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평법·화관법' 반도체 업계 죽이기 논란

일반입력 :2013/08/29 14:53    수정: 2013/08/30 09:41

이재운 기자

“이 내용은 꼭 넣어야하는 내용이라고 해서 넣었습니다”

지난 27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신관 2층 제1소회의실. 패널토론을 위해 ‘반도체 산업과 창조경제’란 주제로 발제하던 김현종 서울대 교수가 마지막 장표를 열고 세미나 장소에 자리한 노영민 국회의원(민주당)을 향해 작정한 듯 말했다.

김 교수의 마지막 발표 내용은 업계에서 뜨거운 감자로 급부상한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화평법)’과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에 대한 문제점을 비판한 내용이었다.

28일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관련 업계에 따르면 화평법과 화관법이 입법 예고되면서 업계의 우려가 상당한 것으로 전해졌다. 기본적인 생산활동에도 영향을 주지만, 가장 큰 문제는 연구개발(R&D)에 제약이 가해진다는 점에 가장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이 업계의 주장이다.

화평법은 지난 6월에 개정안이 공포됐고, 화관법은 지난 5월에 처음 공포됐다. 두 법안은 지난해부터 잇달아 발생한 화학물질 누출사고에 따른 규제 차원에서 제정됐다. 업계는 법안 자체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는다. 화학물질 사용에 있어 안전을 기하는 것은 굳이 법으로 규제받지 않더라도 스스로를 위해 조심할 수 밖에 없다는 설명이다.그러나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두 법안은 지나친 규제로 업계의 연구개발활동을 크게 위축시킬 우려가 있다는 것이 업계의 지적이다. 미국이나 유럽연합(EU)의 규제 기준보다도 훨씬 엄격한 것으로, 기본적인 사업 활동조차 하기 힘든 실정이라는 반응이다.

화평법의 경우 특히 100kg 미만 수준의 소량의 화학물질까지도 전부 등록한 뒤 사용해야하기 때문에 연구개발 활동에 있어 상당한 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 맹점으로 꼽힌다. 화관법의 경우에도 유해 화학물질을 일으킨 사업장에 대해 매출액의 5%를 과징금으로 부과한다는 점도 지나치게 ‘징벌적인 관점’에서 접근한 것이 아니냐는 불만을 낳고 있다.

업계는 “연구개발에 6개월 이상의 시간이 추가로 소요되는데다, 비용도 수십억원 이상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도대체 사업을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모르겠다”는 반응이다. 화평법의 문제 조항은 원래 등록을 면제하는 예외조항이 있었지만 개정안 마련 작업 중에 삭제된 것으로 알려져 업계는 더욱 답답해하고 있다.

국내 주요업체들은 강한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이준혁 동진세미컴 대표이사는 “(화평법/화관법이 시행되면) 해외 업체들은 국내에 지은 R&D센터 철수하고 나가면 그만이지만 국내 업체들은 어디 가지도 못한다”며 막막한 실정을 토로했다.

외국계 업체들도 상황을 바라보는 속내가 복잡하다. 면밀한 검토 끝에 한국에 세운 R&D센터를 무작정 철수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현재 국내에는 독일 머크와 미국 다우케미칼 등 전자소재를 취급하는 외국계 화학회사 등 관련 업계의 종합 R&D센터가 상당수 운영 중이다. 독일 바스프도 국내에 R&D센터를 건설 중에 있다.

국내에 R&D센터를 설립한 이유는 삼성전자, 삼성디스플레이, LG디스플레이 등 관련 업계의 ‘빅 플레이어’가 바로 한국에 있기 때문이다. 고객사의 요구에 빠르게 대응하기 위해 설립한 센터를 섣불리 옮기는 것은 상당히 부담되는 상황이다. 일부 업체의 경우 한국지사가 사실상 전자재료 사업부문의 본사 역할을 하기도 한다. 화관법/화평법 실시 때문에 무작정 다른 지역으로 센터를 옮길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일단 환경부 등 당국은 대책 마련을 위해 고심하고 있다. 우선 지난 27일에는 화평법 하위법령 마련과 이에 관한 의견수렴을 위해 협의체를 구성하고 관련 협회와 업계 관계자들을 참석시키기로 했다. 또 법률적 검토를 위해 환경법학회 소속 법학교수, 법제연구원 법학자 등 법률전문가 그룹을 별도로 협의체내에 꾸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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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주한미국상공회의소(AMCHAM)가 산업통상자원부에 화평법에 대한 우려를 표하는 서한을 보내는 등 업계의 걱정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한때 미국과 일본 등 외국 정부가 법안 예고 소식을 접하고 우리 정부에 항의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으나, 일단 우리 정부는 “그런 사실이 없다”며 부인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업계 관계자는 “이대로 법이 시행된다면 효력이 발생하는 2015년부터 관련 산업이 크게 위축되고 외국계 업체들의 엑소더스(탈출) 현상도 본격화 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