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만 요란했던 인간과 AI의 번역대결

[김익현의 미디어 읽기] '세기의 대결' 유감

데스크 칼럼입력 :2017/02/22 15:01    수정: 2017/03/02 17:31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 기자 페이지 구독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번역학계의 오랜 금언 중 ‘부정한 미녀와 정숙한 추녀’란 말이 있다. 저 말 속엔 번역이 얼마나 힘든 작업인지가 잘 담겨 있다.

여기서 부정한 미녀란 가독성은 뛰어나지만 원문으로부터 멀어진 번역을 의미한다. 반면 정숙한 추녀는 원문은 충실하게 옮겼지만, 가독성은 다소 떨어지는 번역을 지칭하는 문구다. 번역은 두 극단 중 어느 지점에서 힘겹게 타협하는 작업이다.

‘번역자는 반역자’(A translator is a traitor)란 말도 있다. 번역을 하는 순간, 원문을 훼손하기 때문이다.

중고등학교 영어 해석 시험이 아닌 한, 번역에 정답은 없다. 출발어(원문)와 도착어(번역문) 사이 어느 지점에서 적당한 좌표를 찾는 작업이다. 보는 관점에 따라 그 좌표는 출발어에 가까울 수도 있고, 도착어 쪽에 조금 더 치우칠 수도 있다.

21일 개최된 인간과 인공지능(AI) 간의 번역 대결을 둘러싼 뒷 얘기가 무성하다. 인간의 승리를 대서특필하는 글들이 대부분이다. 알파고에 당한 수모를 갚아줬다는, 다소 감정적인 반응까지 눈에 띈다. 참고로 이번 대회에 인공지능 대표는 구글, 네이버 파파고, 시스트란 등 3개사 엔진이었다.

21일 서울 광진구 세종대학교에서 열린 사람과 인공지능 간의 번역대결에서는 인간 번역사가 완승을 거뒀다. (사진=뉴스1)

주최측은 이번 대회에 크게 만족했을 것 같다. 엄청난 홍보 효과를 누린데다 “역시 번역은 인간의 영역”이란 인식을 널리 심어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이번 대회 자체가 굉장히 못 마땅했다.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 50분 번역+30점 만점 채점은 타당했을까

첫째. 50분 동안 번역한 뒤 채점해서 승부를 가리는 방식을 꼽을 수 있다.

번역은 바둑이나 체스와는 다르다. 때론 한 두 문장 때문에 하루 종일 골머리를 앓기도 한다. 또 때론 한 두 시간에 몇 페이지를 후딱 옮기기도 한다. 주어진 시간을 갖고 겨룰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50분 동안 문제 풀고 채점해서 점수내는 건 중고등학교 영어 시험시간에나 적합한 방식이다. 애초에 전문 번역사들이 응할 방식은 아니었다.

번역문을 30점 만점 기준으로 채점한 것도 웃긴 발상이었다. 물론 분명한 기준은 있었을 것이다. 원문을 얼마나 충실하게 옮겼는지, 또 그렇게 옮긴 원문의 가독성은 얼마나 뛰어난지 등이 기준이 됐을 것 같다.

문제는 그걸 어떻게 점수로 환산할 것이냐는 점이다. 중고등학교 영어시험처럼 틀릴 때마다 감점을 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21일 세종대학교 광개토관에서 열린 인간 vs 인공지능 번역대결 직전에 개최된 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은 인간과 기계의 협업 가능성에 의미를 부여했다.

둘째. 번역 자체의 성격을 고려해도 문제가 적지 않다. 물론 잘된 번역이 있고, 품질이 떨어지는 번역이 있다. 하지만 번역은 애초에 둘이 똑 같은 원문을 옮긴 뒤 서로 점수를 내서 겨루는 영역은 아니다.

그 동안 인간과 AI가 겨뤘던 바둑, 체스, 퀴즈는 기존 경기 방식 그대로 진행됐다. 그래서 대회 결과에 대해 승복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퍼디 퀴즈 대회 땐, 컴퓨터에 다소 유리했다는 비판도 적지 않게 제기됐다.)

반면 이번 대회는 ‘50분 번역+ 30점 만점 채점’이란 기상천외한 방법이 동원됐다. 일반적인 번역 작업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방식이었다.

굳이 요즘 뜨거운 이슈가 되고 있는 AI와 겨루고 싶었다면, 차라리 50분 동안 영어 강연을 실시간 통역하는 대회를 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 대회 결과 토대로 번역엔진 순위 거론하는 것도 넌센스

대회가 끝나고 난 뒤 참여했던 세 개 엔진의 순위를 거론하는 얘기들도 들리고 있다. A엔진 28점, B엔진 17점, C엔진 15점이란 얘기까지 돌아다니고 있다.

이 또한 지나친 단순화 우려가 있는 얘기다. 앞에서 얘기한대로 번역 작업에 단정적인 점수를 매기고, 그 결과가 그대로 번역엔진 순위인양 거론되는 건 문제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주 유럽의회는 로봇에 관한 법률 제정 필요성을 역설한 매디 델보 보고서를 공식 채택했다. 인공지능을 갖춘 로봇과 함께 살아갈 준비를 하기 위한 조치였다.

주최 측은 이번 대회도 AI와 인간의 협업 가능성을 점친 대회라고 의미 부여하고 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결과를 보면 전혀 그렇지 못하다. 고도의 정신 노동을 스스로 고등학교 영어시험 수준으로 격하시킨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그렇게 낮춰놓은 시험에서 기계에 완승을 거뒀다고 주장하는 모습이 그다지 좋아보이진 않았다.

(덧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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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6월26일. 일본 도쿄 무도관에선 무하마드 알리와 안토니오 이노키 간 세기의 대결이 벌어졌다. 온 세계 스포츠 팬의 관심이 집중됐던 경기였다. 하지만 프로복서와 레슬러의 대결이란 발상은 애매한 규칙 때문에 맥빠진 경기가 됐다. 레슬링 선수 이노키는 시종일관 누워 있었고, 알리는 링 외곽으로 빙빙 돌다가 경기가 끝났다.

물론 다른 종목 선수간의 경기란 이 대회의 발상은 먼 훗날 이종격투기로 결실을 맺게 된다. 모쪼록 이번 대회도 주최측 공언대로, 인간과 기계의 협업이란 새로운 모델의 실마리가 되길 기원해본다.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sini@zd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