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비니-부테린 암호화폐 토론, 입장차 컸지만 유쾌했다

[김익현의 미디어 읽기] '생산적 대화'의 밑거름 되길

데스크 칼럼입력 :2019/04/04 15:35    수정: 2019/04/04 22:49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 기자 페이지 구독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6개월 전과 달라진 건 없었다. 경제학자는 블록체인과 암호화폐를 혹독하게 비판했다. 블록체인 전문가는 ‘기술이 해결해줄 것’이라고 반박했다. 2019년 기술 수준으로 미래를 재단하지 말라고 맞받아쳤다.

경제학자는 완고했고, 블록체인 전문가는 혈기 왕성했다. 때론 목청을 높였고, 또 때론 급하게 치고 들어왔다. 40분 내내 날선 공방을 주고 받았다.

4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제2회 분산경제포럼(디코노미)’의 백미는 누리엘 루비니와 비탈릭 부테린의 패널 토론이었다.

'닥터 둠' 누리엘 루비니는 2008년 글로벌 경제 위기를 정확하게 예측하면서 이름을 날린 경제학자다. 부테린은 비트코인에 이어 시가총액 2위인 이더리움 창시자로 유명하다.

누리엘 루비니(왼쪽)와 비탈릭 부테린이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제2회 분산경제포럼에서 한치 양보 없는 논쟁을 펼쳤다.

■ 짐작 가능했던 토론, 그럼에도 둘의 공방은 흥미진진했다

둘은 지난 해 10월 트위터로 이미 한 차례 공방을 벌였다. 그 뒤 이런 저런 매체를 통해 날선 공방을 벌였다. 그런만큼 둘의 공격 무기는 거의 모두 공개된 상태다.

루비니는 블록체인과 암호화페의 안정성에 대해 집중 공격할 게 뻔했다. 가치 급등락은 루비니가 암호화폐를 비판하는 대표적인 약한 고리였다. 분산화와 확장성, 그리고 보안이란 세 가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한다는 ‘트릴레마’ 역시 말도 안 된다는 게 루비니의 일관된 주장이었다.

부테린은 블록체인과 크립토 경제는 아직 발전 중인 영역이라는 입장이다. 지금 현재 통용되는 기술로 미래 가능성을 압살하려고 하지 말라는 얘기다. 트릴레마 과제 역시 머지 않아 해결될 것이라고 강조해 왔다.

이날 토론 역시 이런 틀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았다. 루비니의 칼날은 여전히 6개월전 겨눴던 그 곳을 계속 찔렀다. 부테린 역시 비슷한 방패로 루비니의 공격을 막아냈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뻔한 승부, 뻔한 토론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이더리움 창시자 비탈릭 부테린.

하지만 ‘트위터를 활용한 시간차 공방’과 얼굴을 맞댄 ‘실시간 토론’은 온도차가 크다. 이날 토론을 지켜보는 내내 그 생각을 했다. 부테린이 생각보다 다혈질적이면서 논리적이었던 점도 유난히 눈에 띄었다.

이날 루비니는 서두부터 블록체인과 암호화폐 진영을 거세게 몰아부쳤다. “암호화폐는 안전하지 않을 뿐 아니라 분산되어 있지도 않다. 오히려 거래소 같은 것들은 중앙화되고 있다”고 목청을 높였다. 그는 아예 “(크립토 경제는) 기존 금융시스템보다 훨씬 더 문제가 많다고 생각한다. 조만간 거품이 꺼질 것이다”고 날을 세웠다.

'닥터 둠'으로 불리는 경제학자 누리엘 루비니.

부테린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암호화폐를 ‘검열 저항’이란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고 맞섰다. 중앙시스템화 돼 있는 금융체제에선 정부의 각종 검열과 간섭이 극에 달했다는 것. 암호화폐는 그 부분에서 장점이 있다는 게 부테린의 주장이었다. 현 금융시스템이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정착된 것처럼, 크립토 시스템도 점차 안정될 것이라고 반박했다.이어진 논점들에서도 두 패널은 팽팽하게 맞섰다. 루비니는 횡령, 탈세, 테러 자금 등에 암호화폐가 동원될 우려가 있다고 공격했다. 반면 부테린은 탈세를 하는 건 과도한 세금 때문이라고 맞섰다. 블록체인을 활용할 경우 흐름을 더 잘 파악할 수 있어 오히려 세금 관리에도 더 유용한 부분이 있다고 강조했다.

암호화폐 쪽 사람들에게 루비니는 ‘꼰대’처럼 보였을 것이다. 전통 경제학 논리를 그대로 크립토 경제에 적용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루비니는 시종일관 ‘암호화폐는 불법의 온상이 될 가능성이 많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런 주장에 일부 청중들이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

전통 경제학자 눈에 부테린은 ‘철부지 기술론자'로 보였을 것이다. 화폐도 아닌 것을 화폐라고 우기고 있기 때문이다. 불안정한 부실 상품을 마구 유통시키려는 것 역시 아슬아슬해 보였을 수도 있다.

■ 접점 기대하기 힘들었던 토론…그래도 의미 있었던 첫발

40분 가량 진행된 둘의 토론 내내 이런 시각 차이가 그대로 드러났다. 그 와중에도 몇 가지 쏠쏠한 재밋거리도 있었다.

루비니는 지난 해 10월 이후 암호화폐가 ‘부의 불평등’을 유발한다고 주장해 왔다. 북한보다 불평등 정도가 더 심하다는 주장도 펼쳤다. 이 주장에 대해 부테린은 꼼꼼한 수치를 들고 나왔다. 그는 루비니가 북한 얘기를 꺼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이렇게 반박했다.

“내가 북한에 대한 수치를 찾아봤다. 비트코인은 지니계수가 0.88이다. 미국은 0.8이다. 반면 북한은 0.95다.”

그가 이런 수치를 꺼낸 건 북한과 비교하기 위한 건 아니었다. 부테린은 “이런 수치는 의미가 없다. 나도 비트코인 주소가 20개 된다. 지니계수로 비교하는 건 의미 없다”고 일축했다.

토론하고 있는 누리엘 루비니와 비탈릭 부테린.

토론 내내 루비니는 완고한 아저씨같은 자세를 견지했다. 반면 부테린은 중간 중간 “나도 크립토의 모든 측면을 지지하는 건 아니다”면서 유연한 자세를 보여주려 노력했다. 오히려 지니계수 같은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하기도 했다.

어차피 이번 토론은 서로의 입장 차이를 확인하는 선에서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면에선 ‘승부를 알고 관전하는 스포츠 경기’와 비슷했다. 하지만 정해진 결말을 향해 가는 과정은 제법 흥미진진했다.

이번 토론 직전 난 '경제학자의 논리'와 '블록체인 전문가의 신념'이 맞부닥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둘이 보여준 모습은 오히려 반대였다.

전통 경제학자는 생각보다 ‘완고’한 모습을 보였다. 반면 블록체인 전문가는 오히려 유연한 자세를 보이려 노력하는 듯했다. 게다가 얌전해 보이던 부테린이 생각보다 다혈질적인 면모를 보여준 것도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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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토론은 입장 차이만 확연하게 드러내고 마무리됐다. 중간 접점을 찾지도 못했다. 아니 애당초 중간 접점 따위는 관심도 없는 토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토론은 전통경제와 신경제 간의 거리를 좁히는 데 의미 있는 이벤트였다고 생각한다. 뒷담화를 하기보다는 공개된 장소에서 뜨겁게 공박하는 게 훨씬 더 건강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게 싸우다보면 서로를 조금은 더 잘 이해하게 될 수도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sini@zd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