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토는 없다

전문가 칼럼입력 :2015/10/12 08:17    수정: 2015/10/12 08:21

임백준 baekjun.lim@gmail.com

가끔 이메일을 받는다. 책이나 칼럼을 읽은 독자 혹은 팟캐스트 청취자다. 메일을 크게 두 개의 그룹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가벼운 응원의 메시지고, 다른 하나는 장문의 고민상담이다. 후자를 보내오는 사람은 대개 졸업을 앞둔 대학생이거나 전역을 앞둔 군인이다.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취업을 목전에 둔 사람도 있고, 고등학생도 있다.

고민을 토로하는 메일이 대부분 비슷하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우선 자기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 누구라는 소개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요즘 무슨 고민을 하고 있고, 왜 메일을 적는지에 대한 설명이 길게 이어진다. 요지는 취업과 적성에 대한 고민이다. 밤에 메일을 적었는지 갈림길을 마주한 영혼의 불안함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리고 질문을 던진다. 저의 멘토가 되어 주시겠습니까?

메일을 받으면 최대한 답장을 보내는 편인데, 이런 메일을 대해서는 침묵한다. 누군가의 멘토가 되고 싶은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메일을 보낸 진심과 성의는 정말 고맙지만 이런 상담이 나는 불편하다. 이러저러한 분야의 전망은 어떨 거라고 생각합니까. 이런 준비를 해서 저런 회사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괜찮을까요. 이런 질문을 받으면 답답하다. 질문에 대해서 대답해줄 능력이 내게 없기도 하지만, 자신의 삶이 걸려 있는 문제를 다른 사람에게 묻는 태도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멘토라는 말의 사전적인 의미는 본래 우리말의 스승 혹은 사부에 가깝다. 트로이 전쟁에 참전한 오디세우스는 아들을 친구에게 맡기며 대신 키워달라고 부탁했다. 그 친구의 이름이 멘토였다. 오랜 세월이 흘러 집에 돌아온 오디세우스는 훌륭한 청년으로 성장한 아들을 보고 감격했다. 그는 “역시 멘토답군.”하고 탄복했다. 멘토라는 말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멘토와 멘티의 관계는 이렇게 깊고 무거운 인연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요즘에는 멘토라는 말의 의미가 희석되었다. 아무나 멘토고, 아무나 멘티다. 무엇보다도 나는 진정이 담겨야 하는 인간관계에 자본주의적 틀을 덧씌우는 느낌이 들어서 이 표현을 싫어한다.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처럼 전면적이고 총체적인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가벼운 계약관계를 지칭하는 단어로 변질되었다.

멘토와 멘티라는 관계가 발설되는 순간, 두 사람 사이에는 암묵적인 권력관계가 성립한다. 그런 권력관계는 ‘물질적 이득’을 토대로 구축된다. 직간접적으로 수업료를 챙기는 멘토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멘티 역시 멘토와의 관계 속에서 이득을 추구한다. ‘배움’이라는 완곡한 표현으로 포장되긴 하지만 권력관계에 자발적으로 발을 들여놓는 멘티의 속마음도 이익을 얻는데 집중된다. 멘토에 대한 인간적인 존경과 애정이 아니라 “그가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가 관심사다.

배우고 가르치는 것이 필요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프로그래머들은 자기가 속한 팀에서 자기가 가장 실력이 낮은 사람이 되도록 애쓰라는 격언이 있다. 배울 사람이 없는 팀에서 오래 머물지 말라는 뜻이다. 프로그래머들은 그만큼 배움에 민감하여 주변 사람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는다. 프로그래밍은 책이나 수업보다 다른 사람의 작업을 어깨너머로 보면서 배우는 것이 왕도이기 때문에 개발자들은 배우고 가르치는 관계에 갈증을 느낀다.

그런 갈증은 결코 멘토와 멘티로 표현되는 값싼 계약관계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런 갈증을 느끼는 사람에게 멘토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자신을 누군가의 ‘멘토’라고 소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익을 추구하는 장사꾼, 심하면 사기꾼일 확률이 높다. 멘토는 없다. 그래서 프로그래머가 갈증을 해소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멘토를 찾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마음을 일으키는 발심(發心)이 핵심이다.

발심을 개발자 용어로 달리 표현하면 “코딩신을 영접”하는 것이다. 팟캐스트 <나는 프로그래머다>의 내용을 묶은 책에 쓴 표현을 인용해보면 이렇다.

“좋은 개발자가 되기 위해서 프로그래밍을 어디에서 누구에게 배우는가는 큰 의미가 없다. 대학에서 컴퓨터를 전공했는지, 학원에서 속성으로 배웠는지, 아니면 회사에서 제공하는 신입사원 교육 프로그램에서 프로그래밍을 처음 접했는지 하는 것은 핵심이 아니다. 그 분을 영접하는 신내림을 받았는가, 받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 경험을 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밤샘 코딩이 고문 같은 고통이지만, 그 경험을 한 사람에게는 가슴 뛰는 즐거움이다.”

코딩신을 영접한 사람의 눈에는 자기에게 가르침을 주는 친구가 사방에 출몰한다. 즐겁게 배우고 행복하게 코딩에 몰두하다보면 어느덧 자기도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런 관계는 자연스럽다. 굳이 누가 가르쳐주고, 누가 배우는지 구별할 필요가 없다. 가르치는 사람이 더 많이 배우기도 하고, 배우는 사람이 가르침을 주기도 한다. 그들은 ‘친구’다. 나이, 학력, 고향, 성별, 종교, 성적기호, 언어, 플랫폼, 정치적 입장, 회사, 경력, 이런 것은 상관이 없다. 코딩신을 영접한 사람은 코딩신을 영접한 사람을 알아본다. 그게 핵심이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이런 분야의 전망이 어떨 거라고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 갈림길을 만나면 머리가 계산을 하기 전에 심장이 저절로 움직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다. 이미 행복하기 때문에 전망에 연연하지 않으며, 전망이 없으면 전망을 만들고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겠다는 배짱과 낙관이 충만하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한 신혼부부가 가난한 셋방살이를 해도 행복한 여유가 넘치는 것과 동일한 이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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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工夫)에서 ‘공’은 하늘과 땅을 잇는 것을 표상한다. 그렇게 엄청난 일을 스스로 하지 않으면 누가 대신 해줄 수 있을까. 멘토에게 기대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일이다. 발심하라. 스스로 마음을 일으켜서 코딩신을 영접하라. 그게 진짜다.

알림: 오는 10월 30일 넥슨 아레나에서 임백준 씨 등이 진행하는 '나는 프로그래머다' 공개 컨퍼런스가 열립니다. 등록은 http://onoffmix.com/event/55258에서 할 수 있습니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