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혁명 이끈 열정의 승부사 '앤디 그로브'

[김익현의 미디어 읽기]

데스크 칼럼입력 :2016/03/22 18:25    수정: 2016/03/23 07:13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 기자 페이지 구독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앤디 그로브께.

한 동안 잊고 있던 이름이었는데, 이렇게 부음으로 접하는군요. 그것도 하필이면 모바일 시대 주역인 애플의 새 제품 발표 소식이 온 매체를 뒤덮고 있는 날 말입니다.

제가 IT 기자 생활 시작하던 무렵 당신은 인텔의 최고경영자(CEO)였습니다. 다시 말해 제 기자 생활 초년기엔 한참 동안 인텔=앤디 그로브였던 셈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당신의 부음을 접하면서 “또 한 분의 영웅이 떠나가는구나”란 쓸쓸한 회한에 젖어들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IT시장에도 영웅들이 주도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앤디 그로브. (사진=인텔)

■ '인텔 인사이드'는 당신의 결단이 만들어낸 작품

제게 곧바로 떠오르는 IT 영웅은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입니다. 한 때 PC 라이벌이었던 둘은 전성기가 묘하게 엇갈렸지요. 그 덕분에 서로 다른 시대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습니다. 잘 아는 것처럼 도스와 윈도를 연이어 내놓은 빌 게이츠는 ‘PC시대’를 주도했습니다. 빌 게이츠의 시대를 멀찍이서 지켜봐야했던 스티브 잡스는 2000년대 이후 ‘모바일 시대’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하지만 PC시대는 빌 게이츠 혼자 지탱하기엔 다소 무거웠습니다. 스티브 잡스 혼자서 모바일 시대를 이끌어갈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빌 게이츠가 지탱하던 PC 시대의 또 다른 한 축 역할을 한 것이 바로 당신이었습니다. 1987년 인텔 CEO에 취임한 당신은 1998년 전립선 암 때문에 물러날 때까지 엄청난 역량을 보여줬습니다. 당신이 또 다른 축을 지탱해주지 않았더라면, PC 시대는 좀 많이 허전했을 겁니다.

한 때 ‘인텔 인사이드(Intel Inside)’란 말이 보증수표로 사용된 적 있었습니다. 인텔 프로세서가 탑재된 PC란 의미였지요. 그 말은 요즘 iOS나 안드로이드란 말보다 훨씬 더 믿음직한 느낌을 안겨줬습니다.

한 때 PC 보증수표였던 인텔 인사이드. (사진=위키피디아)

MS와 함께 ‘윈텔 듀오’로 불리던 인텔이었지만, 당신의 결단이 없었더라면 ‘인텔 인사이드’를 과감하게 외칠 수 없었을 겁니다. 인텔의 젖줄이나 다름 없던 D램 사업을 과감하게 포기하면서 PC용 마이크로프로세서 유닛(MPU)에 집중하는 결단을 했으니까요.

그 결단 덕분에 ‘인텔 인사이드’란 말이 시장에 통용될 수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참 대단하지요. “이 PC엔 인텔 프로세서가 있다”는 게 마케팅 포인트가 되도록 만들었으니까요.

당신이 이끌던 인텔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1987년 당신이 CEO로 취임할 때 인텔의 매출은 20억 달러 남짓한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물러날 무렵 인텔은 매출 260억 달러 회사로 성장했다고 하더군요. 재임 기간 동안 회사를 13배나 성장시킨 셈입니다.

■ 1997년 타임 '올해의 인물' 선정되기도

그로브.

당신은 1997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의 ‘올해의 인물’로 선정됩니다. 타임은 당신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하면서 “마이크로칩은 신경제의 동력이다. 그 동력을 불어넣은 것은 앤디 그로브의 열정이다”고 평가했습니다. 한 마디로 ‘디지털 혁명’을 주도한 공로를 높이 평가한 거지요.

그 때 다이애나 황태자 비와 앨런 그린스펀 등이 당신과 함께 올해의 인물 후보에 이름을 올렸더군요. 하지만 그들조차도 디지털 혁명을 주도한 당신의 열정엔 미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 때 그 기사를 뒤져보다가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습니다. 그 기사를 쓴 기자가 월터 아이작슨이더군요. 그렇습니다. 스티브 잡스의 전기를 쓴 바로 그 아이작슨입니다.

앤디 그로브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한 타임 표지.

아이작슨의 기사는 “50년 전 이번 주(1947년 12월 23일) 디지털 혁명이 태동했다”는 문장으로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때 마침 그 때가 반도체 탄생 50돌이었던 겁니다. 반도체가 탄생 50돌을 맞던 바로 그 순간에 당신은 ‘디지털 혁명을 완성시킨 주인공’이란 영예로운 월계관을 썼던 셈입니다.

당신의 이름엔 늘 ‘편집광(paranoia)이란 말이 따라다닙니다. 당신이 쓴 ’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는 책 제목 때문일 겁니다. 실제로 그 책 제목엔 당신이 어떤 자세로 PC 시대의 영웅으로 떠올랐는지가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아이작슨은 나치와 공산주의를 피해 이민온 바로 그 순간부터 ‘편집광적인 기질’이 뿌리를 내렸다고 평가하고 있더군요. 헝가리 출신인 당신껜 최고의 찬사가 아닐 수 없을 겁니다.

실리콘밸리를 대표하는 벤처캐피털리스트인 벤 호로위츠는 당신을 ‘실리콘밸리를 만든 인물’이라고 평가했더군요. ‘역사상 가장 위대한 CEO’란 찬사도 빼놓지 않았더군요.

■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 못지 않았던 당신

앤디 그로브.

당신은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처럼 대중적인 인기를 누린 CEO는 아니었습니다. 그건 당신이 결코 그들보다 능력이 없기 때문이 아닐 겁니다. 다만 PC나 스마트폰처럼 눈길을 확 끄는 제품을 만든 적 없기 때문일 겁니다. 이 바닥에서 쓰는 말로 표현하자면 B2B 기업 CEO의 한계일 테지요.

하지만 실리콘밸리를 중심으로 한 IT 역사를 논할 경우 당신 이름은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와 나란한 위치에 놓일 겁니다. 그게 당신이 이뤄낸 것들에 대한 합당한 대우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뛰어난 학문적 업적과 탁월한 경영 능력을 함께 보여준 드문 CEO였습니다. 열정과 집념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뒤지기 싫어했던 승부사이기도 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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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그로브.

당신은 영원한 인텔맨이자 영웅이었습니다. 디지털 혁명의 씨앗을 뿌리고 과실까지 일궈냈던 당신의 명복을 빕니다.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sini@zd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