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의 '사회적 가치'에 대한 오해와 진실

[이균성의 溫技] 자본의 요구가 달라졌다

데스크 칼럼입력 :2019/07/19 10:57    수정: 2019/07/19 14:28

#최태원 SK 회장의 경영철학은 DBL(Double Bottom Line)로 압축된다. DBL은 기업이 ‘경제적 가치’와 함께 ‘사회적 가치’도 동시에 추구하는 경영전략이다. 경제적 가치는 이윤 창출을 뜻한다. 기업 본연의 가치다. 사회적 가치는 기업에겐 이윤보다 비용에 가깝다. 환경, 고용, 동반성장, 지배구조 등이 그러하다. 사회적으로는 높은 가치를 갖지만 기업으로서는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문제다.

#사회적 가치를 두고 시민사회와 기업이 대립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기업은 더 큰 경제적 가치(이윤)를 위해 비용을 줄여야 하는 입장이고, 시민사회는 기업 행위를 통해 발생하는 사회문제의 해결 비용은 기업이 감당해야만 한다고 보는 것이다. 정부와 정치권은 그 사이에서 적절한 수준의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낸다. 그것이 이른바 법제도다. 기업 입장에서 보면 그 모든 것은 규제에 해당한다.

18일 진행된 제44회 대한상의 제주포럼에서 첫 강연자로 나선 최태원 SK그룹 회장. (사진=대한상공회의소)

#사회적 가치는 그래서 사회적으로 필요한 규제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그건 곧 비용이다. 그런데 비용이 늘어나는 걸 바라는 기업은 없다. 그 비용 탓에 기업의 자유도가 낮아지고 경쟁력이 약화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믿음과 생각은 분명한 근거를 갖고 있다. 규제가 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사례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고, 규제가 덜한 곳으로 기업들이 이주하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다.

#최태원 회장이 사회적 가치를 주장할 때 많은 사람이 그 진정성을 의심하는 배경이 바로 그것이다. 시민사회이건 다른 기업이건 최 회장의 주장을 일종의 ‘쇼’로 생각한다. 기껏해야 위선적인 ‘착한 기업 코스프레'일 뿐이라고 여긴다. 심지어 문재인 정부와 코드를 맞추기 위한 '얕은 수준의 전략적 행위'라고 보기도 한다. 이윤이 최선인 기업 수장이 절대 그럴 리 없다는 선입견에 빠져있는 것이다.

#외부 시각만 그런 것이 아니다. SK그룹 내부에서도 그렇게 보는 사람이 적잖다. 먹고 살기도 바쁜데 회장 혼자서 사치를 부리고 있다는 생각들을 하는 것이다. 최 회장은 18일 열린 ‘대한상의 제주포럼’에서 “DBL 경영을 추진하면서 임직원의 냉소주의 때문에 힘들었다”고 털어놓았다. 최 회장은 “서든 데스(sudden death)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왜 변해야 하는 지 협박하고 설득하였다”고 한다.

#DBL 경영을 추진하기 위해 임직원을 협박까지 할 정도라면, 그걸 그저 쇼로 치부하고 마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특히 DBL 경영을 단지 구호로 외치는 게 아니라 경영 KPI(핵심평가지표)로 시스템화했다면 말이다. 적어도 그건 장난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신념화한 경영철학이라 보는 것이 더 옳다. 그러니 궁금할 수밖에 없다. 최 회장은 왜 굳이 고비용 구조를 경영 철학으로 삼게 됐을까.

#최 회장을 잘 아는 재계 고위관계자는 그 답을 명료하게 제시해줬다. ‘자본의 요구’ 때문이라는 것이다. 시민사회나 정부가 기업의 사회적 가치에 대해 요구하는 것은 모두 아는 바지만, 자본의 요구이기도 하다는 건 많은 사람에게 생경한 일이다. 특히 자본은 오직 이윤 창출을 위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에겐 더. 그러나 자본으로부터 협박에 가까운 요구가 쏟아지고 있다는 건 분명한 팩트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글로벌 큰 손인 각종 투자기금은 ‘ESG 투자’를 가속화하고 있다. ESG 투자는 사회책임투자 혹은 지속가능투자라고도 한다. 재무적 요소를 집중적으로 보는 전통적인 투자 방식과 달리 환경(Environment)·사회(Social)·지배구조(Governance) 문제까지 살피는 방식이다. 그것이 '지속가능 기업'에 투자함으로써 장기적으로 손실을 줄이고 수익을 높이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들 기금은 이미 국내 유수기업에도 경고장을 보내온 상태다. ESG의 조건을 제시하고 수년내 이를 충족시키지 못할 때 투자금을 회수하겠다는 게 주요 내용이다. 이들은 이미 국내 유수 기업의 주요주주 지위에 있는 기금들이다. 시장을 통해 투자금을 일시에 회수할 때 해당 기업의 주가가 폭락하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거기서 그치는 게 아니다. 글로벌 악덕기업으로 낙인찍힐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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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돈으로 각각 수백조원 이상 보유한 많은 글로벌 투자 기금이, 그러니까 세계적으로 가장 큰 자본이, 변한 거다. 눈앞 이윤보다 장기 생존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왜? 지속가능하기 위해서! 특히 기후와 에너지 문제는 이제 좌파 환경단체의 전유물이 아니라 각종 투자 기금인 대형 글로벌 자본의 핵심 관심사가 된 것이다. ESG에서 E(Environment)가 맨 앞에 있는 까닭이 그것이다.

#믿겨지는가? 그러나 믿든 안 믿든 그것은 엄연한 팩트다. 최 회장이 포스코나 한국전력 등과 함께 그 경고를 받았다는 것도. ‘ESG 쓰나미’가 몰려오고 있으며, 최 회장은 누구보다 먼저 그 위협을 느낀 당사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