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죽어야 산다?

기자수첩입력 :2017/06/15 17:23    수정: 2017/06/16 10:55

죽어야 산다는 말이 있다. 수백억원의 뇌물공여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처한 처지를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역사의 죄인인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에게 부정한 청탁을 했다는 의혹의 정점에 있으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재벌 개혁의 고삐를 바짝 죄고 있는 새 정부와 촛불로 정권을 바꾼 국민 정서법을 헤아려보면 이미 결론이 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사법부는 어떤 판결을 내릴까. 권력의 요구에 응한 기업의 지원을 뇌물로 볼까, 아니면 재산권을 침해당한 피해자로 볼까. 삼성은 사익편취에 혈안이 된 무리들의 농간에 걸린 기업인가, 아니면 경영권 승계를 위해 비선 실세에 줄을 댄 정경유착의 고리인가. 의견이 분분하다. 이성과 비이성을 넘나들고 사실과 추론이 마구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비선실세 최순실 씨에게 뇌물을 제공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7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리는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호송차에서 내리고 있다.

애당초 이 재판이 합리적 판결을 이끌어 낼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앞선다.

지금까지 재판 과정을 보면 돈이 오고간 사실에는 다툼이 없다.

하지만 재판이 시작된 지 두 달이 지났지만 대가성이 있었는지, 청탁의 주체가 누구인지 삼성의 지원금을 뇌물로 볼만한 증거가 분명치 않다.

특검은 피고인 이 부회장과 미래전략실 인사들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등 그룹 경영권 승계를 위해 미르-K스포츠 재단에 거액의 기금을 출연하고, 정유라의 승마훈련을 지원했다고 주장하지만 아직까지 이 같은 공소 사실(뇌물공여죄)을 뒷받침할 결정적 증거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삼성 측은 이 사건의 실체를 '대통령의 강요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지원하게 된 일'이라고 맞서고 있다. 최지성 부회장 등 미래전략실 관련자들의 진술서를 보면 허튼 말은 아닌 것 같다.

또한 특검은 이 부회장이 '비선실세' 최순실의 존재를 2014년 9월 박 대통령과 1차 독대 때 알게 됐다고 특정하고 있지만 삼성 측은 2015년 7월 2차 독대 전까지 최씨를 전혀 알지 못했다고 항변하고 있다.

특검은 지난달 서면증거 조사가 끝난 후 '묵시적 청탁'도 청탁이라며 재판부를 설득하고 있다. 하지만 증인재판 과정에서 오히려 '불러주기 식 조사'나 '진술 번복'이라는 특검의 신뢰성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기도 하다.

'묵시적 청탁'이라는 논리도 언뜻 보기엔 그럴 듯하지만 물증을 대지 못하는 특검의 자기변명에 불과하다는 의견이 많다. 그런 게 어디 있나.

특검의 주장이 성립하려면 돈을 주고받는 이들 간에 상호 암묵적인 합의와 공유 의식이 있어야 되는데, 이 부회장이 박 전 대통령, 최순실과 언제 이 같은 교감을 주고받았는지 분명치 않다.

'묵시적 청탁'이라는 개념 자체도 애매모호하다. 현안이 있는 기업이 정부 정책에 동참해 지원금을 내거나 혹여 앞장서서 협력하면 추후 정치적 진영에 따라서 부정한 청탁이 될 수 있다는 논리다. 우리 사회의 진영 논리로 어느 쪽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유무죄가 가릴 수 있다는 얘기다. 최씨나 청와대가 돈을 뜯어낼 심산으로 알아서 편의를 봐주려 했는지는 삼성 입장에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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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생각과 의중을 추론하고 재단하는 것은 심리학자나 정신과 의사가 하는 일이다. 검사는 법정에서 증거로 말해야 한다. 물론 모든 증거나 진술이 진실을 말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법의 판결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그래야 억울함이 없지 않겠는가.

증거가 없으니 더 걱정이다. 자칫 사법부의 판단이 정치적으로 흐르지 않을까하는 우려 때문이다. 권력을 이용한 사익편취와 정경유착은 반드시 근절되어야 한다. 정말로 이 부회장이 자신의 경영 승계를 염두에 두고 최씨 모녀에게 돈을 건넸다면 일벌백계해야 마땅하다. 글로벌 기업 삼성을 이끌 자격이 없다. 그러나 재벌 개혁의 본보기로 '삼성 손보기'로 가면 곤란하다. 법관의 양심과 자유에 따른 사법부의 판결은 합리적이고 공정해야 한다. 삼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법의 잣대가 달라지면 안 된다. 이재용 부회장은 정말 죽어야 사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