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삐 죈 재계 '빅4'…"위기대응 높여라"

'브렉시트 악재'에 사드 변수…해법 마련 분주

디지털경제입력 :2016/07/11 09:33    수정: 2016/07/11 11:07

정기수 기자

삼성·현대차·LG·SK그룹 최고 경영진들이 하반기 대내외 경영환경을 위기로 인식하고, 임직원들에게 시나리오별 대응 방안을 주문하는 등 생존전략 마련에 고심 중이다.

재계 빅4로 불리는 이 그룹들이 현 상황을 위기로 판단한 이유는 향후 경영환경이 녹록치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글로벌 경기침체가 장기화 되고 있는 가운데 '브렉시트(Brexit·영국의 EU 탈퇴)' 여파로 세계경제의 불확실성이 가중되면서 중장기 실적 악화로 직결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탓이다.

스마트폰과 자동차는 물론 반도체, 에너지, 석유·화학제품 등 각사의 간판 품목들의 하반기 판매 전망도 밝지 않다. 일부 기업은 해마다 반복되는 노조 리스크가 또 다시 발목을 잡을 여지도 있다. 여기에 최근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한반도 내 배치 결정도 악재로 작용할 것이라는 우려다.

(왼쪽부터)삼성전자 서초동 사옥, 현대차 양재동 사옥(사진=각사)

■글로벌 위기 심화...경쟁력 제고 위한 혁신 나서야

최근 재계 1위인 삼성그룹에서 통렬한 자기반성이 연이어 나온 것 역시 이같은 위기의식과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다. 지난 5일 오전 삼성전자, 삼성SDS 등 그룹 주요계열사에는 사내방송 SBC가 제작한 '삼성 소프트웨어 경쟁력 백서 2부, 우리의 민낯'이 방영되며 적지 않은 울림을 남겼다.

삼성이 지닌 소프트웨어(SW) 경쟁력의 현주소에 대한 냉철한 진단과 혁신의 필요성을 그대로 담아냈다. 삼성은 자사의 SW 역량에 대해 "30층짜리 건물을 지어야 하는데 지금 초가집 수준"이라고 진단했다.

SW의 전체 구조를 그려낼 수 있는 아키텍처(architecture·건축) 역량이 부족하다 보니 기본기가 뒤쳐지고, 이는 곧 위기시 대응능력 악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큰 그림을 그릴 줄 모르니 기본 설계가 엉망이고, 기초 설계가 부실하다 보니 작은 개선도 어려워 '땜질'식 처방이 쌓여 이제 손 댈 수 없는 난감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삼성의 위기감이 여실히 드러난 대목이다.

삼성은 SW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조직의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구글의 경우 내부에서 만든 코드를 공개해 서로 품평을 하는 문화가 이미 자리잡고 있다는 점을 예로 들기도 했다. 위계질서가 강한 삼성의 사내 문화가 직원들의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막고 창의성 발휘에 한계로 작용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재계 관계자는 "관리에만 집중하고 있는 삼성의 문제를 신랄하게 자기 진단하고 있다"며 "기업체질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관행 타파를 주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사진=지디넷코리아)

실제 삼성그룹은 올해를 성장의 전환점으로 잡고 대대적인 조직문화 개편에 나서고 있다. 최근 삼성전자가 직원들끼리 직급 대신 'ㅇㅇㅇ님'으로 호칭을 변경하고 반바지도 허용하는 사내문화 개혁에 나선 것도 대대적인 혁신 예고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앞서 올 3월에는 '관리의 삼성'을 '스타트업 삼성'으로 변화시키는 새로운 기업 문화를 선포하기도 했다. 이 모든 변화는 이재용 부회장이 주도 아래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룹의 캐시카우인 핵심 계열사 삼성전자의 상황 인식도 다르지 않다. 지난 2년간 매출이 연속 감소한 삼성전자는 갤럭시S7의 선전으로 올 1분기 6조6천억원의 영업이익을 낸 데 이어 2분기 잠정 영업이익이 8조1천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삼성전자는 IM사업부의 갤럭시S7과 중저가 폰이 실적을 이끌고 있고 CE사업부도 가전에서도 괄목한 실적이 기대되고 있다.

다만 2분기 잠정 매출액은 50조원으로 전분기 대비로는 불과 0.4% 증가하는 등 성장 정체가 가시화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여기에 향후 10년을 지탱할 만한 확실한 미래 성장동력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데 더 큰 고민이 있다. 올 가을 출시를 앞둔 애플 아이폰 7의 흥행 유무와 브렉시트로 인해 커지는 불확실성도 잠재적인 위험 요소다.

삼성전자는 지난 4일 권오현 부회장과 윤부근·신종균 사장 등이 '하반기 최고경영자(CEO) 메시지'를 통해 "5년, 10년 뒤에도 삼성전자가 경쟁력 있는 기업으로 존재하고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며 "올해는 성장과 정체의 분수령이 될 중요한 순간인 만큼, 긴장을 놓지 말고 도전적인 하반기를 시작해 달라"고 강조했다.

2016년 시무식에서 정몽구 회장이 신년사를 낭독하고 있다(사진=현대차그룹)

현대자동차그룹 역시 하반기가 현대·기아차의 향후 글로벌 톱3 도약의 분기점이 될 것으로 보고 위기 대응에 적극 나서고 있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은 이달 하순 서울 양재동 본사에서 해외법인장 60여명을 국내로 불러 회의를 열고 하반기 시장 대응 방안 논의는 물론, 강도 높은 판매전략 수립을 주문할 예정이다. 특히 이번 회의에서는 브렉시트 여파에 따른 유럽시장 변화와 러시아, 브라질 등 신흥시장 침체 대응 방안 등을 집중 논의할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기아차는 올 상반기 글로벌 시장에서 2.4% 줄어든 385만여대를 판매하는 데 그쳤다. 상반기 판매량 추이를 볼 때 연간 판매목표(813만대) 달성이 어려울 수 있다는 위기감이 저변에 깔린 것으로 분석된다. 올해도 목표치를 달성하지 못하면 2년 연속 목표 달성이 불발된다. 이는 정 회장에게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정 회장이 직접 해외시장 동향과 판매 상황을 챙길 것"이라며 "해외 법인장 회의에서 각국 상황에 따른 신차 출시와 마케팅 등 맞춤형 전략 방안 등이 논의될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여기에 현대차 노조가 지난주 올해 임금협상 결렬을 선언, 5년 연속 파업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도 악재로 작용하고 있다. 대내외 시장 환경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파업이 현실화되면 생산 차질은 물론 해외시장에서 출시를 앞두고 있는 고급 브랜드 '제네시스'의 판매에도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적지 않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사진=SK그룹)

SK그룹도 현 상황을 위기로 판단, 기존 틀을 깨지 못하면 미래가 없다며 강도 높은 개혁을 예고하고 있다. 실제 SK그룹 대부분 계열사의 PBR(주가순자산비율)이 1에도 미치지 못하는 등 각종 경영지표가 심각한 수준이다. PBR이 1보다 높으면 현재 주가가 기업 가치보다 높다는 뜻이고, 반대면 낮다는 뜻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지난달 30일 최고경영진 4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확대경영회의에서 "요즘과 같은 경영환경에서 변화하지 않는 기업은 서든 데스(sudden death·돌연사) 할 수 있다"며 "혹독한 대가를 치르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바꾼다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회의는 예정에 없이 갑자기 이뤄졌다. 최 회장은 "브렉시트 현실화, 18개월 연속 수출 감소 등 악재가 겹쳐 올 하반기엔 미증유의 경영 환경이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환골탈태하는 변화와 혁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재차 당부했다.

SK그룹은 SK이노베이션과 SK텔레콤 등 에너지와 통신의 양대 축은 물론 SK하이닉스(반도체) 등 3대 주력 계열사가 국내외 경영 환경 악화로 실적이 좋지 않다. 여기에 시장 포화로 한계에 부딪힌 SK텔레콤이 콘텐츠 역량 강화를 위해 추진한 CJ헬로비전과의 M&A(인수합병)는 정부의 반대로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최 회장은 이날 회의에서 전 계열사 사장들에게 오는 10월 하반기 CEO 세미나 때까지 일하는 방식, 사업하는 방식, 자산 효율화 등 세세한 부분에 걸쳐 구체적인 변화와 실천 계획을 제출할 것을 주문했다.

구본무 LG 회장

구본무 LG그룹 회장도 지난 5일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에서 열린 임원세미나에서 경영환경의 불확실성이 커진 데 따른 경영진들의 발 빠른 대응을 강조했다.

구 회장은 "브렉시트 등으로 경영 환경의 불확실성이 가중되고 세계경제 질서의 변화마저 감지되고 있다"며 "변화 속에서는 항상 기회가 수반되는 만큼 사업에 미치는 단기적 영향뿐 아니라 중장기적 영향까지 면밀히 분석해 대응하라"고 주문했다.

이에 따라 LG전자, LG디스플레이, LG화학 등 해외 매출 비중이 높은 주력 계열사들은 외환시장 모니터링을 강화하는 한편, 시나리오별 맞춤형 사업전략을 수립해 선제적인 대응에 나설 계획이다. 이달 1일 단행된 스마트폰 사업을 관장하는 MC사업부의 조직개편 역시 이같은 선제적 위기대응의 일환으로 구 회장의 의중이 적극 반영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LG그룹은 MC사업부를 신호탄으로 하반기 실적 개선 방안이 마땅치 않은 곳부터 과감하게 도려내는 본격적인 조직 개편에 나설 전망이다.

■엎친데 덮친 격...사드 합의에 속타는 재계

여기에 지난 8일 정부가 미국과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의 한반도 내 배치에 합의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우리 제품의 향후 중국 수출은 물론 현지 판매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관측이 불거지고 있다. 이번 사안이 안보 이슈인 만큼, 각 기업들은 개별적인 입장 표명을 꺼내놓는 데 조심스러운 모양새지만 사드 배치 결정을 바라보는 속내는 마뜩치 않다.

중국 정부가 정경분리 원칙을 지향하고 있고 작년 12월 FTA(자유무역협정)가 발효된 만큼 관세 조정 등 직접적인 규제에 나설 수는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지만, 중국 수출이나 현지 판매 비중이 높은 업체의 경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지난 2000년 중국산 '마늘 세이프가드'로 인해 한국산 휴대폰 등의 수출 중단 사태를 겪은 만큼, 경제적 보복 조치 가능성도 불거지는 상황이다.

재계 관계자는 "사드 배치에 강력 반발하는 중국과 러시아의 중장기적인 무역 제재는 물론, 현지 사업장의 지원책도 기대하기 어렵게 될 것"이라며 "반한(反韓) 감정 고조로 불매 운동이 일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우려했다.

우리 경제의 중국 경제 의존도는 미국보다도 더 높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경제가 1%포인트 성장할 때 우리 경제는 0.1%포인트 성장하지만, 중국이 1% 성장할 경우 우리 경제의 성장률은 0.3%포인트에 달할 정도로 영향력이 커졌다. 삼성전자의 경우 올 1분기 기준 전체 매출(49조7천800억원)의 약 16%(8조2천45억원)가 중국에서 발생했다.

현대·기아차의 중국 시장 의존도는 더 크다. 현대·기아차는 지난해 중국에서 총 167만8천922대의 승용 차량을 판매했는데, 이는 전 세계 판매량(801만5천745대)의 약 21%에 달하는 수준이다. 현대·기아차가 판매하는 5대 중 1대는 중국에서 팔리고 있는 셈이다.

다만 현대·기아차의 경우 중국 내 판매되는 차량 대부분이 합작법인에 의해 생산되는 만큼, 당장 직접적인 영향은 없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하지만 이번 사태로 중국 내 반한 정서가 확산될 경우 현지 판매에 미칠 타격을 배제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현대차그룹은 이달 말 열리는 해외 법인장 회의에서도 중국시장 대응 방안에 대해서 집중 논의할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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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SDI와 LG화학이 중국에서 진행하고 있는 전기차 배터리 사업도 유탄을 맞을 가능성이 커졌다. 앞서 삼성SDI와 LG화학은 지난달 중국 정부의 전기차 배터리 규범 조건 인증업체에서 탈락했다. 탈락한 업체들은 2018년 1월부터 전기차 보조금을 받지 못하게 된다.

양사는 내달 재인증이 유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지만, 중국 정부가 사드 배치로 칼끝을 겨눌 경우 인증을 장담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