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1997…삐삐·시티폰, 그 아련한 추억

[신년기획 2-2]이동통신 30주년…모바일 혁명의 역사

일반입력 :2014/01/07 06:00    수정: 2014/01/13 10:35

김태정 기자

갑오년(甲午年) 청마(靑馬)의 해인 올해는 대한민국에 이동통신 서비스가 선보인 지 꼭 30년이 되는 해다. 지난 1984년 5월에 개통된 카폰이 그 시초다. 당시 카폰은 포니 승용차 가격보다 비싸 특수 계층만 사용하던 귀족폰이었다. 이후 국내 이동통신 시장은 지속적으로 발전해 지금은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부럽지 않은 환경이다. 이동통신은 내부적으로 국민의 생활과 기업의 문화를 혁신케 한 일등공신의 역할을 해왔으며 외부적으로는 우리나라 최대 수출 산업으로 올라선 스마트폰의 젖줄이 되었다. 지디넷코리아는 국내 모바일 혁명의 역사를 6회에 걸쳐 되돌아보는 시리즈를 마련했다.[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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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싣는 순서

1) 생각나시나요?…차보다 비쌌던 30년전 그 폰

2) 응답하라 1997…삐삐·시티폰, 그 아련한 추억

3) 보조금이 태어났다…격동의 이통 5社 시절

4) 아이폰 전에 꿈꿨다…손안의 멀티미디어 3G

5) 어느날 아이폰이 왔다…4년만에 시효 끝?

6) 호모 모빌리쿠스 시대…스마트폰이 곧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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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티폰 요것이 황금 알을 낳는 거위라니까”

최근 종영된 인기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서 여주인공의 아버지 역을 맡은 성동일 씨가 이렇게 말하며 웃는다. 지난 1997년 시티폰 거품에 눈물 흘린 이들에겐 가슴 쓰라린 장면이다. 빚까지 동원한 극중 시티폰 투자도 파산으로 직행했다.

만약 성씨가 1년 뒤 미래만 다녀왔어도 시티폰에 눈길도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시티폰의 왕좌는 짧았고, 최후는 초라했다.

정확히는 1997년 등장해 3년 만에 퇴출됐다. 반짝 인기는 처음 1년 정도고 뒤의 2년은 존재감이 미미했다. 대한민국 통신 역사에서 대표적 실패 사업으로 꼽힌다.

시티폰의 시작은 ‘상큼’, ‘파격’이란 표현이 어울릴 정도였다. 너도나도 시티폰을 사겠다고 몰렸다. 학생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아 시티폰을 가진 친구들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중학교-고등학교 앞 문방구들이 시티폰을 팔아 ‘학생 과소비’라는 사회적 논란이 되기도 했다.

■ 발신 어려운 발신 전용 시티폰

기기를 회상해보면 ‘발신 전용’ 휴대폰이다. 지금의 ‘010 XXXX XXXX’ 같은 본인 번호 따위는 없었다. 오직 발신만 가능했다.

그런데 이 ‘발신’ 기능이 엉망이었다. 공중전화 반경 200m 내에서만 사용 가능한데 이 조차 발신 성공률이 떨어졌다. 시티폰을 들고 공중전화를 찾아 발신을 시도하다 실패, 공중전화 카드를 찾는 황당한 일들이 다반사였다.시티폰 광고에서는 모델 김국진 씨가 우월한 표정으로 공중전화에 줄을 선 사람들을 바라보지만 실제로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당시 시티폰 돌풍의 주역인 요즘 30~40대들의 말을 요약하면 이렇다.

“몇 걸음 걸어가면 기지국 표시가 뜨다가 사라지고, 지방에서는 통화 성공이 기적에 가까웠다.”

당시 시티폰 사업자로는 한국통신(현 KT)과 서울이동통신, 나래이동통신 등이 있었다. 서울이동통신은 지난 2005년 바이오업체 ‘이노셀(현 녹십자셀)이 우회상장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시티폰이 짧게나마 패권을 잡았던 것은 ‘통화 발신’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목마름 때문이다. 길에서 ‘삐삐(호출기)’가 오면 공중전화를 찾는 대신 시티폰이 있으면 편할 듯했다.역시 요즘 어린 세대에게는 어색하지만 삐삐도 1990년대 초를 풍미했다. 집 전화와 공중전화뿐이었던 시절, 집 밖에서 서로 연락하기 위한 필수 수단이었다.

누군가 연락받기 원하는 번호를 나에게 보내주는 시스템. 그 번호를 보여주는 단말기 삐삐. 대학가 커피숍에는 “3340번으로 삐삐 보내신 분 전화왔습니다” 식의 방송이 필수였다.

그리고 그 삐삐가 넘치고 넘쳐 공중전화마다 긴 줄이 늘어섰을 때 사람들은 피로했고, 시티폰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삐삐+시티폰’이라는 조합이 연애의 기초이자 비즈니스 성공 비결이었다.

■ ‘꿈의 기술’ PCS, 난세 평정

불편해도 “공중전화보다 낫다”며 시티폰을 뒷주머니에 넣던 이들에게 다시 기절초풍할 일이 찾아왔으니 바로 ‘개인휴대폰(PCS)’이다. 1995년 정보통신부가 ‘코드분할다중접속(CDMA)’으로 기술방식을 확정한 PCS. 실제 제품은 시티폰 인기가 정점에 달했던 1997년 말부터 쏟아졌다.

기존에도 삼성전자와 모토로라의 휴대폰은 있었으나 대중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수백만원씩 하는 부자들의 전유물이었다. 길이가 성인 얼굴에 딱 맞는 이른바 ‘원조 탱크’들이다. 군용 무전기로 보였다.

PCS는 ‘원조 탱크’와 달리 가격이 30~50만원 수준이었다. 당시 기록을 보면 삼성애니콜 ‘SPH-2000’이 50만원, 현대걸리버 ‘HGP-1200’은 35만원에 나왔다.

게다가 시티폰과 달리 발신-수신 모두 된다. 문자메시지라는 것도 나왔다. 사람들은 이를 ‘꿈의 기술’이라고 불렀고, 공상과학 영화가 현실화됐다며 감동받았다.

고등학생부터 직장인, 어르신들까지 PCS 광풍이 불었다. 지금은 옛일로만 남았지만 현대와 한화 등도 PCS 제조에 나섰다. 한화정보통신의 경우 현재 LG전자 주력 스마트폰 ‘G2’와 이름이 같은 제품을 인기작 반열에 올렸다.

한 통신업계 관계자는 “시티폰과 PCS의 기술 차이는 5년 이상인데 출시 간격은 1년이 안됐다. 먼저 나온 제품에게 너무 가혹한 현상이었다”고 돌아봤다.

■ 한라산에서 터진 애니콜, 모토로라 울렸다

PCS 시절을 이야기할 때 꼭 집어야 할 부분이 삼성전자의 모토로라 밀어내기다. 모토로라는 1984년 휴대폰 서비스 시작 후 약 10여년 국내 시장을 독점했다.1990년대 초 국내 점유율이 90%에 달했다.

1996년경부터 모토로라의 점유율 추락이 시작됐지만 ‘스타택’이라는 세계적 히트작의 인기는 한국에서도 이어졌다. 오늘날 아이폰의 인기에 버금갔다.

10cm가 채 되지 않은 길이에 무게는 고각 88g. 열고 닫을 때 특유의 ‘딱딱’ 소리가 나는 폴더폰. ‘휴대폰=모토로라’라는 인식이 한국에서도 굳건했다. 이 모토로라를 상대로 삼성전자는 칼을 갈았고, 1994년 만든 ‘애니콜’ 브랜드로 총공세에 나선다. 1995년 첫 애니콜 ‘SH-770’을 40만대 팔았고, 1996년에는 모토로라와 비슷한 40%대 점유율을 차지했다.

당시 삼성전자의 애니콜 마케팅은 ‘한국 지형에 강해 잘 터지는 휴대폰’이라는 내용이었다. 미국 동부와 달리 산악 지형이 많은 한국의 지형적 특징을 무기로 삼은 것인데 모토로라가 속수무책 당했다.

한라산에서 스타택이 먹통일 때 애니콜은 터지는 장면이 전국 뉴스에 올랐다. 휴대폰의 최대 경쟁 요소가 ‘통화 성공률’이었기에 가능한 마케팅이었다.

마케팅뿐만이 아니다. 삼성전자의 기술 진화는 모토로라를 압도했다. 월드컵 열풍이 불었던 2002년에 ‘SGH-T100’을 출시해 삼성 휴대폰 최초 1천만대 판매 기록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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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 제품은 세계 최초로 컬러 액정을 탑재, 세계적 관심이 쏠렸다. 고선명 고화질의 ‘박막액정 표시장치(TFT LCD)’에 경쟁자들은 기가 죽었다.

이에 힘입어 삼성전자는 2002년 지멘스를 제치고 노키아, 모토로라와 함께 세계 3대 휴대폰 제조사로 부상했다. 현재 삼성그룹 전체에서 최강 영향력을 행사하는 삼성전자 휴대폰 사업의 토대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