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체인과 행복회로

[기자수첩] 막연한 기대는 금물

기자수첩입력 :2018/11/06 09:19    수정: 2018/11/06 10:22

# 인터넷 상에 '행복회로'라는 말이 있다. 일본의 한 캐릭터에서 유래된 표현이다. 불행한 상황을 아주 긍정적으로 해석하며 (정신세계에서) 극복해 내는 걸 '행복회로를 돌린다'고 얘기한다. 사용 의미가 확대돼 이제는 근거 없이 미래에 대해 낙관할 때도 이런 표현을 붙인다. 정신승리와도 비슷한 맥락이다. 행복회로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려는 노력'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고 믿으면 실제로 좋은 일이 일어나는 '자기중촉적 예언' 이론도 있으니 말이다.

# 블록체인 업계를 들여다 보면 종종 행복회로가 작동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암호화폐 투자자들의 '존버'에도 행복회로가 장착됐다. 존버는 고점에 산 코인이 크게 하락해도 손절하지 않고 들고 있는 것을 말한다. '언젠가 오르겠지'라는 행복회로가 작동하지 않으면 견디기 힘든 시간일 것이다. 또 정말 알수 없는 이유로 가격이 폭등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 경우 행복회로가 망상에 가까운 것만은 아니다.

# 블록체인 업계에서 또 다른 행복회로를 발견할 때가 있다. 이번 행복회로는 암호화폐공개(ICO) 정책에 대한 것이다. 정부가 암호화폐 및 ICO와 관련해 하는 모든 발언과 행동을 지나치게 긍정적인 시그널로 해석하는 경향이 종종 발견된다. 예를들어보면 이런 것이다. 경찰이 불법음란물 사이트 운영자가 회원에게 받은 비트코인을 몰수했다는 소식이 나오자, 비트코인을 자산으로 인정한 것이니 환영해야 한다는 식이다. 실은 범법 행위에 비트코인이 악용된 것뿐이다. 블록체인 업계가 전혀 환영할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일반 대중에 비트코인이 '검은 돈'을 운반하는 데 쓰였다는 부정적인 인식만 남겼다.

# 최근엔 ICO 정부 정책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예상하는 업계 분위기가 느껴진다. 홍남기 국무조정실장이 최근 국감에서 "11월에 ICO 입장 표명을 할 것"이라는 아주 짧막한 팩트에 정부 입장이 크게 선회할 것처럼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미지=나무위키)

# 자, 이제 그럼 행복회로를 돌려보자. "이런 낙관론이 널리 퍼져 정책 입안자들 귀에 들어가고 그들이 업계 기대에 부흥해야 할 것같은 압박을 느껴 ICO 합법화 정책을 내놓지 않을까" "그동안 암호화폐에 부정적였던 장하성 김동연 경제 투톱이 교체될 거라는데 그럼 정부가 ICO허용으로 전향적으로 돌아서지 않을까"

# 미안하지만 이번 행복회로는 망상에 가깝다. 최근 기자가 국무조정실 관계자에게 들은 이야기는 오히려 '좌절회로'를 돌리게 만든다. 그는 "국조실의 입장은 금감원의 ICO기업 실태조사 결과 검토가 끝나면 발표하겠지만, 국제 동향과 비슷한 취지가 될 것이다. 세계적으로 ICO를 허용하고 있는 국가가 없다"고 말했다. 심지어 11월에 입장 발표가 나오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도 했다. 그는 "홍남기 국조실장이 국감에서 한 말은 11월 중에 검토해 보겠다는 것이지 입장을 발표하겠다는 게 아니다"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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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행복회로는 여기서 멈추자. 어떻게 해야 합리적인 ICO 규정을 이끌어 낼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한다. 먼저, 블록체인 업계는 왜 언제 나올지도 모르는 정부의 입장 발표를 기다리고만 있어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해 본다. 어떤 산업에 중요한 결정을 하는데 공청회 한번 하지 않는 경우는 없다. 비공식적으로 관계 부처에서 블록체인 업체를 만나는 것도 물론 필요하다. 이를 통해 업계의 내밀한 속사정을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그냥 업계 동향 파악에서 끝나버리니 문제다. 정부가 입장을 발표하는 것도 정책 결정의 하나다. 지난 1년간 암호화폐 정책을 뭉개고 있던 것과 분명 다른 액션이다. 그런 결정을 내리는데, 왜 업계, 학계 전문가들의 의견을 공식적으로 청취하고, 토론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 지금 블록체인 업계에는 온갖 산업에서 머리좋은 사람들이 다 몰려와 있다. 누군가는 블록체인 산업이 언젠가 잘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이렇게 똑똑한 사람들이 몰려와 있는데 안될 수 없지 않겠느냐"고 반문하기도 한다.(이것 또한 행복회로일까?) 실제 업계에는 "자기 인생을 다 걸고 블록체인 사업에 올인할 각오"로 업계에 발을 들였다는 똑똑하고 패기넘치는 젊은이들이 많다. 인터넷 시대의 폭발적인 성장을 경험한 베테랑들은 블록체인을 보고 국가의 미래가 걸린 산업이겠다는 것을 직감했다고도 한다. 정말 그렇다면 '정부 입'만 바라보고 있어선 안된다. 정부가 긍정적인 ICO 정책을 내려줄 것으로 막연히 기대하고 있으면 안된다. 여론을 환기시키는 결집력, 구심점 부족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