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길찾기' 실패한 타임의 예견된 종말

[김익현의 미디어 읽기] 30억달러에 매각

데스크 칼럼입력 :2017/11/27 17:08    수정: 2017/12/01 09:38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 기자 페이지 구독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잡지 시장의 마지막 자존심이 무너졌다. 95년 역사를 자랑하는 타임(Time inc.)사가 또 다른 출판 미디어그룹 메레디스에 매각됐다.

한 때 인쇄잡지 혁신의 주도자였던 타임의 몰락은 노키아 충격과 오버랩되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디지털 강풍을 한 발 앞서 인지하고서도 기존 비즈니스 모델 때문에 혁신에 실패한 대표적인 사례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거리를 던져준 타임 매각은 미국 추수감사절 연휴 마지막날인 26일(현지시간) 성사됐다. 메레디스와 타임은 이날 30억달러 규모 합병에 합의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번 합병은 전액 현금거래 방식으로 진행됐다. 메레디스가 타임 주식을 한 주당 18.50달러에 매입하는 형식이다.

■ 1994년 포털 '패스파인더' 실험 실패로 큰 상처

1922년 설립된 타임은 미국 잡지 시장의 산 역사나 다름 없다. 이듬해 ‘타임’ 첫호를 발간하면서 시사주간지 시장의 첫 장을 화려하게 열었다. 타임은 이후 경제전문 주간지 ’포천’과 스포츠 잡지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라이프’ 등을 연이어 창간하면서 잡지 시장의 혁신을 주도했다.

특히 ‘타임’은 전 세계에 폭넓은 독자를 확보했다. 타임은 라이벌이던 ‘뉴스위크’와 함께 1980년대 이 땅의 대학생들의 영어 교재로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승승장구하던 타임은 1989년엔 워너 커뮤니케이션즈를 인수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탄생한 타임워너는 닷컴 붐이 한창이던 2000년 AOL에 합병되기까지 전통 미디어 시장의 절대 강자로 군림했다.

타임워너와 AOL의 ‘짧았던 동거 생활’은 비극으로 끝났다. 이후 AOL이나 타임워너 모두 순탄치 못했다. 결국 타임워너는 2014년 타임을 분리하기로 했다고 선언했다.

1923년 3월에 발간된 타임 창간호. (사진=위키피디아)

타임워너는 영화와 텔레비전 사업에만 주력하고, 출판그룹인 타임은 별도 회사로 떼내기로 한 것이다. 물론 분리 조치의 핵심은 성장산업 보호였다. 답이 없는 출판 미디어 그룹은 ‘알아서 생존하라’는 메시지를 담은 조치였다.

결국 타임은 분리된 지 3년 만에 회사 매각을 택하면서 사실상 항복 선언을 했다. 100돌 생일을 5년 남겨둔 상태에서 운명을 다한 셈이다.

물론 타임의 몰락은 인쇄에서 디지털로의 전환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부분이 가장 컸다. 피처폰 시대의 황제였던 노키아가 스마트폰 태풍을 견디지 못하고 몰락한 것과 비슷한 모양새다.

하지만 노키아가 결코 스마트폰의 중요성을 모르지 않았던 것처럼, 타임 역시 디지털 흐름을 넋놓고 바라보고만 있진 않았다. 누구보다 빨리 디지털 전략을 세웠고, 또 실제로 행동에 옮겼다.

타임은 인터넷이 막 보급되던 1994년에 패스파인더(Pathfinder)란 사이트를 오픈했다. 타임워너 계열 잡지들의 콘텐츠를 한데 모아줬던 꽤 선진적인 사이트였다. 이름 그대로 ‘새로운 길을 찾는’ 프로젝트였던 셈이다. 한창 때는 콘텐츠 파트너가 80개에 이를 정도였다.

패스파인더엔 뛰어난 테크 전문 저널리스트들도 꽤 많이 활동했다. ‘스티브 잡스’ 공식 전기로 유명한 월터 아이작슨 등이 패스파인더를 거쳐간 저널리스트였다.

■ 사라지는 종이잡지의 제왕이 남긴 교훈은?

물론 타임은 디지털 세상에서 새 길을 찾는 데 실패했다. 피처폰이란 기존 비즈니스 모델을 건드릴 수 없었던 노키아와 마찬가지로 타임 역시 인쇄잡지 시장을 외면할 수 없었다.

패스파인더는 출범과 동시에 타임워너 내에서 엄청난 비판을 받아야만 했다. 타임의 일부 고위 임원들은 노골적으로 ‘(수익을 못내는) 블랙홀’이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모든 잡지의 URL을 패스파인더(pathfinder.com)의 서브 도메인화했던 전략 역시 내부 구성원들의 불만을 샀다. 이를테면 ‘피플’ 잡지는 people.com을 쓸 수 없었다. www.pathfinder.com/people로 써야만 했다.

결국 이런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타임워너의 ‘디지털 세상 길찾기’는 5년 만에 마무리됐다. 타임은 너무 일렀던 ‘디지털 포털 전략’이 실패로 끝난 뒤엔 이렇다 할 디지털 혁신 전략을 써보지 못하면서 서서히 침몰해갔다.

노키아 전 R&D 빌딩

미국 매체들은 ’타임’이 매각됐단 소식을 꽤 담담하게 전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미디어 시장의 길었던 한 장이 일요일 저녁에 의외의 결말에 이르렀다(A long chapter in media history came to an unlikely close on Sunday night)’는 문장으로 타임 매각 기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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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전문 매체 포인터는 좀 더 신랄하다. 포인터는 “오랜 시간 잡지 시장의 왕으로 군림했던 타임이 일요일 저녁 30억 달러에 팔렸다는 소식은 놀랍지 않다는 점이 놀라운 소식이다”고 운을 뗐다. 타임의 위상을 잘 보여주는 문구인 셈이다.

저 문구 속엔 디지털 혁신에 뒤쳐지면서 조금씩 수렁 속으로 빠져들어갔던 타임의 현 주소가 잘 담겨 있는 것 같다. 내가 타임 매각 소식에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를 떠올리는 건, 아마도 아날로그 시대의 야릇한 추억을 버리지 못한 때문인 것 같다.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sini@zd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