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익현의 미디어 읽기] 코로나19와 원격근무…칭기즈칸에게 배운다

기술보다 더 중요한 업무 문화

데스크 칼럼입력 :2020/03/17 14:18    수정: 2020/10/05 13:46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 기자 페이지 구독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13세기는 칭기즈칸의 시대였다. 몽골 초원을 통일한 기세를 앞세워 빠른 속도로 세계를 정복했다. 그 경쟁력의 기반이 말(馬)이었다. 꼭 필요한 것들만 몸에 지닌 몽골군의 속도 앞에 보병 중심의 정착민들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말은 그 시대 최고의 모바일 플랫폼이었다.

속도를 극대화하기 위한 분산명령시스템은 몽골의 또 다른 경쟁 포인트였다. 중앙을 향하되, 각 분대 단위의 자율권을 최대한 보장해주는 시스템이었다. 몽골군은 1호제, 10호제부터 1만호제까지 다양한 편제로 구성됐다. 신속하게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역참 시스템 역시 칭기즈칸의 '노마드 문화'를 든든하게 지탱해줬다.

21세기 모바일 혁명이 본격화되면서 ‘디지털 노마드 시대’가 열릴 것이란 예측이 많았다. 정착문화였던 20세기가 '디지털 유목민' 시대로 진화될 것이란 전망이었다.

■ 원격근무 도입한 애플, 보안시스템 때문에 큰 혼란 겪어

20세기 디지털 문화를 상징하는 키워드는 ‘윈텔’이었다. PC환경이 구축된 사무실이 모든 생산성의 중심이었다.

반면 모바일 혁명이 본격화된 21세기의 키워드는 스마트폰과 클라우드다. 중앙 서버에 중요한 자료를 올려두고,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일하게 될 것이란 전망이 우세했다. 그 바탕엔 마이크로소프트(MS), 애플, 구글, 아마존이 있었다. MAGA란 약칭으로 불리는 이들은 21세기 디지털 노마드 군단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하지만 그 동안은 이런 전망이 실현되진 않았다. 거대한 본부를 구축해놓은 21세기 기업들은 굳이 직원들을 ‘디지털 노마드’로 풀어놓을 이유가 없었다. 눈에 잘 띄는 곳에 모아 놓는 게 관리하기 훨씬 편하기 때문이다. 20세기 정착민 문화가 여전히 지배적인 패러다임 역할을 했다.

코로나19가 이 모든 것들을 뒤흔들었다. 정착민 문화를 고수했다간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린 때문이다. 주요 IT 기업들이 앞다퉈 ‘원격근무’를 선언했다. 이와 동시에 ‘디지털 노마드’ 패러다임이 새롭게 떠오를 것이란 전망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코로나19 때문에 원격근무란 새로운 문화가 정착될 것으로 목소리도 커졌다.

몇 주가 지난 지금, 전망대로 디지털 노마드 문화가 자리 잡았을까?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아직은 많은 혼란을 겪고 있다. 디지털 노마드를 위한 기반 기술은 갖췄지만, 문화까지 분산시스템으로 바뀌지 못한 때문이다.

애플 캠퍼스. (사진=씨넷)

월스트리트저널은 지난 주말 흥미로운 기사를 게재했다. 최초로 재택근무를 도입한 실리콘밸리가 혼란에 휩싸였다는 내용이었다. 기사에선 애플 사례를 흥미롭게 소개했다.

애플은 비밀주의를 고수하는 회사로 유명하다. 그러다보니 사내 보안도 철저한 편이다. 이런 비밀주의 때문에 집에서 원격근무를 하게 된 직원들이 혼란을 겪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어떤 소프트웨어 개발자는 ‘회사 바깥’에서 어느 선까지 일을 해야 하는 지 몰라 갈팡질팡했다. 또 어떤 직원은 사내 시스템에 접속이 안 돼 혼란을 겪었다. 그런가하면 느려터진 다운로드 속도 때문에 속앓이를 하는 사례도 속출했다.

인가되지 않은 기기를 외부로 반출하지 못하도록 하는 회사 규정도 원격 근무의 또 다른 장애물이다. 그러다보니 원격근무 시행에도 불구하고 회사로 출근하는 직원들이 속출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 진정한 디지털 노마드 시대, 기술만으론 힘들다

코로나19 때문에 갑작스럽게 도입된 원격근무 때문에 갈팡질팡하는 기업이 애플만은 아닐 것이다. 비슷한 혼란을 겪고 있는 기업들이 적지 않을 것 같다. 시스템이 잘 갖춰진 첨단 IT기업일수록 ‘강력한 보안 정책’ 때문에 오히려 더 중앙집중적인 업무 환경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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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를 지배했던 칭기스칸의 경쟁 포인트는 속도였다. 하지만 그들의 경쟁 포인트가 속도 뿐이었다면, 단기간에 세계를 정복하긴 힘들었을 것이다. 역참시스템과 분산명령시스템을 통해 ‘속도 경영’에 최적화된 업무환경을 구축했기 때문에 유목민 특유의 속도가 더 빛을 발할 수 있었다.

원격근무를 둘러싼 혼란을 통해 700년 전 세계를 지배했던 노마드 문화의 위력을 새삼 떠올리게 된다. 코로나19가 뒤흔들어버린 정착민 중심의 기업 문화가 ‘디지털 노마드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진화하기 위해선 이런 부분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 뒤따라야 할 것 같다.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sini@zd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