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의회는 왜 '가짜뉴스 처벌법' 폐기했나

[김익현의 미디어 읽기] 유언비어 추방 vs 언론자유

데스크 칼럼입력 :2017/06/21 10:29    수정: 2017/06/21 10:30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 기자 페이지 구독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지난 해 이후 ‘가짜뉴스’는 세계적인 골치거리가 됐다. 트럼프 당선과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로 촉발된 어수선한 분위기 때문이었다.

가짜뉴스의 위력은 옥스퍼드영어사전이 선정한 2016년 올해의 단어에도 그대로 반영됐다. 고민 끝에 옥스퍼드가 내놓은 ‘탈진실’(post-truth)은 “진실과 허위의 경계마저 허물어진” 모호한 시대상황을 잘 반영했다.

그런데 올해 초 독일에선 ‘가짜뉴스 사태’보다 더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독일 정부가 인종차별적 발언이나 가짜뉴스를 방치하는 소셜 플랫폼을 처벌하는 법안을 내놨단 소식이었다.

구글이 가짜뉴스 추방을 위해 언론사들과 손잡고 크로스체크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사진=구글 뉴스룸)

■ 포괄적으로 규제할 경우 자유로운 공론장 위축

페이스북 같은 소셜미디어를 겨냥한 이 법안 내용은 무시무시했다. 명백한 혐오 발언이나 가짜뉴스는 발견 24시간 내에 삭제해야 한다. 조금 모호한 뉴스일 경우 7일 내에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리곤 문제를 제기한 당사자에게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 알려줘야만 한다.

어길 경우엔 최대 500만 유로 벌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했다. 국내에선 ‘가짜뉴스 처벌법’으로 알려졌지만 독일 내에선 ‘페이스북법’으로 통했다. 주타깃이 페이스북이기 때문이다.

독일이 가짜뉴스 처벌법을 마련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국내에선 깜짝 놀라는 반응이 적지 않았다. 일부에선 “독일도 저렇게 하는 데”라며 목청을 높이기도 했다. 국내에도 가짜뉴스 배포자에게 강력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주장들이 고개를 들기도 했다.

그런데 독일 정부가 야심차게 마련했던 가짜뉴스 처벌법은 결국 의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영국 일간지 데일리메일에 따르면 이 법안은 지난 14일(현지시간) 의회에서 무산됐다.

독일 정부가 가짜뉴스 처벌법을 만든 건 절박한 상황 때문이었다. 연초 ‘난민들이 독일 여성을 성폭행했다’는 가짜뉴스 때문에 한 바탕 소동을 겪었다. 오는 9월 선거를 앞두고 있는 메르켈 정부 입장에선 무분별한 가짜뉴스를 차단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의회 생각은 달랐다. 가짜뉴스 처벌법은 곧바로 민주주의의 근간인 언론 자유를 침해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사진= CBS/ 씨넷/ 지디넷코리아)

독일 가짜뉴스 처벌법의 또 다른 문제는 기준 자체가 모호하다는 점이었다. 어떤 것이 범죄적인, 혹은 처벌받을 만한 내용인지에 대한 사례나 가이드라인이 명확하지 않았다고 외신들이 전했다.

‘가짜뉴스’란 포괄적인 기준만으로 처벌할 경우 자칫 자유로운 사상 공론장을 옥죌 우려가 있다는 게 의회의 판단이었다.

데일리메일에 따르면 이 법안 공개 이후 “사기업들이 합법과 불법을 결정하도록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비판도 적지 않았다. 법원이 져야 할 판단 책임을 사기업에 떤넘기는 것도 문제가 적지 않다는 지적인 셈이다.

■ "불법적 발언 억제 위해 합법적 발언 억눌러선 안돼"

가짜뉴스는 우리에게도 남 얘기가 아니다. 박근혜 탄핵과 대통령 선거를 거치면서 가짜뉴스 때문에 적잖은 몸살을 앓았다. 사실을 왜곡한 뉴스유포자에 대해선 어떤 형태로든 법적인 책임을 물어야 한다.

하지만 ‘가짜뉴스 추방’이란 목적 의식에 눈이 멀어 민주주의의 근간인 ‘언론의 자유’를 뒤흔들어선 안된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악을 제거하기 위해 더 큰 악을 불러들이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독일 의회가 ‘페이스북법’을 무산시킨 건 이런 측면에서 의미가 적지 않아 보인다. 여론 혼란을 방어하기 위해 ‘여론 위축’이란 악마와의 계약을 하는 건 민주주의를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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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연방대법원이 성범죄자의 소셜 미디어 활용 금지가 위헌이란 판결을 하면서 제시한 설명은 가짜뉴스 대책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될 것 같다.

“정부는 불법적인 발언을 억제하기 위해 합법적인 발언을 억눌러선 안된다.”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sini@zd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