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 규제 속도 조절...日 노림수 뭘까

'공급망 교란' 비난 회피·규제 정당성 확보 꼽혀

반도체ㆍ디스플레이입력 :2019/08/09 16:34    수정: 2019/08/09 16:42

일본 정부의 대(對) 한국 수출 규제가 표면적으로 잠시 소강 상태에 들어선 모양새다. 일본 경제산업성이 지난 7일 포괄허가취급요령 등 규제 강화 시행 세칙을 발표하며 추가 규제 품목을 발표하지 않은데다 8일엔 수출 규제 이후 포토 레지스트의 한국 수출을 처음 허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조치는 '글로벌 공급망 교란'에 따른 미국 등 주요 국가의 비난을 피하기 위한 계산된 전략으로 보인다. 또 규제 품목 추가 없이도 한국 수출을 규제할 수 있는 장치인 '캐치올 규제'도 이미 마련돼 있다.

2일 각료회의에 참석한 日 아베 총리. (사진=수상 관저)

이에 한국 정부도 수출 허가 여부에 관계 없이 주요 부품과 소재 국산화 지원 등 정책을 예정대로 진행할 전망이다. 또 당초 대응 카드로 고려되었던 백색국가 일본 제외도 상황에 따라 활용할 카드로 남겨뒀다.

■ 日 정부 "EUV 포토 레지스트 한국 수출 허가"

일본 정부는 지난 8일 기자회견을 통해 7nm(나노미터) AP(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 등을 생산하는 데 필수 소재인 EUV(극자외선) 포토 레지스트의 한국 수출을 허가했다고 밝혔다.

스가 요시히데 일본 관방장관. (사진=AFP/뉴스1)

NHK에 따르면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기자회견을 통해 "경제산업성이 엄정한 심사를 거쳐 안보상 문제가 없는 거래라는 사실을 확인한 최초의 안건에 대해 수출허가를 부여했다"고 밝혔다.

같은 날 이낙연 총리 역시 정부 서울청사에서 열린 국정현안점검조정회 모두발언에서 이를 확인했다. 해당 소재는 현재 7nm EUV 공정을 통해 퀄컴 스냅드래곤 AP, 엑시노스 AP 등을 위탁 생산하는 삼성전자가 주 수요처로 꼽힌다.

■ '글로벌 공급망 교란' 비난 피하기 위한 술수?

일각에서는 경제산업성의 이번 대 한국 수출 허가를 두고 "일본 정부가 출구 전략을 위해 숨고르기에 나섰다"는 의미를 부여하는 한편, 당초 최대 90일로 알려졌던 심사 기간이 한 달여로 크게 단축되었다는 점을 들어 더 이상의 추가 조치는 없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일본 경제산업성.

그러나 이번 수출 허가는 전세계 반도체 공급망, 특히 D램과 플래시 메모리 등 최대 수요처인 미국 등의 비난을 피하기 위한 계산된 전략으로 보는 것이 옳다.

이미 일본 경제산업성 관계자가 지난 7월 중순 반도체 산업 전문가와 회동을 통해 삼성전자의 원재료 보유량과 재고 소진 시점 등을 조사했다는 사실이 일부 언론 보도를 통해 밝혀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또 한국 측의 WTO 제소나 국제 사회 여론 형성 시도에 대해 "한국 측의 관리 부실로 인한 수출 관리 강화이며 타당한 건에 대해서는 수출을 허가했다"는 반론의 재료로 쓰기 위한 목적도 있어 보인다.

■ 규제 품목 추가 없이 '캐치올' 규제 적용 가능

경제산업성은 지난 7일 수출무역관리령 개정안 공포에 따른 후속조치로 포괄허가취급요령 등 규제 강화 시행 세칙을 발표했다. 이 안에는 중점 규제 대상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포토 레지스트(감광액), 에칭 가스 등 3개 품목 이외에 추가된 품목은 없다.

일본 정부가 7일 공포한 수출무역관리령 개정안. 대한민국을 백색 국가에서 삭제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그림=관보 PDF)

그러나 이미 일본 정부는 시행 세칙에 굳이 품목을 추가하지 않아도 한국 수출을 규제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 둔 상태다. 바로 캐치올 규제다.

앞서 일본 정부는 백색국가 목록(그룹A)에서 한국을 삭제하고 한국에 수출되는 모든 물자에 대해 캐치올 규제가 적용된다고 밝힌 바 있다.

캐치올 규제는 핵무기나 대량살상무기(WMD) 제조나 유통, 판매에 관련된다고 판단(의심)되는 모든 물자에 대해 수출을 규제하는 제도다.

예를 들어, 블랙박스나 IP카메라 등에 탑재되는 CMOS 센서, 혹은 금형 등 정밀 가공에 쓰이는 CNC 선반 등이 유도탄이나 미사일 제조에 탑재될 우려가 있다고 판단되면 일본 정부가 충분히 수출에 제동을 걸 수 있다.

이 때문에 한국 정부도 일본의 수출 허가 여부에 관계 없이 소재 국산화, 연구 개발 지원 등을 통해 일본 의존도를 꾸준히 낮춰 나간다는 계획이다.

■ 여전히 유효한 마지막 카드 '日 백색 국가 제외'

한국 정부는 지난 주 백색국가 일본 배제 조치를 검토했지만 한 발짝 물러나 일본산 석탄재 잔여 방사능 검사 등 폐기물 수입 규제 카드를 꺼내들었다.

OLED 디스플레이와 D램, 플래시 메모리 등 한국산 부품에 의존하는 일본 전자 업체에 타격을 줄 경우 거꾸로 '공급망 교란'이라는 일본 정부의 대응 논리에 역공을 당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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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일본 정부의 전략은 '불확실성'이다. 어떤 부품이나 소재를 언제 어떻게 추가 규제에 들어갈 지 예상하기 어렵다. 이에 맞서 가장 강력한 조치인 백색 국가 배제를 꺼내들 수 있다는 불확실성으로 대응 가능하다는 점이 꼽힌다.

실제로 일본 대형 PC 업체들은 지난 2일 한국 정부가 내놓은 백색국가 배제안에 거래선이나 국내 지사를 통해 정보 수집에 나서는 등 적지 않게 당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LCD 디스플레이나 SSD, 메모리 등 부품 재고가 1개월에 불과해 해당 조치 실행시 생산에 차질이 예상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