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힐 권리' 공방…유럽 최고법원은 왜 구글 손 들었나

[김익현의 미디어 읽기] '알 권리와 균형' 고려

데스크 칼럼입력 :2019/09/25 14:10    수정: 2019/09/30 16:11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 기자 페이지 구독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잊힐 권리(right to be forgotten)’ 적용 범위와 관련한 중요한 판결이 유럽연합(EU)에서 나왔습니다. 예상대로 ‘EU 역내에서만 적용해야 한다’는 결정이 나왔습니다. 유럽사법재판소(ECJ) 판결입니다.

ECJ는 EU의 대법원입니다. 따라서 최종 판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구글이 프랑스 정보자유국가위원회(CNIL)를 상대로 제기한 이번 소송은 ‘잊힐 권리’ 적용과 관련해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또 다른 중요한 가치인 언론 자유와의 균형추를 어떻게 설정할 것이냐는 문제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유럽사법재판소 건물. (사진=ECJ)

■ 2014년 잊힐 권리 보호 판결…역외 확대 적용 놓고 공방

이 사건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선 시계를 2014년으로 되돌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 해 ECJ는 한 스페인 남성이 구글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의미 있는 판결을 합니다. 이 남성이 요구한 ‘구글검색 링크 차단’ 요구를 받아들인 겁니다.

스페인 남성은 당시 소송에서 1998년 채무 문제로 소유 부동산이 경매로 넘어간 기사가 구글 검색에서 보이지 않게 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2010년 이 문제가 해결됐는 데 여전히 검색되는 바람에 피해를 입고 있다는 게 그 이유였습니다.

ECJ는 이 요구를 받아들였습니다. 개인이 구글에 대해 검색 결과 삭제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판결한 겁니다. ‘잊힐 권리’가 법적으로 공식 인정된 순간입니다.

‘잊힐 권리’는 인터넷 시대엔 중요한 쟁점입니다. 까마득한 옛날 글이나 사진이 너무나 쉽게 검색되기 때문입니다. ‘관련 검색’ 같은 것들이 발달하면서 과잉맥락화 되는 것 역시 (공인이 아닌) 일반 개인들에겐 엄청난 부담입니다. 이런 부분에 대해 ‘검색 링크 차단’이란 해법을 제시한 겁니다.

구글 본사 (사진=씨넷)

여기까진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구글도 비교적 성실하게 ‘잊힐 권리’ 보장 조치를 취해 왔구요.

가디언에 따르면 구글은 “최근 5년 동안 총 84만5천501건의 잊힐 권리 요구를 받았다”고 밝혔습니다. 이런 요구 중 45%에 대해선 ‘잊힐 권리’를 적용해 관련 링크를 삭제했습니다. 삭제된 링크만 330만 건에 달합니다.

그런데 프랑스 CNIL이 구글에 한 가지 더 요구합니다. 잊힐 권리 판결 이듬해인 2015년 “EU 바깥 지역에 있는 검색 결과에도 같은 조치를 취하라”고 명령한 겁니다. 구글은 이 조치에 반발합니다. 그러자 ENIL은 10만 유로에 달하는 벌금을 부과했습니다.

구글은 여기에 반발해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EU 바깥 지역에까지 검색 차단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과도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와중에도 구글은 2016년 ‘지역 차단(geo-blocking)’ 기능을 도입합니다. 유럽 지역 이용자들이 검색 차단된 정보를 다른 지역 사이트를 통해 열람하는 걸 막는 조치였습니다. 구글 나름대로 ‘잊힐 권리’를 준수하기 위해 최대한 성의를 보인 겁니다.

■ 세계 각국 언론보장 수준 다른 점도 중요하게 고려한 듯

이번 소송의 쟁점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EU의 잊힐 권리 원칙이 역외 지역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둘째. 잊힐 권리와 알권리 중 어느 쪽에 더 무게를 둘까?

두 가지 쟁점에 대해 ECJ는 명확한 원칙을 제시했습니다. 일단 EU 이외 지역까지 잊힐 권리를 확대 적용하는 덴 신중한 자세를 취했습니다. 자칫하면 미국 기업들을 과도하게 규제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좀 더 현실적인 고려도 작용했습니다. EU가 역외 지역에까지 ‘잊힐 권리’를 적용할 경우 자칫하면 제3국 거주자들의 알 권리를 침해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이 부분은 올초 ECJ의 마키에즈 슈푸나르 법률 고문이 이미 한 차례 지적했던 부분입니다.

더 큰 우려는 따로 있습니다. EU가 잊힐 권리에 따라 전 세계 시장에서 링크 삭제 의무를 부과할 경우 ‘역풍’이 불 우려도 있다는 겁니다. 특히 중국을 비롯해 언론 자유를 엄격하게 제한하는 나라들이 똑 같은 요구를 해 올 경우 ‘알 권리’가 심각하게 침해될 수도 있습니다.

유럽사법재판소 공식 사이트.

예를 들어볼까요? 중국이 특정 검색어에 대해 차단을 요구했다고 가정해봅시다. EU가 세계 전역에 같은 의무를 부과할 수 있다면 중국도 마찬가지 요구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 유럽 지역 거주자들의 알 권리가 침해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이런 판결이 가능했던 건 구글이 ‘지역 차단’ 기능을 도입하면서 EU 역내에서만 잊힐 권리를 보장할 수 있도록 한 점도 중요하게 고려된 것으로 풀이됩니다.

또 전 세계의 언론 자유 수준이 천차만별이란 점도 중요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구글은 재판 과정 내내 언론 자유 지수가 낮은 나라들이 같은 원칙을 요구할 경우 알 권리가 침해될 수 있다는 취지의 주장을 펼쳤습니다. 법원이 이 주장을 받아들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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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J는 잊힐 권리 관련 판결에서 구글 손을 들어주면서 한 가지 조건을 달았습니다. EU 이용자들이 우회 경로를 통해 역외 지역 사이트에 접근하는 걸 막을 의무를 구글에 부여했습니다.

이를테면 특정인의 ‘잊힐 권리’가 인정돼 유럽 내에서 링크 삭제된 콘텐츠를 가상사설망(VPN)을 비롯한 여러 우회 경로를 통해 EU 바깥 지역 웹 사이트를 통해 열람하는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겁니다.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sini@zd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