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남양유업 사태로 본 IT업계 ‘갑을컴퍼니’

기자수첩입력 :2013/05/08 09:12    수정: 2013/05/08 09:58

봉성창 기자

“회사생활 잘하고 싶지? 하나만 기억하면 돼. 회사생활은 갑을만 잘 알면 되는거야.”

라면상무에 빵회장 그리고 조폭우유까지...이른바 갑(甲)의 수난시대다. 자본주의가 고도화 될수록 을(乙)은 갑에게 수그릴 수밖에 없고 갑은 을에게 더 함부로 대한다. 게다가 그 갑은 또 다시 누군가에게 굴종해야하는 을이기도 하다. 그래서 갑은 별로 죄책감이 없다.

이러한 갑의 지나친 횡포에 여론의 시선은 차갑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나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유사한 사례가 잇달아 수면위로 떠오르면서 요즘 갑들은 내부단속에 한창이다.

IT업계도 갑을 관계는 엄연히 존재한다. 예를 들어 전 세계 IT업계 최대 라이벌 삼성전자와 애플도 실상은 갑을관계다. 애플이 삼성전자에게 갑이다. 삼성전자가 만든 반도체, 디스플레이를 애플이 대량 구매하기 때문이다.

초창기 양사 간 특허 분쟁이 불거졌을 때 삼성전자는 말을 극도로 아꼈다. 경쟁사지만 한편으론 고객사라는 이유다. 물론 지금 삼성전자는 애플 매출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할 말을 해야겠다며 강공모드로 변했다.

이처럼 부품 공급업체들은 대형 제조사에게 철저하게 을이다. 강력한 갑을 관계에 따른 폐해를 막기 위한 노력도 있지만, 여전히 대기업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질 수 밖에 없다. 대기업은 제조에 필요한 부품을 절대 업체 한 곳에서 납품받지 않는다.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최소 3곳 이상의 업체를 선정한다. 때문에 협력사 입장에서는 여차하면 내쳐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다. 납품 단가 후려치기와 같은 갑의 횡포가 가능한 이유다.

인텔, 엔비디아, 샌디스크 등 내로라하는 글로벌 부품 기업들도 국내 대형 제조사에게는 을이다. 최근 이들 기업은 국내 대기업들의 요구에 발 빠르게 대처하기 위해 전담 조직까지 만들어 대응하고 있다. 그만큼 국내 제조업체의 위상이 올라간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이러한 대형 제조사들도 유통업체 앞에서는 을로 전락한다. 가령 삼성전자나 LG전자 경영진들의 미국 출장 스케줄에는 미국 최대 가전 유통업체인 베스트바이와의 미팅 일정이 거의 빠지지 않는다. 불과 10년 전만 하더라도 국내 제조업체가 해외 대형 유통업체와 맺은 계약이 대서특필 될 정도였다.

국내서도 대형 마트는 제조사를 상대로 막강한 파워를 가지고 있다. 물론 삼성전자나 LG전자 등 대기업은 워낙에 국내 시장점유율이 높고 글로벌 시장을 무대로 사업을 펼치기 때문에 절대적인 을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이들이 물건을 납품하지 않는 것도 유통업체 입장에서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들 대기업은 이미 자체 유통망도 구축하고 있어 크게 아쉬울 것도 없다.

반면 유통채널이 절실한 중소기업은 유통업체 앞에서 절대 을이다. 몇 년 전 한 대형마트는 모 중소업체 제품을 매장에서 모두 철수 시켰다. 해당 중소업체가 대형마트 오너의 가족이 소유하고 있는 광고 회사와 재계약을 맺지 않았다는 이유다. 결국 해당 업체는 해당 마트 담당자에게 싹싹 빈 것은 물론 해당 광고 회사와 다시 계약을 맺어야 했다는 후문이다.

유통업계와 더불어 IT업계 정점에 있는 갑 기업으로 이동통신사를 빼놓을 수 없다. 현행 휴대폰 유통 구조상 이동통신사가 제품을 받아주지 않으면 판로 자체 막힌다. 요즘은 자급제 도입으로 어느 정도 숨통이 트였지만 여전히 이동통신사를 통하지 않으면 제대로 물건을 팔기 어렵다. 이동통신사는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마케팅을 통해 가입자를 끌어 모은다. 이 과정에서 제조사를 상대로 판매 장려금이나 신제품에 대해 선출시 혹은 독점판매를 요구하기도 한다.

이렇듯 IT업계 먹이사슬의 정점에 있는 이동통신사를 견제하는 것은 정부다. 대부분 국가에서 이동통신은 정부의 통제를 받는 기간산업이다. 때문에 요금제부터 각종 정책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정부의 인허가를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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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역사상 제조사가 이동통신와 갑을 관계가 역전된 사례가 딱 한번 있었다. 바로 애플이다. 애플은 아이폰을 개발하고 당시 북미 1위 사업자인 버라이즌을 버리고 2위 사업자인 AT&T와 계약을 맺었다. 이를 통해 갑의 위치에서 애플의 요구사항을 하나에서 열까지 관철시켰다. 국내서도 1위 SK텔레콤이 아닌 KT를 통해 먼저 출시했으며, 일본에서는 아직까지도 1위 NTT도코모와 계약을 맺지 않았다. 그 결과 애플과 처음으로 손을 잡은 당시 3위 사업자 소프트뱅크는 KDDI를 제치고 현재 2위로 뛰어올랐다. 애플은 제조사 최초로 갑의 입장에서 통신업계 지형을 변화시켰다.

애플의 사례는 IT업계에서 얼마든지 갑과 을이 바뀔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품이나 기술 측면에서 압도적인 경쟁력이 필수 조건이다. 갑이 무조건 횡포를 부린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갑의 위치에서 사업을 진행하는 것만큼 유리한 것도 없다. 물론 이 모두를 아우르는 ‘슈퍼 갑’은 다름 아닌 소비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