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 암호화폐, 싫어도 마주할 것은 마주해야

"혁신 위해선 암호화폐 논의의 장 마련돼야"

기자수첩입력 :2019/07/19 08:54    수정: 2019/07/19 10:16

"한국은 이미 늦었어요."

한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답변이 곧바로 칼같이 내리꽂혔다. "한국이 블록체인으로 세계 시장에서 주도권을 차지할 수 있겠는가"란 물음에 업계 관계자가 한 대답이다.

허탈한 웃음만 남았다. 한국은 세계 어느나라보다 블록체인과 암호화폐에 열성적이었다. '김치 프리미엄'이란 말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어쩌다 이렇게 맥빠지는 상황까지 오게 된 걸까.

최근 페이스북 암호화폐인 리브라 코인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각국 규제기관들은 저마다 논평을 내놓으며 암호화폐에 적극 대응하고 있다. 미국, 프랑스, 영국을 비롯한 주요 7개국(G7)은 태스크포스(TF)를 만들어 암호화폐 규제 문제를 논의할 계획이다.

암호화폐 비트코인(이미지=이미지투데이)

일본도 분주하다. 암호화폐를 '암호자산'으로 명명하며 제도 마련에 뛰어들었다. 중국은 인민은행에서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를 발행한다고 나섰다. 미국은 최근 증권거래위원회(SEC)가 암호화폐 공개(ICO)를 승인했다.

암호화폐를 실제 제도권으로 어떻게 편입시키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용할지 적극 모색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하다. 삼성전자, 카카오 같은 국내 대기업까지 블록체인·암호화폐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정부는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최근 금융위원회가 '페이스북 리브라 이해 및 관련 동향'이라는 보고서를 낸 것은 의미있고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이 보고서 또한 금융위의 공식입장은 아니다.

그러다보니 국내 기업들은 정부 눈치를 살피기 바쁘다. 암호화폐 활용 사업을 마음껏 진행하지도 공개하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정부는 암호화폐의 '암'자도 입 밖으로 내길 원치 않는 모양새다. 지난 2017년 이후 암호화폐에 대한 부정적 기조를 여전히 이어가고 있다. "투자자 보호"를 내세우며 외면하기 급급하다.

대통령 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에서는 지난해 말 블록체인·ICO TF를 만들어 블록체인과 암호화폐에 대해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6개월이 지나도록 TF 구성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것은 진정한 보호일까, 아니면 면피일까.

■ 입장 정리하지 못한 걸까, 대응책이 없는 걸까

어떤 대상을 피할 땐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그 대상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지 못했거나, 입장은 정했지만 제대로 대응하기 힘들 때다.

전자든, 후자든 이제 그것이 합당한 회피의 이유가 되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입장을 정리하거나, 입장에 따른 대응책을 논의하기에 이미 충분히 많은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다.

암호화폐를 투기로 바라보던 시선은 이제 한풀 가라앉았다. 비트코인 가격이 오른다고 해서 예전처럼 함부로 뛰어들지도 않는다. 이미 지난해 한 차례의 크립토버블 경험이 쌓인 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묻지마 투자'를 비롯한 투기와 암호화폐 발행·유통 과정의 불투명성, 부실한 투자자 보호 등의 문제는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이는 앞으로 장기적으로 해결해 나가야 하는 것이지, 하루아침에 정리되는 문제가 아니다. 이를 이유로 이미 커가고 있는 시장의 존재를 외면하는 것은 나홀로 눈 가리고 앉아있는 셈이다.

암호화폐를 화폐나 디지털 자산으로 빨리 인정하라고 촉구하는 것이 아니다. 암호화폐 산업을 장려하라고 촉구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싫어도 마주할 것은 마주하자는 얘기다. 최소한의 논의 장은 열고, 이미 자리잡은 시장에 대한 불확실성과 부작용은 줄이고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방안을 논의해보자는 것이다.

업계에서도 아직까지 블록체인과 암호화폐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누군가는 블록체인을, 누군가는 암호화폐를, 누군가는 그 둘 다를 회의적으로 바라본다. 업계 내부에서도 이렇게 의견이 갈릴 정도로 블록체인·암호화폐 산업은 초기 단계이다. 모두가 제각각의 철학과 신념, 논리로 블록체인과 암호화폐의 필요성과 가치에 대해 탐구하고 있는 중이다.

이런 탐구와 논쟁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른다. 완결된 기술과 합의란 금방 딸 수 있는 과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부는 무얼 기다리고 있는 걸까. 그 과실이 누군가로 인해 얻어질 때까지 관망하며 기다리고만 있는 걸까.

정부가 보호와 면피 사이의 줄다리기를 이어나가는 사이, 이미 각국의 거대기업은 전면에 나섰다. 자신들의 암호화폐를 발행하고 블록체인 생태계에서의 주도권을 선점하려 한다. 페이스북의 암호화폐 리브라 프로젝트를 이끄는 데이비드 마커스는 16일(현지시간) 열린 미국 상원 은행위원회 리브라 청문회에서 “블록체인 기술은 피할 수 없으며, 이를 주도하지 못하면 국가안보기술이 미치지 않는 곳(다른 나라)에 뺏기게 될 것”이라고 밝히며 이미 패권 경쟁의 시작을 암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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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블록체인과 암호화폐를 두고 눈치를 보고, 계산기를 두드리는 사이 그들은 이미 따라갈 수 없는 생태계를 구축하고, 각국은 그 거대기업을 필두로 또 패권싸움에 나설 것이다. 그제서야 낄 틈은 어디에도 없다. 또 늦은 것이다.

우리는 언제까지 다른 나라 규제 당국의 눈치를 보며 따라가기 바빠야 하나. 기술혁신을 통한 선두주자는 눈칫밥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빠른 결정과 시도, 그에 따른 제도적 보완. 혁신 국가는 여기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더욱이 4차산업혁명의 선두주자가 되겠다고 한 정부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