래머들은 법을 모르기 때문에 알고리즘을 알아도 어떤 형태로 언어를 짜야 하는지 몰라요. 그래서 일단 법률가가 이렇게 짜야된다고 알려주면, 프로그래머가 그걸 코딩하는 거죠.

먼저 법률가가 할 문제는 블록체인상의 법률을 만드는 거에요. 기존 체계의 법률이나 헌법과 너무 충돌되면 안되니까 그런걸 먼저 고려해서 합의 알고리즘과 같은 규정을 세우는 거죠. 외국 블록체인 프로젝트도 모두 변호사가 있어요. 블록체인은 처음 시작부터 변호사의 저력이 필요한 분야에요."

-블록체인에 뛰어들게 되신 또 다른 이유도 있나요?

"이 쪽 분야가 제도화가 너무 안됐어요. 마치 16세기에 처음 주식회사가 만들어질 때처럼 아직 제도화가 너무 안 된 상태죠. 제도화로 안착시키기 위해서 법률가가 필요해요. 빨리 안착시켜 나가야 선진국으로 갈 수 있는 거죠. 사실 17세기만 해도 중국 기술이 유럽보다 앞섰어요. 하지만 어느 순간 완전히 역전됐죠. 인클로저 운동이 일어나면서 토지가 자본화되기 시작한거죠. 그러면서 등기부도 생겨났고요. 경제사학자들은 영국에서 자본주의가 가장 발달하게 된 원동력으로 대부분 등기부를 꼽아요. 토지가 등기부상에 올라가면서 자본이 되고, 큰 자본이 형성되니까 그걸 가지고 여러 공장이나 인프라를 만들 수 있게 된거죠.

저는 지금 정보의 인클로저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해요. 토지가 처음 인클로저 운동을 통해 자본화됐듯, 지금은 정보가 자본화되는 과정인 거죠. 영국이 등기부가 생기고부터 자본이 많아졌듯, 우리나라도 정보를 자본화시킴으로써 이전에는 없던 자본을 더 많이 갖게 될 수 있는 거예요. 이걸 통해 다시 한번 도약해보자는 취지에서 블록체인법학회도 하게 된 거죠."

■ "암호화폐는 정보의 측정 단위"

-정보의 자본화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세요.

"지금까지는 정보의 가치가 먼지처럼 날아가 버렸는데, 지금은 가치를 포집하는 기술이 생긴 거에요. 예를 들어, 스타벅스에서 어떤 음료를 먹는다는 정보가 모이면 돈이 돼요. 그럼 그 정보는 가치가 있는 자원인 거죠. 하지만 지금은 그 정보가 자본화돼있지도 않고, 누구의 것인지도 명확하지 않죠. 페이스북에 내 정보를 올려도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는 거죠. 하지만 정보의 자본화가 이뤄지면 우리가 가진 가치있는 정보를 기본 소득처럼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거죠."

-정보를 자본화하게 됐을 때, 가장 큰 효용성은 무엇인가요?

"정보를 잘 가공해 처분할 수 있는 사회적 인프라가 만들어지면, 우리나라에 잠자고 있던 자본이 생성돼서 정보네트워크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거예요. 그 사회가 한 번 건설되면 그걸 안 하는 나라는 따라잡을 수가 없어요. 정보네트워크 사회로 가는 과정에서 필요한 기본 기술이 바로 블록체인 기술인 거고요."

-암호화폐가 꼭 필요한 거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건 무의미한 질문이에요. 암호화폐는 정보의 측정단위라고 할 수 있어요. A라는 정보와 B라는 정보가 수학적으로 어느 게 더 가치 있느냐가 측정이 안 되면 거래가 안 되니까 측정을 할 수 있는 단위가 필요한 거죠. 예를 들어 모나리자 그림과 테슬라 차 중에 어느 것이 더 가치 있냐고 할 때, 범주가 달라서 평가하기 애매하지만 불가능하진 않아요. 결국 돈으로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죠. 지금도 어떤 정보네트워크에 사용되는 서비스가 더 가능성 있느냐에 따라 토큰이 달러 대비 얼마인지가 평가받고 있죠. 지금은 사기성이 많긴 하지만, 앞으로도 (가치 평가는) 그렇게 진행될 겁니다."

-법적으로 가장 빠르게 정리돼야 하는 논의는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거래소 이슈죠. 지금 암호화폐 거래소가 제도적으로 정비가 안 돼 있고, 거래소에서 암호화폐에 투자한 사람은 도박죄로 걸릴 위험성도 항상 있는 상태에요. 지금은 거래소에서 코인을 사는 게 옥션이나 지마켓에서 물건을 사는 개념이에요. 하지만 다음날 코인 가격이 오를 걸 예상하고 사면 그 순간 이건 투자성이 있다고 판단돼서 증권으로 분류될 가능성이 있어요. 증권성이 있으면 도박이랑 자본시장법 적용 여부, 이 두가지가 문제가 돼요. 그런데 지금 정부에서는 그 둘 다에 대해 모두 확답을 안 주고 있죠.

자본시장법에 의하면 무허가 증권거래소는 처벌받게 돼있어요. 지금 비트코인이 증권이 아니여야지만 합법이 되는데, 그러기에는 코인 가격이 하루에 30%씩 오르는 건 일도 아니거든요. 그럼 증권으로 분류돼야 하는 게 맞고, 미국도 증권으로 분류하는 쪽으로 가고 있어요. 근데 또 너무 주식처럼 취급해버리면 산업 발전이 안 될 수 있기 때문에 조금 더 유연하게 할 필요가 있어 보여요. 블록체인을 위한 자본시장법이 필요한 거죠."

이정엽 블록체인법학회 회장. (사진=지디넷코리아)

■ "투기 제어하고, 산업 발전하는 제도 빨리 마련해야"

-현재 한국 정부가 블록체인 업계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어떻게 보시나요?

"암호화폐는 도박성이 있어요. 아무리 아니라고 하더라도 자고 나면 코인 가격이 120% 오르고 하면, 혹할 수밖에 없죠. 빚내서 코인에 투자하다 망하면 한 시대에 아주 안 좋은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투기적인 거를 막으려는 정부의 입장도 이해가 돼요.

하지만 투기성을 적절하게 제어하면서 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는 제도를 빨리 마련해야지,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의무방기예요. 주식처럼 제도화 마련을 통해 이 정도면 우리 경제 규모나 국민 수준으로 봤을 때 피해가 많이 생기지 않겠다 하는 선을 마련해주는 게 필요해요. 아파트값이 오른다고 무조건 아파트를 못 사게 하지 않잖아요. 하지만 지금 암호화폐와 관련해서는 아이에 사지 말라는 거죠. 이게 그렇게 한다고 해서 해결되면 모르겠지만 또 해결되지도 않아요. 외환거래법 위반 형량도 약한 수준이고요."

-우리나라가 블록체인 선도국이 될 수 있다고 보시나요?

"기존 토지나 생산수단은 이미 미국이 다 갖고 있어요. 하지만 지금 블록체인 분야는 새로운 분야로 아직 앞서나간 나라가 없어요. 그런 면에서 기회가 있죠. 하지만 블록체인은 기술적인 것도 필요하지만, 문화적 성숙도 같이 돼야지만 사회적 기술로 꽃 피울수 있어요. 문화적 성숙이 안 되어 있으니까 블록체인 암호화폐 관련 법률도 통과가 안 되는 것이고요. 국회서 빨리 논의를 해야 한다고 봐요."

-지금 여러 상황을 보면 한국은 신기술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빠르게 진행되는 상황은 아니라고 보여져요.

"어쩔 수 없는 것 같기도 해요. 한국이 너무 늙었어요. 평균 연령이 너무 높아요. 이런 상황에서 블록체인과 같은 새로운 영역에서 선도국가가 되려면 리더가 혁신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미래세대를 위해서 지금은 조금 힘들더라도, 고통스러운 걸 어느 정도 견뎌야 합니다. 표가 없는 젊은 세대, 소수자를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다수결로만 가면 안 좋은 쪽으로 갈 수밖에 없어요.

리더는 여론 눈치 보지 말고, 우리 사회가 어디로 나아가야 할건지 생각해서 비전을 갖고 힘들어도 책임지고 해야 하는 거죠.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하려면 힘들어도 먼저 할 수밖에 없어요. 한 번 글로벌 시장에서 뒤처지면 따라갈 수 없으니까요."

-법과 신기술의 관계는 어떻게 이뤄져야 한다고 보시나요?

"'국가는 어떻게 실패하는가'라는 책을 보면, 국가발전은 어떤 제도를 차용하느냐에 따라 더 발전하고 덜 발전한다고 나와요. 아까 말한 등기제도나 세금제도와 같이 현재 사회에 부합하는 제도를 먼저 채택한 사회가 먼저 발전해요. 우리나라 OS를 버벅대게 만들면 안 되고, 깔끔하게 착착 돌아가게 만들어야 하죠. 법관들은 거기서 생겨나는 버그들을 해석을 통해 잘 해결해야 하는데, 그게 좀 빠르게 이뤄져야 할 필요가 있어요. 반영도 잘 돼야 하고요. 그래서 법조인들이 이 분야에 할 일이 굉장히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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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록체인법학회의 향후 일정은 어떻게 되나요?

"일단 월드뱅크의 블록체인팀과 협업해 오는 9월 국제컨퍼런스를 열 계획이에요. 또 개인적으로는 블록체인법학회에 해외 연구자들도 천 명 정도는 모으고 싶어요. 하반기 중에는 거래소나 자본 시장 관련된 학회 차원의 정리 자료를 발표하고 싶어요. 이 정도만 규제되면 되겠다 할 수 있는 기준을 제안해 보는 걸 생각해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