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규제로 활력 실종…보편요금 재앙”

'ICT산업, 이대로 괜찮은가' 세미나서 지적

방송/통신입력 :2018/05/30 15:48    수정: 2018/05/31 08:01

한국이 정보통신기술(ICT) 강국으로 성장하는 데 견인차 역할을 해 온 통신산업이 ‘재규제화’ 흐름에 휩싸이면서 산업 활력이 실종되고 있다는 전문가 지적이 나왔다.

정부가 ‘가계통신비 절감’에 맞춰져 있는 통신 정책을 ‘융합산업 활성화를 통한 신규 비즈니스 창출’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다.

특히 정부가 통신 요금을 사실상 책정하는 보편요금제 도입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규제로, 정부의 가격통제는 자칫 재앙적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건국대학교 경제학과 권남훈 교수는 30일 미디어산업연구센터와 지디넷코리아가 주관한 ‘우리나라 ICT 산업, 이대로 괜찮은가?’ 세미나에 참석해 정부 통신산업 규제 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 90년대 통신 규제완화 기조...지금은 ‘재규제화’ 흐름

건국대학교 권남훈 교수.

권남훈 교수에 따르면 21세기 이전의 통신정책은 민영화와 규제완화를 통한 산업확대가 중점적으로 이뤄졌다. 1994년 한국이동통신 민영화와, 이듬해 외국인 주식소유한도 확대 및 동일인 지분제한 폐지 등이 대표적이다. 아울러 대형 국책 연구개발 사업이 활발히 추진되고, 벤처활성화와 인력양성 등 통신산업 기반이 다져졌다.

2003~2008년에는 유효경쟁정책에 입각한 경쟁활성화에 통신정책 초점이 맞춰졌다. 차등적 접속료 규제, 순차적 번호이동, 지배적 사업자 결합판매 규제 등이 생겼지만 여전히 시장경쟁 환경 조성과 산업발전이라는 궁극적 목표가 유지됐다.

반면 2008년 이명박 대통령 정권 때부터 ‘가계통신비 절감’이라는 공약이 대통령 선거 때마다 전면에 나오면서 재규제화 흐름이 본격화 됐다는 것이 권 교수의 시각이다.

이명박 정부는 정통부를 해체하고 통신비 20% 이상 경감 공약을 내세웠고, 박근혜 정부는 단통법 등을 통한 가계통신비 경감을 적극적으로 정책화 시켰다. 문재인 정부는 약정할인율을 상향조정(25%) 했으며, 기본료 폐지와 보편요금제 도입 등 보다 다양하고 직접적인 개입정책을 펴는 중이다.

문재인 대통령.

이에 권남훈 교수는 통신정책에 있어 명확한 철학을 가져야할 정부가 정치적 고려에 따라, 또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 주관 없는 정책을 펼친다는 지적이다.

권 교수는 “시장화와 경쟁활성화는 1990년 이래 20년 간 지속돼 온 흐름임에도 별다른 논리적 평가 없이 이와 반하는 성격의 정책들을 대거 도입한다”면서 “통신비 절감이라는 목표 달성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 선진화된 시장경제에서는 유례를 찾기 어려운 형태의 규제들까지 추진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지금까지 통신산업의 활력이 약화된 것이 정책에만 원인이 있다고 볼 수는 없지만, 무분별한 규제 확산은 미래의 전망까지 어둡게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 “잘못된 정책목표, 쳇바퀴처럼 규제 악순환”

잘못된 목표 설정이 부적절한 정책 수단(규제)을 낳고, 이로 인한 원치 않는 결과가 나오고 잘못된 평가가 이뤄져 또 다시 규제를 낳는다는 지적.

권남훈 교수는 잘못된 정책목표 설정은 쳇바퀴와 같은 규제의 악순환으로 이어지기 쉽다는 생각이다. 산업의 특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규제수단이 도입되면 원치 않는 결과로 이어지고, 실패한 결과의 원인 판단도 논리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 더욱 강력한 규제 수단이 도입되는 악순환이 생긴다는 것이다.

권 교수는 잘못된 통신정책으로 알뜰폰을 예로 들었다. 2011년 출범이래 가입자 점유율이 12%에 달하는 등 순항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면에는 정부의 인위적 육성정책으로 지탱돼야 하는 취약한 경쟁력이 존재한다는 지적이다. 정부의 적극적 지원이 없다면 알뜰폰 시장은 여전히 생존이 불투명한 상황이다.

권 교수는 제4이동통신 정책도 마찬가지란 입장이다. 규제로 인한 진입장벽을 없애 잠재적인 사업자에게 기회를 주는 것에 중점을 둬야 하는데, 통신요금 하락 수단으로만 간주하고 규제 기조를 유지할 경우 새로운 사업자가 등장하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또 새 사업자가 나오더라도 알뜰폰 살리기처럼 정부의 무리한 정책이 지속될 우려가 있다는 시각이다.

정부의 이동통신 시장 개선을 위한 정책. 단통법과 알뜰폰 활성화를 통해 가계 통신비 부담을 줄인다는 계획.

나아가 권남훈 교수는 2014년 시행된 단통법 역시 본래 취지와 다른 용도로 활용돼 결국 규제 쳇바퀴 현상으로 이어졌다고 비판했다.

단통법의 입법 취지는 고객 간 단말기 보조금 차별해소와 유통구조의 투명화인데, 이를 무리하게 통신비 하락과 연관 지어 단통법 실패 해석을 낳았고 추가 규제들이 지속 도입됐다는 설명이다.

특히 권 교수는 추가 규제로 단말기 완전자급제가 이동통신의 혼탁한 유통구조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는 방안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통신비 절감에 있어 최악의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제조사와 이통사의 전략적 결정이 강제적으로 수직적 분리될 경우, 이중 마진화와 중복적인 차별화로 인해 소비자의 총 지출비용이 증가할 가능성이 있다는 해석이다.

이 외에도 권남훈 교수는 3G이동통신 원가를 공개하도록 한 대법원 판결이 우리 사회의 통신산업에 대한 몰이해 수준을 드러낸 결정이라는 입장이다.

권 교수는 “사업자들이 대가를 지불해 얻어 할당 받은 주파수는 공공재라고 보기 힘든데, 이에 대한 원가를 공개하라는 것은 임대된 가게의 물건 가격을 건물주가 간섭하는 격”이라고 지적했다.

■“보편요금제, 재앙적 결과 낳을 수도”

11일 보편요금제 도입을 골자로 하는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에 대한 규제개혁위원회 심사가 열렸다.

권남훈 교수는 최근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보편요금제에 대한 문제점도 짚었다. 보편요금제란 정부가 통신사에게 특정 요금제를 출시하도록 하고, 기준을 2년마다 재검토해 고시하는 내용이다.

권 교수는 “보편요금제 규제 도입은 지난 20여년 간의 통신요금에 대한 규제완화 추세를 반전시키는 것”이라면서 “요금인가제는 이통사가 만든 요금제의 적합성을 심사하는데 반해, 보편요금제는 아예 정부가 요금의 조건을 설계해 지정하는 방식의 규제”라고 지적했다.

이어 “경쟁이 도입된 이통시장의 요금을 정부가 직접 책정하는 것은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라면서 “정부의 가격통제는 언제나 이른바 ‘필수재’에 대해 이뤄지지만, 많은 경우는 수요초과와 공급의 감소를 통한 재앙적 결과로 이어진다”고 우려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권 교수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통신 정책을 수립하고, 여기에 맞는 합리적인 규제를 세워야 한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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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남훈 교수는 “단기적이고 대중을 의식한 목표에서 벗어나 통신산업을 차세대 ICT신산업과 먹거리 창출의 기반으로 회복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며 “가계통신비 절감 대신 융합산업 활성화를 통한 신규 비즈니스의 창출을 최우선 정책 목표로 삼고 이에 따른 걸림돌을 제거해 나가는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통산업의 수요견인 능력은 단말기뿐 아니라 콘텐츠, 인터넷 서비스 생태계의 발전에도 큰 역할을 한다”면서 “규제의 강화는 참여자로 하여금 윈윈을 위한 새로운 전략개발보다, 남아있는 파이의 몫을 더 확보하려는 이해관계의 충돌에 집중하도록 하는 부작용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역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