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록스 파크, 그리고 네이버의 'AI 야심'

[김익현의 미디어 읽기] 네이버의 XRCE 인수를 지켜보며

데스크 칼럼입력 :2017/06/27 15:26    수정: 2017/06/27 15:41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 기자 페이지 구독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스티브 잡스는 1979년 캘리포니아주 팔로알토에 있는 한 연구소를 방문한다. 그곳에서 그는 흥미로운 물건을 하나 발견한다. 그래픽 기반 컴퓨터였다.

그 물건을 본 잡스는 강한 영감을 받는다. 애플로 돌아온 잡스는 그곳에서 본 기술을 토대로 컴퓨터를 만든 뒤 ’리사(Lisa)’란 멋진 이름을 붙여준다.

리사는 이젠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 제품이다. 하지만 리사는 1980년대 PC시장을 강타한 애플 매킨토시의 모태가 되면서 컴퓨터 역사에 의미 있는 족적을 남겼다. (참고로 리사는 잡스의 딸 이름이었다.)

당시 잡스가 방문한 곳이 제록스 팔로알토 연구소(Palo Alto Research Center)였다. 흔히 약칭인 파크(PARC)로 불렸던 팔로알토연구소는 PC 역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으로 꼽힌다.

세계 컴퓨터 역사의 한 장을 장식한 애플 매킨토시. 하지만 그 연원을 따지고 들어가면 제록스 파크와 만나게 된다. (사진=씨넷)

■ 1970년 설립…컴퓨터 역사 지탱한 첨단기술 쏟아내

파크로 불린 팔로알토연구소는 1970년 설립됐다. 이 연구소를 세운 곳은 프린터 전문기업인 제록스였다. 그래서 흔히 제록스 파크로 불렸다.

제록스가 IT시장에 첨단 제품을 내놓은 적은 많지 않다. 프린터 전문기업 정도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제록스가 민간연구소로 설립했던 제록스 파크가 남긴 족적은 화려하다. 레이저 프린팅, 이더넷 같은 수 많은 발명품을 내놓으면서 IT 기술 발전의 밑그림을 그려냈다.

잡스가 감탄을 금치 못했던 그래픽이용자 인터페이스(GUI)의 토대를 만든 곳도 제록스였다.

훗날 마이크로소프트(MS)가 윈도를 내놓자 애플과 스티브 잡스는 발끈하면서 소송을 걸었다. 그 때 MS 측이 “어차피 우리나 그 쪽이나 제록스 파크 기술을 베낀 것 아니냐”고 했던 일화는 꽤 유명하다.

제록스 파크를 거쳐간 인물들도 화려하다. GUI의 토대를 닦으면서 컴퓨터를 한 단계 발전시킨 앨런 케이는 초기 제록스 파크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세계 첫 그래픽 기반 인터페이스를 적용한 제록스 알토. (사진=위키피디아)

앨런 케이는 마우스 창시자로도 유명한 더글라스 엥겔바트 같은 수많은 과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컴퓨터 기술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이외에도 ‘멧칼프의 법칙’으로 유명한 로버트 멧칼프, PDF를 만든 존 워녹 등도 제록스 파크를 세계적인 연구소로 만드는 데 일조했던 인물들이다.

우리는 인터넷 역사를 이야기할 때 스위스에 자리잡고 있는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를 많이 떠올린다. 이 곳에 몸 담고 있던 팀 버너스 리가 만든 월드와이드웹이 현대 인터넷의 토대가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컴퓨터 쪽으로 초점을 맞출 경우 제록스 파크를 빼놓곤 얘기하기 힘들다. 두 연구소 모두 연구원들이 자유롭게 주제를 정한 뒤 맘껏 발전시킬 수 있는 환경으로 유명했다.

제록스 파크는 뛰어난 기술력에 비해선 비즈니스 마인드는 다소 부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다보니 훌륭한 기술을 개발하고도 제대로 상업화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1979년 제록스 파크를 방문했던 스티브 잡스는 “그들(제록스 파크)은 자신들이 뭘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 XRCE는 1993년 설립…머신러닝-자연어 처리 세계적 기술 보유

이번에 네이버가 인수한 제록스 리서치센터 유럽(XRCE)는 1993년 설립됐다. 회사 소개 페이지에는 “1993년 설립 당시엔 두 가지에 최우선 순위를 뒀다”고 돼 있다.

첫째. 소프트웨어가 하드웨어를 차별화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혁신은 바로 그 차별성에서 나온다.

제록스 리서치센터 유럽은 이런 비전에 따라 1996년 첫 상용화 제품으로 전문 번역 시장용 기술을 내놓으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이 연구소는 머신러닝, 컴퓨터 비전, 자연어 처리 등 분야에서 세계적인 기술을 보유했다. 80명으로 구성된 연구원들이 발표한 논문들은 학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2015년 이후 약 9천800여개 외부 논문에 인용될 정도로 학문적 수준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제록스 리서치센터 유럽 홈페이지는 벌써 네이버 랩스 유럽으로 문패를 바꿔 달았다.

물론 네이버가 인수한 XRCE를 1970년대 컴퓨터 역사의 밑그림을 그렸던 제록스 파크와 곧바로 연결시키는 게 다소 비약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실제로 제록스 파크는 2002년 완전 독립 자회사로 분리되면서 초기와는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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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XRCE에서 제록스 파크의 추억을 연상하는 게 전혀 근거 없는 일만은 아닐 것 같다. 어쨌든 한국을 대표하는 인터넷기업이 세계적인 연구소를 인수한 것은 의미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유럽 시장 개척’이란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네이버와 이해진 전 의장에겐 XRCE 인수가 큰 힘이 될 가능성이 많아 보인다. 네이버의 예사롭지 않은 인수에 박수를 보낸다. 더불어 XRCE 인수가 ‘AI 강자’와 ‘유럽시장 공략’이란 두 가지 큰 그림을 완성하는 밑거름이 되길 응원한다.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sini@zd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