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익현의 미디어 읽기] '똑똑한 인터넷'보다 '멍청한 인터넷'에 더 끌리는 이유

중국의 '뉴IP' 삐딱하게 보기

데스크 칼럼입력 :2020/03/31 16:05    수정: 2020/10/05 13:44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 기자 페이지 구독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터넷은 멍청하다. 어떤 정보가 오가는 지 전혀 모른다. 관심도 없다. 자원 배분 능력도 없다. 밀리면 밀리는대로, 뚫리면 뚫리는 대로 그냥 놔둔다. 판단 능력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인터넷상의 고유 지표인 주소를 지정해주는 방식도 우직하다. 도메인 네임시스템(DNS)이 정해진 절차에 따라 고유 번호를 부여해 준다. 생략할 건 생략하고, 묶어줄 건 함께 묶으면 편할 텐데. 그런 기능도 없다.

우직한, 하지만 정직한 도로 같은 존재. 그게 인터넷이다. (망중립성을 둘러싼 공방도 따지고 보면 인터넷의 이런 속성 때문에 생긴 논쟁이다.)

초기엔 그 정도만 해도 충분했다. 인터넷으로 대단한 일을 하는 경우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이메일 보내고, 서핑하는 정도. 동영상 서비스 등장 이후 조금 무거워지긴 했지만, 그래도 큰 무리는 없었다. 정보가 있는(혹은 정보를 받을) 특정 지점과 연결만 해주면 됐다.

그런데 인터넷이 좀 더 똑똑해져야 한다는 주장이 고개를 들고 있다. 50년 전 인터넷이 처음 등장할 때와 지금은 상황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 그러니 기술 발전과 함께 더 똑똑한 서비스를 향유하기 위해선 인터넷도 더 똑똑해져야 한다는 논리다. 그래야만 고품격 맞춤형 서비스를 맘껏 즐길 수 있다는 주장이다.

■ 인터넷에서 기술보다 더 중요한 건 철학

‘똑독한 인터넷’의 기치를 든 것은 중국이다. 국제전기통신연합(ITU)에 ‘뉴 IP’란 구체적인 인터넷 프로토콜을 제안했다. 이 작업을 주도한 화웨이는 논문과 PPT 자료를 통해 뉴IP의 타당성과 구동 방식을 설명했다.

중국이 제안한 ‘뉴 IP’는 그 자체로 황당한 주장은 아니다. ‘멍청한 인터넷’을 ‘똑똑한 인터넷’으로 바꿔 줄 수 있는 제안들도 적지 않다.

인터넷 주소 부여 방식을 좀 더 효율적으로 한다거나, 어떤 형태의 정보가 오가는 지 알 수 있도록 해 좀 더 효율적으로 망을 관리하자는 제안은, 효율성 측면에선 솔깃한 부분도 있다.

이런 제안은 또 어떨까? 똑바로 가면 되는 데 중간에 경유지가 하나 있다. 굳이 그 곳을 들를 필요가 없을 땐 그냥 경유지 자체를 없애버리면 훨씬 편하지 않을까? (화웨이의 뉴 IP 관련 논문엔 중간 라우터에 부여했던 IP 주소를 탄력적으로 없애는 방식도 있다.)

화웨이가 스마트홈 사례를 통해 뉴IP의 장점을 설명하고 있는 그림. (사진=화웨이)

기능적인 면만 놓고 보면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인터넷이다. 50년 전 설계된 인터넷보다 훨씬 유연하고, 효율적이다. 사물인터넷(IoT)과 가상현실(VR), 자율주행차 같은 첨단 서비스가 본격화될 2030년 이후를 대비한 새로운 인터넷으로 꽤 매력적인 부분이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번 제안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그들은 왜 '똑똑한 인터넷’보다 ‘우직한 인터넷’을 선호하는 걸까?

인터넷에서 기술보다 더 중요한 건 철학이기 때문이다. 개방과 평등, 그리고 표현의 자유. 인터넷의 밑그림을 그린 사람들이 그 어떤 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가치다. 중앙에서 관리하면 더 효율적일 수 있음에도, 굳이 분산 시스템을 고집하는 것도 이런 철학적 기반과 무관하지 않다.

■ 우직하지만 정직한 길, 그게 인터넷의 진정한 지향점

물론 지금 인터넷도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평등하고 개방된 망이라고 보기 힘든 측면이 적지 않다.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전방위 사찰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국가 권력이 시민의 자유를 침해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미국 정부가 인터넷 주소 관리 정책을 독점하는 데 대해 많은 사람들이 문제제기해 온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인터넷은 ‘개방되고 분산된, 그리고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통신망이다. 우직하고 촌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평등한 세상에 대한 꿈은 변함이 없다.

반면 ‘뉴IP’는 똑똑한 인터넷, 효율적인 인터넷을 지향한다. 쓸 데 없는 경로는 과감하게 없애고, 좀 더 편리하게 소통할 수 있는 길을 만들자고 한다. 중앙의 관리 기능을 약간만 덧붙이면 좀 더 편리해질 수 있다고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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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편리함이 인터넷의 기본 정신을 뒤흔들 수도 있다. 효율성을 위해 관리를 허용하는 순간, 또 다른 감시의 도구로 전락할 수도 있다.

도입 여부마저 불투명한 뉴IP에 대해 과하다 싶을 정도로 신경 쓰는 건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진정 원하는 건 ‘똑똑한 인터넷’이 아니라 ‘정직한 인터넷’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권력을 가진 많은 국가나 기관은 정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sini@zd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