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G에 굴복한 애플…"자기만의 칩이 없었다"

[김익현의 미디어 읽기] 버지니아 울프에 빗대본 애플-퀄컴

데스크 칼럼입력 :2019/04/17 10:00    수정: 2019/04/17 10:06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 기자 페이지 구독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여자가 작가로 살아가기 위해선 두 가지가 필요하다. 돈과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은 페미니즘 선언서로 꼽히는 명작이다. 1929년 출간된 이 책은 여성이 작가가 되기 어려운 이유를 예리하게 집어냈다.

여성이 홀로서기 위해선 돈과 자기만의 방이 꼭 필요하다는 선언. 물적 토대 없는 독립선언의 끝은 굴종뿐이란 사실을 깔끔하게 정리해줬다.

애플과 퀄컴이 법정 밖 화해로 소송을 마무리하기로 했단 소식을 들으면서 버지니아 울프와 ‘자기만의 방’을 떠올렸다. 90년 전 버지니아 울프가 제기했던 그 명제가 그대로 적용된 느낌이 들어서다.

애플과 퀄컴 간의 세기의 소송이 법정 밖 화해로 마무리됐다. 이번 소송에선 퀄컴이 애플에 완승을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 (사진=씨넷)

이번 소송에 임한 애플의 각오는 다부졌다. 이 기회에 모바일 필수표준특허를 갖고 횡포를 휘두르는 퀄컴의 버릇을 고쳐놓겠다고 단단히 벼뤘다. 특허 라이선스 요금 산정 기준, 특허 라이선스를 해야 칩을 공급하는 나쁜 관행을 없애버리겠다고 공공연하게 떠들었다.

그랬던 애플이 소송 하루 만에 화해 문서에 서명했다. 외신들이 “애플이 백기를 들었다”고 평가할 정도로 전격적이었다.

얻어낸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애플은 왜 항복 문서(나 다름없는 화해 문서)에 서명했을까?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팀 쿡 최고경영자(CEO)를 비롯한 고위 경영진의 법정 증언이 부담됐을 수도 있다. 그 과정에서 영업 비밀이 새나갈 것을 걱정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따로 있다. 최근 모바일 시장의 화두로 떠오른 5G다.

애플은 아직 5G 아이폰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삼성전자, 화웨이 등 경쟁사들에 한 발 뒤진 상태다. 문제는 내년에도 5G 아이폰 출시 가능성이 높지 않단 점이다. 파트너로 생각했던 인텔은 스마트폰용 5G모뎀 칩 공급능력이 부족하다. 안정적인 공급 능력을 갖춘 삼성전자에는 거절 당했다.

5G 바람을 제대로 타기 위해선 퀄컴을 대체할 대안이 없었다. 애플은 안드로이드 경쟁업체들에 비해 1~2년가량 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버지니아 울프. (사진=위키피디아)

엔드포인트 테크놀로지스의 로저 케이 애널리스트가 씨넷과 인터뷰에서 이런 상황을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 씨넷 기사 바로가기)

“애플은 퀄컴 없이 실행 가능한 5G 전략을 세울 수 없었다. 인텔은 믿을만한 공급자가 아니다. 화웨이는 아직 시작도 하지 못했다. 애플은 2020년이나 2021년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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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5G 기회를 놓칠 경우 상당히 치명적일 수 있다는 현실 인식이 애플의 ‘무조건 항복’으로 이어졌다는 해석인 셈이다. 5G 경쟁을 위한 물적 토대가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독립'만 외치기엔 다소 부담스러웠던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자기만의 방’이 여성 독립의 전제조건이라고 설파했던 버지니아 울프의 진리는 90년 뒤 애플에 그대로 적용해도 크게 그르진 않아 보인다. ‘자기만의 칩’이 없었던 애플은, 결국 ‘까다롭고 제멋대로인’ 파트너의 품으로 다시 돌아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sini@zd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