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과 새 정부 일자리 창출

기자수첩입력 :2017/06/02 17:24    수정: 2017/06/03 10:32

이건희 삼성 회장이 1993년 질(質) 중심의 신경영을 선언하고 나선 것은 삼성 혼자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일은 아니었을 게다.

짐작컨대, 이대로 가서는 안 되겠다는 위기의식의 발로였을 것이다. 또한 우리 사회와 기업, 그리고 국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국가적 산업 발전을 이루고 세기말 위기와 난관을 함께 헤쳐 나가자는 데 방점이 찍혀 있지 않았을까.

삼성전자가 지난 1일부터 전격 시행에 들어간 1, 2차 협력사 간 물품대금 현금결제 프로세스는 그래서 새 정부 출범 이후 '일자리 창출'이라는 국정 과제를 놓고 소통과 이해를 끌어 내야 하는 정부와 재계, 노동계에게 좋은 본보기가 아닐 수 없다.

현금결제 프로세서는 삼성전자 1차 협력사가 영세한 2차 협력사에게 물품 대금을 30일 이내 현금으로 지급하게 한다는 내용이 핵심 골자다. 물론 강제 조치는 아니다. 대신 협력사 종합평가를 할 때 가산점을 주기로 했다. 또 신규 거래 협력사는 이를 꼭 지켜야 한다. 삼성은 또 자금력이 부족한 1차 협력사를 위해 무이자로 돈을 빌려주는 5천억원 규모의 물품대금 지급 펀드도 조성했다. 당근과 채찍이 병행한다.

삼성이 이처럼 1차 협력사와의 거래 뿐 만 아니라 1, 2차 협력사들 간의 거래까지 관여한 이유는 협력사간 소송 분쟁 등 다른 문제들도 있겠지만 그것이 궁극적으로 건강한 생태계 질서 유지와 상생의 합리적인 솔루션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곧 삼성전자의 글로벌 경쟁력 향상에도 큰 도움이 된다는 얘기다. 동종 업계에서는 환영 일색이다. 자금 회전력이 빨라지고 경영이 안정되는데 이를 마다할 기업이 어디 있겠는가. 임금 체불 없이 경영이 안정화된다면 이들 기업의 고용창출 능력도 높아지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때마침 대통령 직속 일자리위원회가 1일 '일자리 100일 계획'을 발표했다. 우리 사회의 불공정한 고용 시장을 이대로 둘 수 없다는 심정이었을 게다. 정부의 일자리 창출은 우선 공공 부문에서 일하는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데 초점이 맞춰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재계의 심정은 벙어리 냉가슴이다.

결국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민간 부문으로 넘어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난해 기준 약 645만에 달하는 비정규직 가운데 공공부문 비정규직은 31만명 수준으로 파악된다. 이중 비정규직의 대부분이 중견-중소 기업 기간제 근로자다.

재계 입장에서는 비정규직을 과다하게 고용하는 대기업에게는 고용부담금을 도입하겠다거나 근로시간 단축도 추진하겠다는 정부의 발언이 무언의 압박으로 느껴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많은 대기업들이 이 같은 정책적 취지를 이해하고 실제 얼마나 실행에 옮길지는 미지수다. 왜냐하면 현실과 동 떨어진 사안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기업들은 정부의 좋은 일자리 창출이라는 큰 방향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고용의 형태까지 정부가 정해 놓는 것은 또 다른 규제의 양산이라고 입을 모은다. 제조 현장에서 사내 하청 근로자의 신분을 바라보는 기업과 노동계의 시각은 크게 엇갈린다. 중견·중소 기업이 비정규직을 쓸 수 밖에 없는 이유도 있다. 중소 기업 기피 현상 때문에 정규직으로 뽑으려 해도 원하는 인력을 다 채우지 못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다.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무조건 전환하라는 말도 산업 노동 현장과는 괴리가 많다고 하소연이다.

사실 기업마다 전문적인 핵심 사업과 처한 경쟁 환경이 다른 만큼, 비전문적인 업무에 정규직을 고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인건비 상승 등 고스란히 기업 부담으로 떠 앉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좋은 일자리 창출은 어느 정권 내에서 단기간 이뤄낼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오랜 기간 저성장과 구조조정에 시름하던 일본이 청년실업 해법 찾기에 20년이란 긴 세월을 투자한 것은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독일의 하르츠 개혁이나 네덜란드의 바세나르 협약 등 유럽의 노·사·정 대타협도 동일 노동엔 동일 임금이지만 정부는 고용 형태를 자유롭게 풀어놨다. 기업은 근로시간 단축과 복지 향상에 더 노력하고, 노동계는 임금 동결 등 한 발씩 양보했던 타협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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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일자리 정책을 폄에 있어 귀를 열어 놓아야 한다. 싸움과 갈등의 전선만 넓혀 놔서는 곤란하다. 기업은 비정규직이 정규직과 같이 동일 유사 업무에 종사하면 동일한 임금과 복리 후생을 제공해 정규직과의 차별적 요소를 없애도록 노력해야 한다. 고용의 유연성을 확보했으면 그 정도 비용은 지불해야 마땅하다. 정규직 노조를 중심으로 한 노동계도 마찬가지다. '밥그릇 지키기' 위해 도급/용역, 파견 근로자를 방패막이 삼거나 이참에 무언가를 더 얻어보려는 욕심은 버려야 한다.

정부는 기업의 사정과 실정에 어둡고, 기업은 사회적 책임과 약자에 대한 돌봄을 외면하고, 노동자는 집단 이기주의에 빠지면 그 나라가 어찌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