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 10년…세상은 이렇게 바뀌었다

2008년 경제위기 때 태동…분산경제 씨앗 뿌려

인터넷입력 :2018/11/01 11:18    수정: 2018/11/01 11:33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 기자 페이지 구독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2008년 10월31일. 익명의 저자가 쓴 논문 한 편이 공개됐다. ’비트코인: P2P 전자화폐 시스템’이란 소논문이었다. 지금은 수 많은 사람들의 관심 대상으로 떠오른 암호화폐 비트코인의 탄생을 알린 신호탄이었다. (☞ 사토시 나카모토 논문 바로 가기)

9쪽 남짓한 그 논문은 중앙집중형 금융 시스템을 정면 비판했다. 그와 더불어 ‘분산시스템’에 대한 강력한 신념을 설파했다.

디지털 화폐와 암호학, 그리고 분산시스템에 대한 깊이 있는 담론을 담고 있던 그 논문은 순식간에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자본주의 금융시스템의 붕괴를 목격했던 그 무렵의 사회 분위기와도 잘 맞아 떨어진 덕분이었다.

비트코인, 이더리움, 리플 등 각종 암호화폐들. (사진=지디넷)

그 후 10년. 저자의 가면은 여전히 벗겨지지 않고 있지만 논문이 제기한 문제의식은 우리 사회 깊숙이 파고 들었다.

비트코인 탄생 10년은 블록체인 탄생 10년이란 말로 바꿔도 크게 그르진 않다. 10돌 생일을 기념해 비트코인과 블록체인을 둘러싼 이슈를 정리했다. (기사 작성 과정에 CNBC를 비롯한 여러 외신들의 비트코인 탄생 10돌 특집 기사들을 참고했다.)

■ 타락한 금융 자본과 분산경제 시스템

비트코인이 2008년에 탄생한 건 어쩌면 숙명이었다. 그해 세계 금융자본은 몰락 직전까지 내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미국 금융자본의 상징 리먼 브러더스 붕괴다. 리먼 브러더스 붕괴와 함께 세계 금융자본 시스템의 추악한 속살이 그대로 드러났다. 파생 상품을 남발했던 금융 자본에 대한 신뢰는 바닥을 향해가고 있었다.

비트코인은 이런 시대 분위기의 산물이었다. 사토시 나카모토의 논문은 통제 능력을 상실한 자본주의 금융 시스템의 근본을 파고 들었다. ’세계의 공장’이던 19세기 영국 자본주의의 어두운 그림자를 고발했던 ‘자본론’을 연상케했다. (물론 둘의 영향력이 비슷했단 얘긴 아니다.)

“거대 자본의 탐욕으로 타락해버린 자본주의 경제 비판”은 순식간에 수 많은 사람들에게 울림을 자아냈다. 비트코인의 근간이 된 블록체인이 중앙집중형 국가 시스템의 근간을 흔들 혁명적인 기술이 될 수도 있다는 기대를 받은 것도 이런 시대 상황과 깊은 관련이 있다.

■ 여전히 가면 속에 숨어 있는 사토시 나카모토

사토시의 논문이 공개된 것은 2008년 10월 31일은 할로윈데이다. 수 많은 사람들이 가면을 쓰고 축제를 벌이는 날이었다.

‘비트코인: P2P 전자화폐 시스템’의 저자 역시 가면 속에 숨었다. 사토시 나카모토는 자신의 정체를 공개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일본 사람이라고만 밝혔다.

사토시 나카모토의 정체를 밝히기 위한 노력이 10년 동안 계속됐다. 그 과정에서 별의별 얘기들이 다 나왔다.

사토시가 논문에 쓴 완벽한 영어 때문에 “일본사람일리 없다”는 의구심이 제기되기도 했다. 소프트웨어 코드에 일본어가 전혀 없는 점도 이런 의구심을 부채질했다.

사토시 나카모토가 논문을 통해 주장한 비트코인 거래 방식.

영국식 영어 흔적을 토대로 사토시 나카모토는 영국 사람이 분명하단 음모론도 제기됐다.

그런가하면 완벽한 소스코드를 감안하면 혼자 작업한 게 아닐 것이란 주장도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보니 영문학계에서도 셰익스피어가 한 사람이 아닐 것이란 음모론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혼자선 도저히 그 방대한 작품을 다 쓸 수 없다면서.)

관심이 커지자 사토시는 2011년 모습을 감췄다. 어딘가에서 살고 있는 사토시 나카모토의 비트코인 가치는 62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이 대목에서 평생 가난하게 살았던 또 다른 혁명가 마르크스와는 다른 행보를 걷고 있다.)

■ 피자 한 판에 6천300만 달러?

2009년까지 채굴된 비트코인은 총 50개. 이들을 ‘제네시스 블록’이라 부른다.

비트코인 첫 거래는 사토시가 논문을 공개한 지 일주일만에 성사됐다. 사토시 나카모토가 개발자였던 할 피니와 첫 거래를 했다.

지금은 엄청난 가치를 인정받고 있지만 이 무렵 비트코인은 별 가치가 없었다. 2010년 5월 플로리다의 한 개발자가 피자 한 판을 사기 위해 1만 비트코인을 지불한 사례는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초기에 미국에서 볼 수 있었던 비트코인 거래 기기. (사진=씨넷)

이 가격은 현재 거래 가격 기준으로 하면 6천300만 달러에 해당된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피자였던 셈이다.

비트코인 시세는 그 뒤 엄청나게 폭등했다. CNBC에 따르면 2010년 말 무렵엔 비트코인이 모바일 거래 수단으로 서서히 자리잡으면서 시가총액이 100만 달러에 이르게 된다.

■ 실크로드와 마운트곡스, 그리고 비트코인의 수난

비트코인 초기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마운트곡스다. 마운트곡스는 2010년 출범한 암호화폐 거래소였다. 출범 3년 만에 마운트곡스는 전 세계 암호화폐 거래의 70% 가량을 취급했다.

하지만 마운트곡스는 2011년 첫 해킹을 당했다. 당시 비트코인 거래 가격이 1달러에 도달하면서 관심을 끌던 무렵이었다.

초기 비트코인 역사를 대표했던 마운트곡스는 여러 차례 해킹을 당한 끝에 결국 폐쇄됐다. 마운트곡스 창업자였던 제르 맥칼렙은 이후 리플, 스텔라 같은 새로운 암호화폐 프로젝트를 주도했다.

다크웹 대표주자 실크로드도 비트코인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다. 잘 아는대로 실크로드는 무기, 약물 같은 금지 물품 거래 전문 사이트다. 그런만큼 익명성이 보장된 비트코인은 딱 들어맞는 거래 수단이었다.

그러다보니 미국 규제 당국이 2015년 실크로드를 폐쇄하자 비트코인 가격도 함께 폭락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 '2만 달러'를 향한 행진

지난 해 초까지만 해도 비트코인 거래가격은 1천 달러 수준이었다. ‘1달러 돌파’에 주목하던 시절에 비하면 격세지감을 느낄 수준. 하지만 그것은 이후 불어닥칠 광풍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지난 해 비트코인은 연일 뉴스거리가 됐다. 엄청난 가격 폭등 때문이었다. 결국 연말엔 1만9천달러까지 치솟았다. 이와 더불어 ‘암호화폐 억만장자’들이 속속 탄생했다.

하지만 이후 여러 규제 이슈들이 제기되면서 가격이 뚝 떨어졌다. 현재는 6천300달러 수준에 거래되고 있다.

■ ICO와 규제 이슈…암호화폐의 미래는?

비트코인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ICO란 새로운 용어까지 등장했다. 암호화폐 발행을 통한 자금 유치. 증권가에서 널리 사용되는 IPO에서 파생된 말이다.

ICO는 2013년 첫 시작된 이래 스타트업들에겐 소중한 젖줄 역할을 했다.

CNBC에 따르면 ICO 덕분에 2천개 이상의 암호화폐가 존재하고 있다. 덕분에 전체 암호화폐 시장 규모도 2천억 달러 수준을 넘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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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ICO 규모가 커지면서 규제 이슈가 제기됐다. 미국에선 증권거래위원회(SEC)가 ICO에 대해서도 증권에 준하는 규제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한국에서도 ICO 허용 문제를 놓고 관계 당국이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sini@zd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