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세탁기 박사' LG사장의 명예회복

기자수첩입력 :2015/12/11 22:53    수정: 2015/12/11 23:13

정현정 기자

LG전자 가전 사업을 이끄는 조성진 사장이 이른바 ‘세탁기 사건’ 1심에서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를 받았다. 지난해 독일 베를린에서 삼성전자 세탁기를 고의로 파손하고 경쟁사 제품을 폄하하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승인했다며 재물손괴와 업무방해 혐의로 올 2월 재판에 넘겨진 뒤 10개월 만이다.

지난해 9월 3일 오전 10시 30분경 유럽 최대 가전박람회인 IFA 2014 개막을 이틀 앞둔 날 독일 베를린 시내에 위치한 가전양판점인 자툰(Saturn)사의 슈티글리츠 매장을 방문한 조성진 사장 일행은 이 곳에 한 시간 이상 머물며 전시된 제품들을 둘러봤다. 그 중에는 삼성전자가 IFA 전시회 기간을 맞아 진열해놓은 신제품 크리스탈 블루도어 세탁기도 있었다. 조 사장은 도어를 열고 꾹꾹 눌러보기도 하며 제품을 꼼꼼히 살펴봤다. 이 모습은 당연히 매장 CCTV에도 고스란히 찍혔고 매장 관계자들도 물론 지켜보고 있었다.

현지시간으로 그날 밤 11시께 전시회 출장 기자단에 포함된 국내 언론사에서 최초 보도가 나오면서 논란이 본격화됐다. 그로부터 14일 뒤에는 이 사건의 당사자 중에 조성진 사장도 포함돼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은 '사건'이 됐다. 제품 파손 뿐만 아니라 LG전자 입장자료에 실린 “다른 회사 세탁기들과는 달리 유독 특정 회사 해당 모델은 세탁기 본체와 문짝을 연결하는 부분이 상대적으로 취약했다”는 문구도 문제가 됐다. 검찰 기소 과정에서 조성진 사장에게 재물손괴 혐의와 함께 업무방해와 명예훼손 혐의가 추가된 이유다.

갈등으로 치닫던 사건은 지난 3월말 삼성과 LG 측의 전격 화해로 종결되는 듯 싶었지만 검찰은 끝까지 공소를 취하하지 않아 형사 재판 사건이 계속됐다. 이후 이어진 공판 과정은 길고도 지루했다. 과연 세탁기의 어떤 상태를 파손으로 볼 수 있느냐는 기준에 대한 문제부터 시작했다. 8차례 공판을 진행하는 동안 현장 CCTV 동영상이 다수 공개됐고, 문제가 된 세탁기 실물에 대한 검증도 진행됐다.

독일에서 5명의 증인들이 직접 한국으로 날아와 공판에 참석하기도 했다. 지난 3월 첫 공판준비기일부터 이번 사건 진행 과정을 지켜봐 온 기자도 '후크'와 '레치홀'이라는 생소한 전문용어가 익숙해졌을 정도로 세탁기 도어에 관해서라면 자타공인 세탁기 박사인 조성진 사장 못지 않은 전문가가 됐다.

조성진 LG전자 H&A사업본부장 사장이 11일 선고공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후 법원을 빠져나가고 있다. (사진=지디넷코리아)

그렇지만 결정적인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사건 당시 모습이 여러 각도에서 고스란히 촬영된 CCTV 영상을 놓고도 검찰과 변호인의 주장은 팽팽히 맞섰고 증인들의 진술은 엇갈렸다. 유로파센터 매장 사건의 핵심 증인이었던 독일인은 결정적인 증거인 세탁기와 건조기의 위치를 헷갈렸고, 슈티글리츠 매장 아르바이트생은 조 사장 일행이 방문한 시점을 사실과는 다르게 확신하고 있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 1심 재판부는 조 사장에게 적용된 모든 혐의에 대해 "현재까지 제시된 증거만으로 세탁기 손괴가 피고인 때문에 발생했다는 사실과 손괴 고의가 합리적인 의심없이 증명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무죄 판결을 내렸다.

조성진 사장은 여덟 번의 공판 때마다 집과 사무실이 있는 창원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길게는 오전 10시부터 저녁 6시까지 하루 꼬박 진행되는 재판 과정을 좁은 피고인석에 앉아 묵묵히 지켜봤다. 지난달 17일 결심공판에서야 비로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최후진술 기회가 주어졌다.

그는 "육십 평생 경찰서 한 번 가보지 않았던 제가 이런 소송에 휘말리게 됐다"면서 운을 떼고는 감정이 북받칠 것 같다며 준비해 온 메모를 꾸역꾸역 읽었다. "40년 동안 한 길을 걸어오며 쌓아왔던 신뢰와 명예를 하루아침에 잃지 않을까 두렵다"는 대목에서 그간의 마음고생이 묻어났다. 그랬던 조 사장은 오늘 처음으로 밝게 웃었다.

논란을 처음부터 지켜 본 이들 모두가 이 사건이 승자 없는 싸움이 되리라 전망됐다. 피해자이자 고소인인 삼성전자와 피고인 LG전자 모두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다는 의미였다. 중국 경쟁사들이 턱밑까지 추격하고 있는 위기 상황에서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이 선의의 경쟁을 넘어 자존심 싸움을 벌이는 모습이 볼썽사납다는 지적도 여러 번 나왔다.

아이러니 하지만 조성진 사장은 이 사건 이후 더욱 단단해졌다. 사건 초기까지 홈어플라이언스(HA) 사업본부장이던 조 사장의 직책은 지난해 말 에어컨 사업을 합친 홈어플라이언스&에어솔루션(H&A) 사업본부장으로 확대됐고, 지난달 정기 인사에서는 3인의 LG전자 대표이사 중 한 명이 됐다. 조 사장이 이끄는 H&A사업본부는 실적 면에서는 다른 사업부를 압도하고 있고 그가 개발 초기부터 참여한 '트윈워시' 세탁기는 대히트를 기록중이다. 전화위복의 기회가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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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심 재판을 맡아 온 윤승은 부장판사는 재판 말미 3명의 피고인을 향해 “양사 모두 기술개발에서 선의의 경쟁을 하더라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굴지의 기업인 만큼 상호 존중하는 자세를 잊지 말았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판결 이후 조성진 사장 역시 “재판부의 현명한 판단에 감사드린다”는 인사와 함께 “더욱 기술 개발에 충실히 해서 좋은 제품, 세계 고객들에게 사랑받는 제품 만들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아직 검찰의 항소 가능성이 남아있다. 끝날 때 까지 끝은 아니라는 의미다. 하지만 이제는 더 확실해졌다. 더 이상의 소모적인 싸움이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 말이다. 이번 사건이 더 이상 확전되지 않고 일단락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