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자' 넷스케이프를 위한 변명

데스크 칼럼입력 :2014/10/14 15:55    수정: 2014/12/29 17:18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 기자 페이지 구독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터넷 기자로 막 변신하던 지난 2000년. 마이클 루이스의 ‘뉴뉴씽’이란 책을 흥미롭게 읽은 적 있습니다. ‘머니볼’로 유명한 마이클 루이스가 넷스케이프를 만든 짐 클라크 얘기를 흥미롭게 풀어낸 책입니다.

짐 클라크와 마크 앤드리센. 그리고 그들의 활동 무대였던 넷스케이프 커뮤니케이션즈.

40대 중반 이후 세대들에겐 추억이 서린 이름입니다. 사실상 첫 상용 브라우저였던 넷스케이프를 만든 사람들이지요. 여기서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볼까요?■ '모든 사람을 위한 웹'을 선언했던 당돌한 넷스케이프

1994년 10월 13일. 20대 중반이었던 마크 앤드리센은 야심적인 선언을 했습니다. 패기와 자신감이 듬뿍 담겨 있는 선언이었지요. 그 내용은 이랬습니다.

넷스케이프를 공짜로 배포하는 건 모자이크 커뮤니케이션스가 혁신적 정보 애플리케이션의 폭발적인 성장에 기여하는 방법입니다.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넷스케이프가 인터넷이 한 단계 도약하는 데 불을 지필 것으로 기대합니다.

이 선언은 20대 청년 앤드리센의 치기어린 호언장담만은 아니었습니다. 이 선언과 함께 대중들에게 공짜로 선사한 넷스케이프는 인터넷 혁명의 주춧돌 역할을 했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인터넷은 대중과는 거리가 먼 곳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웹 사이트를 찾아가기 위해서도 복잡한 명령어를 입력해야만 했지요.

넷스케이프가 혁신을 이룬 건 바로 그 부분이었습니다. 그 무렵엔 생소하기 그지 없던 그래픽 이용자 인터페이스(GUI)를 선보인 겁니다. 넷스케이프는 사실상 첫 GUI 기반 브라우저였던 셈입니다. 물론 넷스케이프의 모태였던 모자이크란 GUI 기반 브라우저가 있긴 했습니다. 하지만 인터넷을 대중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넷스케이프였습니다.

여기서 잠시 인터넷 역사를 뒤적여볼까요? 잘 아는 것처럼 대중적인 의미에서 인터넷의 토대를 닦은 것은 팀 버너스 리 입니다. 그가 개발한 월드와이드웹(WWW)은 거칠던 인터넷 도로를 말끔하게 만들어줬습니다. 하지만 월드와이드웹을 서민들의 손에까지 가져다 준 것은 넷스케이프였습니다. 그만큼 인터넷 보급 초기에 넷스케이프가 해낸 역할은 대단했습니다.

마크 앤드리센과 짐 클라크는 바로 넷스케이프의 양대 축이었구요. 이들은 '20대 패기'와 '40대 경륜'이 절묘한 조합을 이뤄낸 환상의 콤비란 평가를 받았습니다. 인터넷 대중화 초기 역사의 한 장을 확실하게 채워넣는 역할을 했습니다.

1995년 8월9일 단행된 넷스케이프의 기업공개(IPO)는 지금까지도 전설처럼 회자됩니다. 상장되자마자 주가가 엄청나게 뛰어올랐기 때문입니다. 공모가 14달러였던 넷스케이프 주가는 장이 열리자마자 75달러까지 치솟았습니다. 이후 약간 하락하면서 58달러 수준에서 첫 날 거래를 마감했습니다. 당시 넷스케이프가 월가와 투자자들에게 몰고 온 충격은 어마어마했습니다.

■ 두고 두고 회자되는 MS와의 브라우저 전쟁

당시 넷스케이프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웹’이란 구호를 내걸었습니다. 실제로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넷스케이프는 인터넷으로 통하는 유일한 관문 역할을 했습니다. 한 때 브라우저 시장의 90% 가량을 독식할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지요.

넷스케이프가 절정기를 누릴 때 당대 최고 IT 기업인 마이크로소프트(MS)가 ‘인터넷 위기론’으로 바짝 긴장했을 정도입니다. 어느 정도였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겠죠?

하지만 넷스케이프의 강렬했던 전성기는 길진 않았습니다. 윈도 운영체제를 앞세운 MS의 공세를 이겨내지 못한 때문이지요. 강렬했던 넷스케이프도 ‘플랫폼 지배자’ 앞에선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MS가 윈도95에 인터넷 익스플로러란 브라우저를 기본 탑재하면서 순식간에 브라우저 시장의 절대 강자로 떠올랐습니다. MS와 넷스케이프 간의 ‘브라우저 전쟁’은 이후 몇 년 동안 미국 IT 시장의 최대 화두로 거론될 정도로 치열했습니다. 특히 1998년 미국 법무부의 제소로 시작된 '브라우저 소송'은 이후 MS에게 '독점기업'이나 '악의 축'이란 오명을 안겨주게 됩니다. 빌 게이츠가 최고경영자(CEO) 자리에서 물러난 것도 따지고보면 브라우저 전쟁 때문이었습니다.

넷스케이프는 1998년에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연초부터 오픈소스인 모질라 프로젝트를 시작한 넷스케이프는 법무부가 MS를 상대로 벌이는 반독점 소송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해 말 AOL에 인수되면서 기업으로서 생명을 마무리했습니다. 물론 넷스케이프의 기술력은 이후 모질라재단이 만든 오픈소스 브라우저 파이어폭스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요즘 세대들은 익스플로러나 크롬, 파이어폭스 같은 브라우저를 주로 사용합니다. 넷스케이프가 어떤 존재였는지 모르는 사람이 태반일 겁니다.

하지만 넷스케이프가 없었다면 익스플로러나 크롬, 파이어폭스 같은 브라우저가 쉽게 만들어지지 못했을 겁니다. 그런 점에서 전 인터넷 역사에서 가장 혁신적인 역할을 했던 기업 중 하나로 넷스케이프를 꼽습니다. 그들의 짧지만 강렬했던 역사는 인터넷 대중화의 밑거름이 됐다고 평가하는 편입니다.

■ 아름다운 패자 넷스케이프를 추억하며

1995년 IPO 당시 20대였던 마크 앤드리센은 'IPO 대박 신화'의 원조였습니다. 기술력 하나만 갖고 있던 젊은이가 하룻 밤 사이에 억만장자로 변신했으니까요.

그는 그 때 번 돈으로 ‘앤드리센 호로위츠’란 벤처캐피털(VC) 회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페이스북, 트위터, 징가 같은 대표적인 인터넷 기업들은 대부분 앤드리센 호로위츠의 투자를 받았습니다. 반면 당시 40대 경륜을 제공했던 짐 클라크는 이후 웹MD 같은 건강 관련 기업들을 운영했습니다. 앤드리센만큼은 아니지만 짐 클라크 역시 IT 시장에서 나름의 역할을 한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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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스케이프가 인터넷 대중화의 씨앗을 뿌린지 벌써 20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제 넷스케이프는 철저하게 잊혀진 존재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시장의 패배자입니다. 게다가 이제 우리는 모바일과 SNS, 그리고 웨어러블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브라우저 따위는 구세대 유물로 취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이제 데스크톱 브라우저의 역할은 갈수록 줄어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모바일과 SNS과 우리 손 안에 들어오기까지 ‘넷스케이프’ 같은 구세대 브라우저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될 겁니다. 이 시점에서 '넷스케이프를 위한 변명'을 길게 쓰는 건 그런 교훈을 되새기기 위해서입니다.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sini@zd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