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노버는 어떻게 HP를 넘어설 수 있었나?

일반입력 :2012/10/26 10:50    수정: 2012/10/26 11:57

봉성창 기자

<홍콩=봉성창 기자>“PC 시장은 끝났다. 아니 이미 죽었다. 스마트폰, 태블릿으로 인해 이제 사양산업이 됐다.”

이 과격한 주장은 요즘 충분히 설득력이 있게 들린다. 가장 확실한 근거가 바로 주가다. PC시장의 맹주였던 HP의 주가는 14.04달러까지 떨어졌다. 최근 10년간 가장 낮은 수치다. HP와 쌍벽을 이루고 있는 델 역시 9.25달러까지 곤두박질 쳤다. 역시 최근 3년새 가장 낮은 기록이다. 유럽과 아시아 시장에서 전통 강자인 에이서 역시 25.40 대만달러 까지 폭락했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을 역행하는 기업도 있다. 바로 레노버다. 레노버는 지난해 주가가 무려 30%나 상승했다. 최근에는 전 세계 PC시장 부동의 1위였던 HP를 제쳤다는 시장 조사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다들 어렵고 힘들다고 할 때 이들은 오히려 승승장구하고 있다. 25일 홍콩서 만난 잭 리 레노버 홍콩, 대만 및 한국 총괄 사장에게 그 비결을 들었다.

■누가 PC시장을 죽었다고 말하나?

“사람들은 PC시장이 죽었다고 말합니다. PC는 지금도 하루에 전 세계 100만대, 1년에 3억6천500만대가 팔립니다. 이래도 정말 PC시장이 죽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리 사장은 여전히 PC산업은 건재하며 사람들은 PC를 구입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7년 전까지 전 세계 기술 산업의 중심은 PC였던 것에서 지금은 인터넷 접속으로 넘어왔다. 그 과정에서 여전히 PC는 인터넷 접속을 위한 주요한 매개로 활용되고 있다는 것이 그가 내세우는 근거다.

“물론 태블릿을 가진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태블릿을 완벽하게 PC 대신 쓰는 사람은 아직 없습니다.”

날카로운 지적이다. 소비자들의 태블릿 신제품에 열광하고 실제로 구입도 많이 하지만 그것이 아직까지 완벽하게 PC를 대체해주지는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이 데스크톱이든 노트북이든 반드시 무엇인가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부분에 있어 레노버의 의지는 확고하다. 여전히 키보드가 없는 태블릿 제품은 내놓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HP, 델, 에이수스 등 PC 강자들이 애플 아이패드에 대항하기 위해 태블릿 신제품을 준비할 때도 레노버는 안드로이드 기반 씽크패드 태블릿 1종을 선보였을 뿐 좀처럼 외도하지 않았다. 반면 다른 기업들은 태블릿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적잖은 시행착오와 그에 따른 상당한 비용을 지불했다. 결과론적인 분석이지만 레노버의 선택은 아직까지 옳은 셈이다.

■레노버식 혁신은 애플과 다르다

많은 사람들은 애플에 열광하지만 반면 레노버는 그렇지 않다. 요즘 IT산업의 화두이자 기업을 평가하는 잣대로 사용해온 ‘혁신’ 측면에서 레노버는 그리 대단한 인상을 남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잭 리 사장은 과연 혁신은 무엇인가라고 되물었다. 그가 강조하는 혁신은 습관이자 행동양식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거창한 제품이 아니라 아주 작은 부분에서 시작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가령 신제품 ‘요가’는 윈도8이 탑재되고 상판 화면이 뒤로 넘어가는 특징을 가진 가벼운 노트북이다. 그는 스스로 요가에 대해 그리 끌리는 제품은 아니라고 인정했다. 대신 매우 기본에 충실한 제품이라고 소개했다. 여전히 누구나 사용하는 키보드가 있고, 태블릿처럼 사용할 수도 있으며 텐트 모양처럼 세워서 동영상을 감상하거나 혹은 90도로 접어 탁자에 걸어둘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바로 요가하면 떠오르는 유연함이 그대로 제품에 묻어난다. ‘요가’의 핵심은 힌지에 있다. 화면이 360도 뒤로 접히는 노트북은 쉬워 보이지만 이는 마치 컬럼부스의 달걀처럼 발상의 전환이기도 하며, 설계적으로도 상당한 고민이 필요한 문제다. 힌지에는 모니터와 본체를 연결해주는 케이블이 있는데 수천번 혹은 수만번 화면을 접었다 펴더라도 단선이 되지 않아야 할 뿐만 아니라 힌지 그 자체도 매우 튼튼해야 한다. 오랫동안 노트북을 써본 사람이면 힌지가 얼마나 약한지 잘 안다.

리 사장은 레노버가 PC시장서 다른 기업과 달리 잘 나갈 수 있는 네 가지 요인을 들었다. 첫째 확실한 전략을 갖고 있다는 것, 두 번째 제품이 뛰어나다는 것, 세 번째 제품 기획에서 생산, 유통, 마케팅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직접 관할하고 있다는 점, 마지막으로 오너십 경영체제와 강력한 기업문화다.

■“18개월 내에 한국서 톱5...인수도 심각하게 검토”

레노버가 추구하는 전략은 일단 지키고 공격하는 것이다. 레노버가 가진 가장 큰 시장인 중국에서 1위를 굳히면서 다른 이머징 시장과 북미, 유럽 등 선진 시장을 차례대로 공략해 나가는 것이다.

과거 레노버는 지난 2005년 IBM PC 사업 부문을 인수하면서 전 세계 PC시장을 충격에 빠뜨렸다. 뱀이 코끼리를 먹었다며, 과연 소화할 수 있을지 의문을 표시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 뿐만이 아니다. 일본의 최대 PC기업 NEC를 인수하며 당장 일본 시장내 1위로 떠올랐다. 이밖에도 각 대륙이나 국가에 내로라하는 PC시장을 집어 삼켰다. 결국 IBM 인수 전 기업가치가 130억 달러였던 레노버는 요즘 300억 달러에 달하며 고공성장을 지속하고 있다.

중국과 일본에서 부동의 1위를 굳건히 하고 있는 레노버지만 유독 우리나라 시장에서는 그 영향력이 크지 않다. 일단 삼성전자와 LG전자가 국내 시장을 양분하고 있기 때문이다. HP, 델 등 아주 오랫동안 국내 사업에 뿌리를 내려온 전통 PC 기업들의 입지도 만만치 않다.

홍콩과 대만을 비롯해 한국 시장을 총괄하는 잭 리 사장에게도 이는 적잖은 고민이다. 만약 레노버가 한국 시장에서 1위를 목표로 한다면 그간 해오던 대로 큰 인수 합병 소식이 들려올 법도 하다.

그러나 리 사장은 일단 한국 시장에서 전략에 대해 우선 좋은 인재를 영입하는 것이 첫번째라고 설명했다. 최근 한국 레노버 지사장이 교체된 것도 이와 무관해보이지 않는다. 또한 판매 채널을 확대하고 유통 개선에 힘쓸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이는 확실히 그간 레노버가 해온 스타일과는 맞지 않다. 단도직입적으로 국내 PC기업에 대한 인수 계획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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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인수 계획에 대해서 지금 이 자리에서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말해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비즈니스 모델과 잘 맞는 기업에 대해 심각하고 검토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입니다.”

리 사장은 향후 18개월 내에 국내 PC시장에서 톱5에 진입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사실 국내 시장이 워낙에 삼성전자와 LG전자의 비중이 높고 나머지 적은 시장 점유율을 가지고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는 시장 상황을 감안하면 그리 대단해 보이는 목표는 아니다. 다만 한 계단씩 차근차근 밟고 올라가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