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권투 영웅의 흥미로운 암호화폐 실험

[김익현의 미디어 읽기] 매니 파퀴아오의 'Pac 토큰'

데스크 칼럼입력 :2019/09/04 08:42    수정: 2019/09/20 08:40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 기자 페이지 구독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놀기 좋아하는 톰 소여에게 이모는 “담벼락 페인트 칠을 끝내고 놀아라”고 특명을 내린다. 당연히 톰은 괴롭다. 마지 못해 페인트 칠을 한다.

이런 톰에게 친구 로저스가 다가온다. 그는 선장놀이를 하면서 톰을 약올린다.

그런데 톰의 반응이 의외다. 아는 척도 하지 않는다. 놀러가려는 친구들의 모습은 거들떠 보지도 않은 채 페인트 칠에 열중한다. 페인트 칠에 푹 빠진 톰의 모습에 친구들도 솔깃해진다. 둘은 이런 대화를 나눈다.

“이봐. 설마하니 이 일을 좋아하는 척 하는 건 아니겠지?”

“좋아하냐고? 글쎄 내가 이 일을 좋아하지 않을 이유도 없지. 아이들한테 담장에 회칠할 기회가 어디 날마다 있는 줄 아니?”

매니 파퀴아오. (사진=위키피디아)

이 때부턴 둘의 입장이 역전된다. 어느 새 페인트 칠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로 바뀐다. 결국 벤은 페인트 칠을 하기 위해 자기가 갖고 있던 사과를 톰에게 준다.

마크 트웨인의 소설 ‘톰 소여의 모험’ 앞부분에 나오는 얘기다. 이 에피소드는 일과 놀이, 그리고 보상 경제에 대해 많은 걸 생각하게 해준다. 소셜 미디어를 기반으로 한 공유 경제를 이해하는 데도 톰 소여 이야기는 중요한 힌트를 제공해 준다.

■ 팬덤과 암호화폐의 결합, 어떻게 될까

이제 상황을 조금 바꿔보자. 수 많은 사람들이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에 열광한다. 콘서트에 참석하거나, 관련 상품을 구매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한다.

관심 없는 사람들에겐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들에게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건 수지 타산 맞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팬들에겐 그 어떤 것보다 즐거운 일이다. 톰 소여의 친구들이 사과나 장난감을 주면서 페인트 칠을 했듯, 수 많은 팬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들을 위해 돈과 시간을 아끼지 않는다.

스포츠 스타나 연예인은 그 자체로 거대한 생태계다. 그들만의 경제 시스템을 형성하기도 한다. 한 연구에 따르면 K팝의 새 역사를 쓰고 있는 BTS의 생산유발효과가 연간 5조6천억원에 이른다.

그렇다면 암호화폐를 활용해 이런 생태계에 활력을 불어넣을 순 없을까?

불세출의 권투 선수이자 필리핀 국민영웅인 매니 파퀴아오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놨다. 파퀴아오는 지난 1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자선 콘서트에서 자신만의 암호화폐 ‘Pac 토큰’을 발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Pac 토큰의 용도는 간단하다. 파퀴아오와 관련된 각종 상품을 구매하는 화폐 역할을 하게 된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 파퀴아오와 소통하는 데도 쓸 수 있다. 한 마디로 매니 파퀴아오란 스포츠 스타를 중심으로 한 생태계의 기축 통화인 셈이다.

언뜻 보면 황당해 보인다. 하지만 파퀴아오가 어떤 인물인지 알면 얘기가 달라진다.

파퀴아오(오른쪽)와 메이웨더 간의 세기의 대결은 전 세계 권투팬들의 관심을 모았다. (사진=씨넷)

매니 파퀴아오는 필리핀 권투 영웅이다. 8체급 석권이란 전무후무한 업적을 달성했다. 오스카 델라 호야를 비롯한 전설적인 선수들이 그에게 무릎을 꿇었다. 미국이나 남미 선수들이 판치던 세계 권투계에서 동양인의 힘을 유감 없이 과시했다.

그러다보니 필리핀에선 절대적인 존재다. 파퀴아오가 경기를 할 때면 모든 국민이 TV 앞에 앉는다. 그 덕에 경기 중계 중엔 범죄율이 뚝 떨어진다는 통계도 있다. 교전 중인 정부군과 이슬람 반군이 파퀴아오가 경기 중인 시간엔 휴전을 한다는 얘기가 들릴 정도다.

그 뿐 아니다. 파퀴아오는 필리핀 현역 정치인이기도 하다. 2009년 하원 의원에 당선됐으며, 2016년엔 상원에 진출했다. 노래 실력도 수준급이어서 수시로 공연을 한다. BTS가 한국에서 누리고 있는 것 못지 않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토큰 생태계를 만들기에 충분한 잠재력을 갖고 있다.

■ GCOX 익스체인지의 '유명인 화폐'가 눈길을 끄는 이유

파퀴아오의 이번 프로젝트에서 관심을 끄는 건 싱가포르의 암호화폐 거래소 GCOX 다. GCOX는 지난 5월 유명인들을 대상으로 한 개인화 토큰 거래소인 GCOX 익스체인지를 오픈했다.

GCOX 익스체인지는 최신 블록체인 기술을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적용하려는 시도다. 팬들이 좋아하는 스타들과 맘껏 소통하고, 관련 상품을 손쉽게 구매할 수 있도록 해준다.

매니 파퀴아오의 Pac토큰은 이 거래소가 내놓은 첫 작품이다. 앞으로 잉글랜드 축구 스타 마이클 오언, 테니스 스타 워즈니아키를 비롯한 유명 스타들의 개인화 토큰도 계속 출시될 예정이다.

GCOX는 스타 관련 상품 판매업체들의 플랫폼 역할까지 자임하고 있다. 팬미팅을 실시간 스트리밍 방식으로 구현하는 등의 프로젝트도 추진할 계획이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이뤄지는 다양한 '스타 마케팅'을 블록체인 플랫폼 위에서 구헌하겠다는 구상이다. 그 과정에서 암호화폐는 일종의 '셀럽 토큰(Celeb token)' 역할을 한다.

파퀴아오의 Pac 코인은 그 첫 시도란 점에서 벌써부터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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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과 놀이를 토큰 경제로 승화시키려는 파퀴아오와 GCOX 익스체인지의 암호화폐 프로젝트는 성공할 수 있을까? 현재로선 쉽게 답하기 힘든 문제다. 하지만 이번 프로젝트가 성공할 경우 제2, 제3의 유명인 토큰이 계속 나올 가능성은 많아 보인다.

그럴 경우 '유명인 토큰'이 암호화폐 시장의 또 다른 명물이 될 수도 있을 전망이다. 어쩌면 그 코인들의 시세가 유명인의 인기도를 보여주는 척도가 될 지도 모르겠다.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sini@zd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