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성장'은 '창조경제'와 달라야 한다

[이균성 칼럼] 혁신 주체에 대한 인식전환부터

데스크 칼럼입력 :2017/11/03 16:39    수정: 2018/11/16 11:25

정부가 2일 혁신 창업 생태계 조성을 위한 35가지 대책을 내놓았다. 창업 환경을 개선하고 3년간 민관 공동으로 30조원을 투자한다는 게 골자다. ‘소득중심의 경제’가 강조되면서 문재인 정부는 야당으로부터 “성장 정책이 없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시절부터 ‘혁신성장’을 대안으로 제시해왔던 게 사실이다. 이번 발표는 그 혁신성장 추진 전략의 첫 번째 대책이다.

35가지 대책에 대한 구체적인 비평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이 글은 ‘혁신에 대한 철학 이야기’다. 전(前) 정부의 트레이드마크였던 ‘창조경제’가 몰락한 까닭은 미시 정책이 부실해서가 아니라 ‘창조’에 관한 철학의 빈곤 때문이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철학을 제대로 세우지 않으면 문재인 정부의 ‘혁신’ 또한 박근혜 정부 ‘창조’의 재탕이 될 수 있다. 이정표가 없는 항해가 될 수밖에 없다.

혁신(革新)과 혁명(革命)는 비슷하면서 달라 보인다. 뭔가를 새롭게 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은 비슷하다. 정확한 사전적 의미가 무엇이든, 이 글에서는 혁신의 경우 경제 용어로, 혁명의 경우 정치 용어로 정의하고자 한다. 주로 혁신이라는 단어를 쓸 것이다. 이 글이 ‘혁신성장’에 관한 것이고, 그것이 정치와 무관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내용이 주로 경제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혁명도 마찬가지지만 경제 특히 산업 혁신을 논할 때 핵심은 그 주체가 누구인지를 명확히 하는 일이다. 혁신은 사람이 하는 것이어서 주체를 빠뜨리거나 주체를 착각한다면 그 논의는 헛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경제 특히 산업 혁신을 주도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황철주 주성엔지니어링 사장은 이 질문에 ‘철학이 있는 책임자(주로 오너)’라고 단언한다. 그게 ‘황철주의 혁신론’이다.

황 사장은 기업 혁신의 책임은 전적으로 오너에게 있다고 말한다. 끝없이 혁신을 하지 않으면 기업은 언젠가는 죽는다. 또 죽지 않기 위해 자기 목숨을 거는 사람은 책임자라고 말할 수 있다. 대개 그런 사람은 오너다. 그런데 모든 오너가 혁신을 하는 것은 아니다. 혁신은 기본적으로 미래에 대한 깊은 고민과 그로 인한 통찰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철학이 있는 책임자’라는 말의 뜻이 그것이다.

스마트폰을 유행시켜 산업 지형을 바꿔버린 스티브 잡스, 초고속인터넷 바람을 타고 온라인게임 영역을 개척한 김택진, 인터넷을 통해 지식 보편화에 기여한 이해진, 모바일 시대에 맞춰 메신저 천국을 이끌어낸 김범수......물론 크게 바꾸는 것만 혁신은 아니다. 뉴스가 되진 않지만 작은 혁신들이 수도 없이 많다. 중요한 것은 크기와 상관없이 혁신에는 장인(匠人)의 DNA가 필수라는 점이다.

박근혜 창조경제가 하고자 했던 일은 아마 이런 혁신가를 국가적으로 육성하자는 취지였을 것이다. 그런데 왜 처참하게 실패했을까. 그것이 그냥 구호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혁신가를 육성하려면 당연히 그들을 중요한 존재로 여기는 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이야기와 생각을 귀담아 듣는 일부터 해야 한다. 왜냐면 결국 그들이 기업과 산업을 혁신할 것이기 때문이다.

국정농단 사태로 밝혀진 것처럼 박근혜 정부는 구호와 행동이 정반대였다. 기업가를 종 부리듯 했고 기업의 돈을 자기 호주머니처럼 여겼다. 그러면서 본인에 대해서는 기업에 시혜를 베푸는 봉건시대의 왕처럼 생각했다. 그로 인한 피해가 지금 얼마나 막중한가. 혁신을 위해 밤잠을 설쳐도 모자랄 기업가들이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혼나고 머리 숙여 사죄하고 권력 눈치 보느라 허송세월한다.

모두 다 혁신의 주체에 대한 오판에서 비롯된 일들이다. 경제와 산업에 관한 한 정치가와 정부 관료와 교수나 언론인 등을 비롯한 지식인은 혁신의 주체가 아니다. 다만 좋은 조력자일 수는 있다. 문제는 이 사회의 권력자들이 정치가와 관료와 지식인 그룹이며 그들이 스스로 혁신의 주체라고 착각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국민과 함께 정치 혁명의 주체일 수는 있어도 경제 혁신의 주체는 아니다.

정치가와 관료와 지식인이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망각하고 주체로 서고자하면 그때부터는 조력자이기는커녕 혁신의 방해꾼으로 전락하고 만다. 혁신이 현재에서 더 좋은 미래로 가기 위한 길이라고 할 때 그들은 역사 진보를 막는 반동(反動) 세력이 될 뿐이다. 창조경제라는 휘황찬란한 구호를 내걸고도 박근혜 정부가 보수 세력을 궤멸시킨 것은 경제 혁신에 관해 과거로 퇴보해버렸기 때문이다.

문재인의 혁신성장도 그런 조짐을 보인다는 점이 걱정스럽다. 경제 혁신의 주체와 조력자의 역할을 헷갈리고 있는 징후가 여러 장면에서 목격된다. 이해진 네이버 전 의장에 대한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의 발언이 대표적이다. 결국 김 위원장이 공개 사과하긴 했지만 이 전 의장을 구글에 빗대 혁신적이지 않다고 할 발언은 그가 혁신의 주체라고 생각했을 때나 나올 수 있는 망언에 가까운 것이다.

그 외에도 숱한 사례가 있다. 최근에 끝난 국정감사만 봐도 알 일이다. 그걸 이 자리에서 일일이 거론할 필욘 없다.

황철주 주성엔지니어링 사장

혁신성장에 대해 한 마디 더 거들게 있다면 주체의 역량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혁신의 주체와 조력자가 누구인지 정확히 아는 것이 철학의 문제라면 역량에 대한 성찰은 전략에 관한 것이다. 황 사장은 “혁신은 지식이 아니다”고 단언한다. 정치인 관료 학자 등 지식인 그룹이 혁신의 주체가 아니라 장인(匠人) 그룹이 혁신의 주체여야 한다는 논리도 결국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지식인이 부족했던 과거에는 지식이 혁신의 기반이었지만 지식이 평준화된 지금은 죽지 않고 살기 위한 몸부림 그러니까 한없는 고민만이 혁신의 길을 찾아낼 수 있다. 그 고민의 출발은 주체(主體)에 대한 냉철한 성찰로부터 시작된다. 삼성전자나 네이버에게 왜 애플과 구글처럼 못하느냐고 꾸짖는 비판이야말로 가장 반(反)혁신적이다. 주체(主體)가 다르면 혁신의 길도 반드시 다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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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게는 특히 그렇다. 우리는 지금까지 선진국에 대한 빠른 모방(과거 지식을 베끼는 일)으로 성장 혹은 혁신해왔다. 이제 그럴 것도 그럴 곳도 많지 않다. 되레 빠른 속도로 추격 받고 있는 입장이다. 어디어디에서 무엇을 배우자는 벤치마킹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이다. 내 것은 무엇이고 나는 어떻게 할 것이냐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웃기는 이야기지만 주체에 관한 사상이 절실해진 것이다.

2일 발표된 정책은 돈을 쓰고 환경을 만든다는 게 골자다. 많이 고민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정치와 정책 당국자들이 주체와 조력자의 관계, 그리고 주체의 역량에 관한 우리식의 해답을 찾기 위해 얼마나 고민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되새겨주길 권한다. 진정한 장인(匠人)은 나라에서 떨어지는 눈 먼 돈을 바라는 게 아니다. 결국 일자리와 복지를 창출할 그들을 명예롭게 할 방법을 강구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