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구코너] 바코드 혁명, 슈퍼마켓 혁명

일반입력 :2012/08/20 06:49    수정: 2012/08/20 17:41

이재구 기자

1■미국 오하이오주에서 울린 작은 신호음

1974년 6월 26일. 하늘에서 한떼의 구름이 떠 있는 美 오하이오 주의 맑은 초여름 날 아침.

“삐-”

트로이시 마쉬(Marsh) 슈퍼마켓의 계산대를 맡은 점원 샤론 뷰캐넌이 클라이드 도슨이란 여성으로부터 물건을 건네받고, 레이저 스캐너의 빔으로 비춘 순간이었다.

그녀는 단지 스캐너로 츄잉껌 세트의 표면에 검은 색과 흰색 줄이 찍힌 바코드를 통과시켰을 뿐이었다. 도슨이 건넨 껌은 리글리사의 노란색 쥬시 푸르츠 껌 10통짜리 한팩이었다. NCR사가 만든 1만달러짜리 바코드시스템 계산대 모니터에는 67센트라고 찍혔다. 오전 8시 1분이었다.

이 짧은 신호음은 전세계 소매업과 물류업의 혁명을 알리는 바코드 실용화의 서막을 여는 신호탄이었다.

미식품유통망협회(National Association of Food Chains·NAFC)의 승인을 받은 표준 바코드인 UPC(Universal Product Code)가 사용된 최초의 사례였다. 하나의 바코드는 한 종류의 제품을 확인해 주는 기능을 했다.

트로이시가 선정된 것은 체크아웃 단말기를 공급하는 NCR사가 있는 데이턴시와 가장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대형슈퍼마켓 손님들은 계산대에서 줄 서는 대기시간이 획기적으로 단축된 것을 느끼게 됐다. 슈퍼마켓 주인들은 더이상 하루를 공치면서 정확하지도 않은 재고 정리에 머리 썩이지 않아도 됐다. 또 언제라도 재고를 한눈에 파악해 제품판매를 관리할 수 있었다.

계산대 담당 점원이 금전등록기에서 일일이 계산하지 않고 레이저빔을 쏘아 바코드만 인식하면 자동으로 계산되는 이 스캐닝 시스템은 말그대로 '신기' 그 자체였다.

이른 바 판매시점관리(Point of Sales management)가 가능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 날 이후 미국전역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바코드시스템은 이제 전세계 유통점에서 하루도 없어서는 안되는 필수 시스템이 됐다.

하지만 이 편리한 시스템의 첫 구상이 현실로 이어지기까지엔 무려 26년이란 긴 시간이 걸렸다.

2■축제행사장 참석자 정보를 자동으로 얻을 수 없을까?

1948년. 美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시의 드렉셀공대(Philadelphia's Drexel Institute of Technology)에 다니는 버나드 실버라는 대학원생이 우연히 학교홀에서 열리는 지역 음식전시회(Food Fair)를 찾았을 때였다.

“음식축제행사장에 참석했던 사람이 나갈 때 그들의 정보를 자동으로 읽어 들일 수 있는 편리한 방법이 없을까요?”

한 유통업체 사장이 이 대학 학장에게 이런 호소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학장은 이런 편리한 자동 시스템을 만들어 달라는 그의 요청을 거절하는 것이 아닌가.

버나드 실버는 자신의 친구인 노먼 조지프 우드랜드에게 이런 사실을 말했다.

27살의 청년 실버는 대학원생이자 드럭셀의 선생이었다. 이 문제는 우드랜드를 열광하게 만들었다.

슈퍼마켓은 당시만 해도 위험한 사업이었다. 쥐꼬리 만한 마진을 남기기 위해 수천개의 제품, 수많은 브랜드,다양한 사이즈의 제품을 쌓아놓고 손님을 기다려야 했다.

이들을 잘 관리해서 모든 재고품을 너무 많지도 않고 너무 적지도 않게 쌓아둘 수 있는 방법을 알아 낸다면 그야말로 최고의 인기사업이 될 터였다

하지만 1970년대 중반까지도 대부분의 슈퍼마켓 매장에서는 엄청나게 많은 제품 가운데 어떤 물건이 어디 있는지 알려면 딱한지 외엔 달리 방법이 없었다.

당시엔 적어도 한달에 한번씩 매장 문을 닫고 매장안의 모든 캔과 상자, 꾸러미를 일일이 세면서 계산해야만 했다. 이 돈많이 들고 지루한 일은 적어도 한달에 한번씩 치르는 또다른 전쟁이었다.

매장 관리자는 모든 것을 대충 눈치와 육감으로 짐작해 재고를 관리하고 물건을 구매하곤 했다.

유통점 경영자들에겐 바코드와 스캐너같은 유통의 합리화를 도와줄 자동화시스템이 절실할 수 밖에 없었다.

“앞으로 슈퍼마켓들은 고객이 구매한 제품을 표시하기 위해 펀치카드로 구멍을 뚫게 될 것이다.”

이 막연한 착상은 1932년 월라스 플린트(Wallace Flint)라는 청년의 석사학위논문의 요점이기도 했다. 그에 따르면 계산대에서 손님은 펀치카드 인식기(reader)에 카드를 집어 넣고 기계를 작동시킨 후 구매된 상품이 컨베이어에 실려 그들에게 가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리고 가게 운영자는 손님들이 구매한 것이 무엇인지 기록하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유통업계에 이런 합리적 체크아웃 자동화의 대안으로 떠오른 것으 펀치카드시스템이었다. 1890년 대에 홀러리스가 발명한 이 시스템은 1930년대에 미국 인구센서스에 사용되면서 그 성능을 과시한 바 있다. 그런 만큼 많은 이들의 희망을 모은 연구대상이었지만 결론은 아니었다.

문제는 당시의 카드리더 장비가 엄청나게 크고 다루기 힘든데다가 말할 수 없이 비싸다는 것이 문제였다. 대공황ㅁ이 아니었더라도 플린트의 계획은 비현실적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다가올 미래에 대한 암시를 던져주고 있었다.

그 논문과 별개로, 마치 운명에 이끌리듯 우연히 뭔가 편리한 유통방식에 대해 벼락같이 생각을 떠올린 인물이 버나드 실버와 그의 친구인 노먼 조지프 우드랜드였다.

3■‘황소의 눈’ 같은 부호를 만들다

막연하지만 좀더 생각해 보면 뭔가 개발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우드랜드는 자신의 주식투자 수익을 모두 찾았다. 그리고 드렉셀대를 떠나 할아버지가 계시는 플로리다 아파트로 가서 골똘히 연구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우드랜드는 비치 의자에서 마이애미 해안을 보며 앉아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필요한 일인가? 그렇다면 먼저 할 일은 일종의 코드부터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내가 아는 유일한 코드는 어릴 때 보이스카웃에서 배운 모스코드(Morse Code)지.

수개월 간 고민 하던 어느날 우드랜드는 자신의 손가락 4개를 모래에 내려놓고 당겼다. 그리고 그 위로 4개의 고랑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래, 이거야. 와우!”

그는 자신이 4개의 선으로 된 부호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949년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사우스 비치. 우드랜드가 착안한 최초의 바코드는 고향 플로리다 해변의 모래 백사장 위에 그려졌다.

“이젠 자외선 잉크를 사용한 시스템을 만들어 봐야겠어.”

이들은 이 아이디어를 적용하기 위해 잉크의 패턴을 만들고, 자외선 빛 아래서 빛나게 하는 방식의 유통자동화 시스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제 실버와 우드랜드는 제품에 이 부호를 인쇄해 읽어들일 시스템, 즉 바코드 스캐너에 대한 착상에도 들어갔다.

그는 발명가 리 드 포레스트가 1920년대에 만든 영화에서 사용되는 광사운드트랙 시스템을 사용하기로 했다. 리 드포레스트는 변화하는 소리의 정도를 사운드트랙으로 표현하기 위해 필름 한쪽 끝에 잉크로 소리의 정도에 따라 투명도를 달리하는 패턴을 인쇄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었다.

영화 상영 중 500W 백열등을 사용하는 영사기 불빛은 필름을 뚫고 다른 쪽에 있는 예민한 진공관을 뚫고 지나가게 돼 있었다.

영사기용 센서인 RCA935 포토멀티플라이어 진공관은 빛의 밝기를 감지해 그 세기에 따라 이를 전기적인 파동으로 바꾸어 주었다.

그러면 이 신호는 확성기로 전달돼 관객들에게 영화대사를 들려 주었다.

우드랜드는 이 시스템에서 이용되는 빛 분석 방식을 이용, 자신이 개발한 넓고 좁은 흑백 띠로 된 코드를 반사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드랜드는 자신이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고 확신했다. 그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드렉셀 대학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특허출원 작업을 시작했다.

처음에 선형 바코드를 떠올렸던 그는 양궁과녁처럼 생긴 이른 바 ‘황소의 눈(Bull's eue)' 형태로 바코드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어느 방향에서든 바코드 스캐너로 읽힐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착안이었다.

1949년 10월 20일. 두 사람은 ‘분류하는 기구와 방법(Classifying Appratus and Mehtod)‘라는 이름으로 특허를 출원했다. 제출서류에는 ”중앙에 원을 가진, 빛을 반사하는 외부로 향하는 선과 내부의 보조라인을 가진 상품분류를 위한 장비 기술과 그 방법“이라고 설명돼 있었다.

3년 후인 1952년 10월 7일. 이들은 미특허 2,612,994호를 확보하기에 이른다.

4■종이에 인쇄된 부호를 전자적으로 읽어내는 데 성공하다

1951년. 우드랜드는 IBM에 입사했다. 이 회사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열매맺게 해 줄 것이라는 생각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그 이듬 해. 뉴욕 빙햄턴에 있는 우드랜드의 집 거실에서 버나드 실버는 최초의 실질적인 바코드리더(바코드스캐너)를 고안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이 바코드리더는 책상만한 크기의 것으로서 주변 빛을 배제시킬 수 있도록 검은 오일천으로 싸여 있었다. 이 책상 아래에 있는 500W짜리 백열등이 광원으로, 그리고 영화 필름에 찍혀져 있는 소리부호를 읽어내 스피커를 통해 소리로 전달시켜 주는 진공관을 바코드 스캐너(리더)로 각각 사용했다.

이 RCA사의 포토멀티플라이어 진공관은 가시광선은 물론 자외선과 근 적외선까지도 읽어들이는 진공관 센서였다. 당시 적외선 잉크로 만들어진 황소의 눈을 감지하는 데는 최적의 기기였다.

우드랜드는 이 진공관을 오실로스코프 화면에 연결시켰다. 그리고는 바코드가 찍힌 종이를 광원의 강력한 얇은 한줄기 빛쪽으로 움직였다. 반사된 빛은 되튀어 진공관을 향했고 바코드를 읽어내 화면에 비춰주었다.

“됐다.”바코드가 스캐너를 지나가자 진공관과 연결된 오실로스코프 화면의 파형이춤추듯 솟아 올랐다. 어쨌거나 우드랜드는 이 뜨거운 광원을 집중적으로 사용해 원하는 대로 바코드리더로 황소의 눈을 읽어내게 할 수 있었다.

실험과정에서는 때때로 이 500W 백열등이 바코드가 찍힌 종이를 그을려버리곤 했다. 아직 효율적인 레이저같은 광원이 등장하려면 10년 이상 더 기다려야 했다. 우드랜드와 실버는 날아갈 듯한 기분이 됐다.

1952년은 두사람이 인류최초로 종이에 인쇄된 프린트물을 전자적으로 읽어내는데 성공한 해가 됐다.

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컴퓨터들은 모두가 연구소와 대학에 있는 대형시스템들 밖에 없었고 그나마 모두 펀치카드를 사용하는 프로그래밍 방식이었다.

실버와 우드랜드는 과연 슈퍼마켓에서 이 기술이 사용될 때 시장성이 있을지를 두고 또다시 고민에 빠져 들었다. 두 사람의 자외선으로 만든 잉크시스템과 바코드스캐너시스템은 잉크가 너무 쉽게 지워지는데다, 아주 비쌌다. 게다가 이러한 장치를 간편한 크기의 시스템으로 바꾸기도 쉽지 않았다.

“제 바코드 기술이 과연 시장성있는 기술인지 검증했으면 합니다.”

1950년대 말이 되자 IBM이 우드랜드의 제안에 따라 이 시스템의 시장성을 알아보기 위해 외부용역을 맡겼다.

컨설턴트는 “이 바코드시스템이 장래에는 엄청난 시장성을 갖고 있습니다”라는 보고서를 가져왔다.

하지만 IBM고위층의 생각은 달랐다.

“우리는 5년내에 상품화될 제품을 필요로 합니다.”

이제 1969년까지로 돼 있는 우드랜드와 실버는의 17년짜리 특허권 보유기한이 절반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두사람의 마음이 급해졌다.

IBM은 5년내 상품화불가 판단 속에서도 그 가능성에 끌려 이들에게 여러번 특허구매를 제안해 왔다. 하지만 우드랜드와 실버는 번번히 거절했다. 그들이 생각한 시장잠재력과 비교할 때 인수 제안 가격이 터무니 없이 낮았다.

“미스터 우드랜드, 우리가 당신들의 특허를 사겠소.”

1962년 당시 최고의 TV제조업체 RCA와 쌍벽을 이루며 TV 및 진공관 생산으로 명성을 높이고 있던 필코가 특허인수를 제안해 왔고 특허는 매각됐다. 이어 필코는 이 특허를 같은 해에 RCA에게 재매각했다. 불행히도 이 해 실버는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그로부터 4년후인 1966년. RCA는 자신의 손안에 들어온 ‘황소의 눈’이 유통계에서 통용될 경우 엄청난 파급력을 가져올 특허가 될 수 있음을 깨닫기 시작한다.

1971년이 되자 RCA는 자신의 손에 들어온 이 보물을 이용해 미국의 전 제조업체의 유통방식을 흔들 결심을 하게 된다.

5■바코드에 눈뜬 또다른 선구자, 콜린스

바코드와 비슷한 부호를 이용해 유통방식을 개선하려는 사람들은 우드랜드와 실버만이 아니었다.

“부호화된 라벨을 사용하면 쉽고 빠르게 화물열차들의 정보를 관리할 수 있겠어.”

1959년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졸업해 철도화물회사 실베이니아에 입사한 데이비드 J 콜린스란 청년이 회사를 위해 바코드의 원형이라 할 만한 또다른 아이디어를 냈다.

그는 1960년대 미국 철도업계의 최대 골칫거리였던 화물열차의 소유자와 차량 정보를 손쉽게 파악해 편리하게 관리하기 위한 방법을 찾고자 했다.

마치 소떼처럼 미국전역으로 흩어졌다 돌아오곤 하길 반복하는 화물열차 정보 관리는 쉽지 않았다. 어느 게 누구의 화물차량인지 구분해 차량과 화물정보를 정리하는 방법을 내놓아야 했다.

마침 실베이니아코퍼레이션은 미군에 납품한 자사의 컴퓨터를 이용해 군대에서 사용되는 화물열차의 정보를 모으는 작업을 처리하는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하려 하고 있었다.

콜린스에게 요구되는 작업은 이 화물차들의 정보를 검색하는 것이었다. 그는 초보적이고 제한적이나마 자신의 생각을 구체화해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각 화물차 표면에 화물차 소유자를 인식할 수 있는 오렌지색 숫자 4개와, 차량 자체를 인식할 수 있는 파란색숫자 6개의 부호를 부여하는 거야.” 정확히 말하자면 콜린스의 라벨은 바코드가 아니었다. 검은 바나 링 대신에 반사하는 물질로 만들어진 오렌지색과 청색 띠(stripe)를 이용해 0에서 9까지의 숫자를 반사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개념은 초보적이나마 오늘날 사용되는 바코드 및 스캐너 활용방식과 유사했다.

열차가 정거장에 들어오면 컬러 플래시빔으로 반사된 내용을 해석할 수 있었다.

이제 실베이니아의 직원들은 적치장에 있는 화물차량에 가서 색깔이 있는 플래시를 코드에 쬐 코드를 읽어내기만 하면 누구든 화물열차 정보를 인식해 낼 수 있었다. 더 이상 화물차의 소유자나 차량이 운행한 구간과 내용물에 대해 신경쓸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1961년. '보스턴 앤 메인'이란 철도 화물수송회사가 최초로 자갈 화물차에 콜린스의 초보적 바코드를 적용해 실용화 가능성을 확인시켜 주었다.

6년쯤 지나자 미 전역에 산재한 철도화물 회사들이 이 바코드시스템을 도입됐고 철도회사들에겐 이 장비를 사서 편리하게 사용하면 됐다.

콜린스는 결국 미화물열차업계가 겪는 화물열차 데이터 수집 및 관리문제를 해결해 냈다.

“이제 우리는 검은색과 흰색을 사용한 작은 바코드를 만들어 시스템을 향상시켜야 합니다.”

전국적인 성과가 드러난 데 힘을 얻은 콜린스는 상사에게 회사차원의 지원을 제안했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상사의 대답은 냉랭했다.

“회사는 더 이상 투자하길 원치 않네. 우리가 가진 시장만도 이미 충분히 크다네. 지금까지 투자한 걸 가지고 돈을 벌면 되지 않겠나?”

6■컴퓨터아이덴틱스, 최초의 선형 바코드 실용화 물꼬

1967년. 실망한 콜린스는 회사에 사직서를 내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이용해 꿈을 펼칠 컴퓨터아이덴틱스코퍼레이션이라는 회사를 공동창업했다.

콜린스가 회사를 그만두고 나온 이래 실베이니아는 더 이상 철도화물분야에서 이익을 내지 못했다. 실베이니아의 바코드시스템은 '돈만 많이 들고 쓸모는 없는' 이른바 '흰코끼리'로 전락했다.

반면 컴퓨터아이덴틱스는 번창했다. 이 회사는 60년대 후반 상용화에 성공한 레이저를 사용하고 있었다. 콜린스는 기존의 뜨겁기만 한 500W급 백열전구를 밀리와트(mW)급 헬륨네온레이저로 대체한 기술을 사용하고 있었다.

가느다란 광원 띠가 선형 바코드를 지나가면 검은 선에 의해 흡수됐고 흰색 선에 의해서는 반사됐다. 스캐너 센서는 이 바코드 반사에 따른 온/오프 신호를 읽어내도록 설계됐다. 이 결과는 곧 디지털의 기본인 ‘0’과 ‘1’의 2진법 숫자로 전환됐고, 컴퓨터는 이를 인식해 냈다.

레이저스캐너의 등장으로 바코드를 7.cm에서 1.5m 전후의 거리에서도 읽어낼 수 있게 됐다. 게다가 레이저빔은 초당 수백번씩 바코드를 훑고 지나가면서 긁히거나 찢어진 바코드도 읽을 수 있게 해 주었다.

1969년 봄. 아이덴틱스사는 사실상 세계최초의 바코드 인식시스템 실험을 미국의 두 자동차부품 공장에서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첫 번째 시스템은 미시건주 폰티악시에 소재한 GM사의 차축제조공장에 설치됐다. 다른 한 대는 뉴저지주 칼스배드의 제너럴트레이딩컴퍼니 회사의 차량 문짝 출하라인에 적용됐다.

콜린스는 이들 공장에서 생산되는 차량 제조용 부품의 출하시 사용될 바코드시스템을 구축했다. 그는 손으로 바코드 스캐너를 만들었는데 휴지통을 뒤집어서 씌우고 그 주변에 유리섬유를 몰딩한 것이었다. 이 조악한 스캐너는 한번에 바코드 두 자릿수 밖에 읽어내지 못했다

다행히 이 시점에서 GM의 차량 부품도 수제작으로 이뤄지고 있어 바코드로 처리할 양이 많지 않았다. 폰티악은 18종의 차축을, 제너럴 트레이딩은 100개도 안되는 자동차 문짝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컴퓨터아이덴틱스가 바코드시스템을 성공적으로 운영하기 시작했지만 이것은 단지 이 회사의 개별 기업 표준에 불과했다.

전자업계가 컴퓨터를 점점 더 작게 만들어내려 애를 쓰고는 있었지만 PC로 대변되는 컴퓨터의 소형화가 이뤄지려면 아직도 더 기다려야 했다.

7■미 유통업계의 ‘맨해튼프로젝트’ 시동

고객들이 슈퍼마켓 계산대를 나설 때 순식간에 처리해 줄 시스템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콜린스가 한창 자신의 바코드시스템을 전국의 화물열차에 공급하며 기세를 올릴 때 식품유통업계에서는 조용히 유통업계의 혁명을 일으킬 불씨를 키워가고 있었다.

1966년. 미식품유통협회(National Association of Food Chains ·NAFC)모임에 모인 미국굴지의 대형 식품회사들은 더 이상 비합리적인 상품 판매 및 재고관리로는 견디기 어렵다는 공감대를 형성하게 된다.

NAFC는 말하자면 유통업계의 맨해튼 프로젝트를 시작하기로 마음을 굳힌 것이었다.

RCA 경영진은 이 때 유통 자동화의 필요성이 제기됐다는 사실을 알고는 어떻게든 자사의 바코드를 산업계에 적용시켜야 하겠다고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RCA 뿐만이 아니었다. 당시 바코드 시스템과 무관해 보였던 IBM의 한 임원이 이 모임에 참석해 들었던 유통자동화협회의 구상을 회사에 보고했다.

NAFC는 먼저 RCA에게 바코드시스템 상용화를 요청했다. RCA는 자신의 손안에 들어온 ‘황소의 눈’바코드시스템을 확장해 상용화하기 위한 특별연구팀이 꾸려졌다.

“저희에게 제일 먼저 이 시스템을 활용해 볼 기회를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당시 전국적인 유력 유통업체 가운데 하나인 크로거가 RCA 바코드시스템을 적용해 보겠다고 나섰다.

RCA/크로거 시스템으로 불리는 이 최초의 슈퍼마켓용 바코드 및 스캐닝 시스템이 미 신시내티시 크로거 매장에 설치됐고 ‘황소의 눈’으로 표시된 제품 코드를 읽어냈다. 크로거 직원들은 이 시스템상의 바코드를 이용하기 위해서 제품에 일일이 라벨을 붙여야만 했다. RCA는 말하자면 유통업계의 맨해튼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이었다.

하지만 식품유통업계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이른 바 RCA/크로거 코드는 18개월 만에 실패라는 판정을 받고 물러났다.

이후 NAFC는 '모든 제조업체들이 사용할 수 있는 새로운 열린 코드 표준체계'를 목표로 바코드 인식 시스템 만들기에 나섰다. 목적은 계산대의 계산속도를 빠르게 하고, 그 절약효과를 고객들에게 돌려주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면 산업계 전반에서 사용할 수 있는 바코드를 만들 수 있을까?

1970년 여름 NAFC는 통합제품유통코드(Uniform Grocery Products Identification Code· UGPIC)를 만들 미슈퍼마켓코드임시위원회(U.S. Supermarket Ad Hoc Committee)를 구성했다.

초기 모임의 위원으로는 하인츠의 버트 쿠킨 사장, 제너럴 푸드의 아트 라르킨 CEO와 밥 스트링어 유통담당부사장, 크로거의 밥 애더스 부회장과 잭 스트러브 부사장,제너럴 밀스의 JP 맥팔랜드 CEO,톰 넬슨 컨트롤러 담당 부사장, 어소시에이티드 푸드스토어의 돈 로이드 사장, 페어몬트 푸드의 고든 엘리스 사장, 브리스톨 마이어스의 개빈 맥베인 이사회의장, 프레드 버틀러 운영담당 부사장, A&P의 WJ 케인 사장, 매드슨 엔터프라이즈의 얼 매드슨 사장, 슈퍼 발루 스토어의 제임스 와이먼 사장 등 미국 유수의 유통업체들이 총 망라됐다.

8■UPC 바코드 12자리 표준의 물꼬를 트다

1970년 NAFC는 맥킨지의 용역보고서 결과에 따라 식품유통업계 대표협회 관계자로 구성된 UGPCC(Uniform Grocery Product Code Council)와 함께 제품 인식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한 숫자 포맷 결정 작업에 나선다.

UGPCC는 이 유통자동화 코드를 만들기 위해 많은 업체들에게 요청서를 발송했다.

이 가운데는 싱어,내셔설캐쉬레지스터(NCR),리튼 인터스트리즈,RCA,피트니 보위,IBM 등 많은 대기업과 중소기업들이 포함돼 있었다.

바코드와 스캐너를 이용한 유통자동화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이 해에 컴퓨터아이덴틱스가 디지털PDP8 컴퓨터를 이용해 세계최초의 실시간 스캐너 기술을 개발해 적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세계를 지배하던 컴퓨터의 제왕 IBM만은 유통자동화를 위한 장비를 갖고 있지 않았다. 대다수 업체가 이미 시장에 자사 고유의 광코드와 스캐닝장비를 출시하고 있었고 이를 손봐서 수정해 공급할 여지가 있었던 것과는 사뭇 사정이 달랐다.

IBM의 마케팅 전문가 알렉 재블로노버(Alec Jablonover)는 자사에 우드랜드가 만든 황소의 눈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냈다. 1969년 우드랜드의 특허권 기한이 만료된 후 이 특허는 IBM 노스캐롤라이나에 귀속돼 있었다. 곧 사내 설계팀에 최적의 유통자동화를 위한 코드를 설계해 달라는 경영진의 지시가 떨어졌다.상당한 시간을 고민한 로럴은 2명의 엔지니어와 함께 이론적으로 신뢰성을 계산하고는 IBM의 공식 제안서를 업계에 제출한다. 조지 로럴이 IBM을 통해 위원회에 제출한 것은 노먼 조지프 우드랜드와 버나드 실버가 만든 바코드 컨셉트를 확장한 것으로서 모스부호를 위아래로 늘린 선형 바코드였다.

그의 팀은 초기에 3가지 제안을 갖고 위원회의 요구에 접근했다. 각각의 설계는 제안 요구사항을 충족시키되 약간씩 변형한 것이었다. 하나는 11개 숫자를 스캐닝할 수 있었고 또하나는 제로서프레스(zero-suressed)버전이었다.

UGPCC는 모든 참가자들에게 자신들의 장비를 시연해 줄 것을 요구했다. 평가는 바텔기념연구소(Batellee Memorial Institute)가 맡았다.

이듬 해 여름, 드디어 만능유통제품인식코드(Universal Grocery Products Identification Code UGPIC)의 첫부분과 두 번째 부분이 만들어졌다.

조지 로럴의 UPC를 전국적인 바코드 유통시스템의 표준으로 선정합니다.

1973년 4월 3일 UGCC 임시위원회는 조지 로럴의 12자리로 된 바코드를 기초로 해 이후 지속적으로 사용될 UPC심볼에 대해 표준으로 확정한다고 발표했다.

UGPCC가 수정을 요구한 것은 바코드에서 사람이 읽을 수 있는 폰트타입과 잉크규격 정도였다.

로럴이 제안한 표준은 12개 숫자를 가지고 있었다. 11개는 UGPCC의 요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이 요구가 수용됐는지를 컴퓨터에서 확인하기 위한 숫자였다.

UPC는 이제 앞부분의 6자리는 제조공장 정보, 뒷부분 6자리는 제품정보였다.

“바코드 수정이나 스캐닝 장비의 변경없이 숫자부호 하나를 추가해 주시오.”

UPCC는 합격 통보와 함께 제조국을 표시해 UPC를 전세계적 표준으로 만들 13번째 숫자를 요구했다.

로럴은 또다시 이 요구를 수용해 이른 바 EAN시스템(European Article Numbering system)을 만들었다. 이제 전세계 많은 국가의 스캐닝시스템이 이 13번째 숫자, 즉 바코드 맨앞에 있는 숫자를 자국의 국기를 인식하는 번호로서 인식하게 됐다.

로럴의 바코드는 스캐너의 힘을 빌지 않고 맨눈으로도 읽을 수 있는 것이었다.

바코드는 4가지, 즉 ▲‘공간’을 의미하는 좁은 흰색 공간 ▲‘-(dash)'를 의미하는 넓은 흰색공간 ▲’0‘을 의미하는 좁은 검은색 막대(bar) ▲’1‘을 의미하는 ,넓은 검은 색 막대 등으로 구성돼 있다.

따라서 0에서 9까지의 숫자를 바코드로 표시한다면 다음과 같이 된다.

즉 0= 00-110, 1= 10-001, 2= 01-001, 3= 11-000, 4= 00-101, 5= 10-100, 6= 01-100, 7= 00-011, 8= 10-010, 9= 01-010 등이었다.

바코드 소위원회를 이끌었던 앨런 하버만(Alan Haberman) 퍼스트내셔널 스토어 사장은 후일 이렇게 회고 했다.

“우리는 이것이 대규모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지요. 이 협력은 반독점문제와 연계되지 않고도 공공의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업은 정부가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필요도 없었지요.”

황소의 눈 바코드를 만든 우드랜드가 여전히 IBM에 재직하고 있었지만 이후 현대 바코드의 아버지로 숭앙받기 시작한 사람은 조지 로럴이었다.

바코드 시스템 도입이 관련 예산을 2~10% 줄일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되면서 제조업체들의 바코드 도입은 앞다퉈 이뤄지기 시작했다.

9■UPC 발명자 조지 로럴, 유통혁명 확산에 나서다

도처에서 제품에 바코드를 적용하려는 시도는 이뤄지고 있었어요.”

자신의 바코드가 등장한 지 30년이 지난 2004년 로럴은 당시를 그렇게 회고했다.

로럴(Laurer)은 막 확산되기 시작한 제조업체와 유통업체들의 움직임에 환호했다.

이제 전세계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통용될 표준 바코드 UPC를 사용하고 싶은 제조업자와 유통업체는 UPC코드 또는 EAN-13바코드 표준에 따라 이를 활용할 수 있었다.

이들은 기꺼이 통일코드위원회(Uniform Code Council · UCC)의 판단에 따라 바코드 10만 단위당 1천달러를 지불했다. 게다가 각 제조업체는 바코드를 계속해서 사용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연회비도 지불해야 했지만 누구도 이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다.

하지만 중소기업에게는 장벽이 존재했다. 한 두 개 제품만을 생산하고 있는 경제의 중추인 중소기업들의 경우 더욱더 UPC바코드를 이용한 유통물류 효율화가 절실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원래 바코드는 제너럴 푸드같은 엄청난 물량을 쏟아내는 거대한 회사에 초점을 두어 만들어진 것이였다. 그래야만 제품당 사용되는 바코드단가를 떨어뜨릴 수 있었다.

하지만 경제가 위험한 상황에서 일자리 창출을 위해 중소기업에 의존하게 될 때 이 바코드 가격은 너무 비쌌다. 중동전쟁 발발에 따른 산유국의 석유가격 금수조치 및 뒤이은 인상조치로 전세게 경제상황은 급격히 악화됐다.

그럼에도 전통적인 오픈마켓 스타일의 시장에서 바코드를 소싱할 수 있는 방식이 점차 활발해져갔다. 10만개 단위의 바코드를 산 사람은 그들의 사용하지 않는 UPC바코드번호를 중소기업에게 팔곤 했다. 이를 구입한 중소기업은 연회비를 낼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월마트나 크로거,그리고 메이시백화점 같은 대형 유통점들은 중소기업의 UPC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기존 제조업체가 아닌 소형유통업체들이 확보한 UPC번호로 인식되는 제품은 취급하지 않겠습니다.”

이는 대형유통점의 독점적 관행을 지원해 시장에 저가로 보급돼야 할 바코드발행 비용을 크게 부풀리도록 하는 것이었다. 대규모 유통소매상들은 이러한 움직임이 바코드 복제를 막고, 바코드 심볼 기술자체를 평가절하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조지 로럴은 그는 중소기업이 구입한 모든 UPC 바코드를 제품에 적용할 경우 이것이 정당한 코드라는 것을 인증해 줄 사이트를 만들어 중소기업을 돕기로 했다.

이 바코드 인증사이트를 만들면서 중소기업들을 대상으로 한 바코드 표준 인증은 늘어갔고 바코드는 대형 유통업체와 제조업체 외에 중소기업들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바코드는 표준화 시작 초기부터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더 활발하게 이용되기 시작했다.

인증된 UPC등록디렉토리는 UPC코드 획득을 필요로 하는 모든 중소기업들에게 이익을 줄 것이었다.

10■조시 부시 재선을 막은 바코드 스캐너 해프닝

1992년 2월5일. 재선을 노리고 있던 조지 부시 미 대톨영은 마침 플로리다 주 올란도에서 개최되고 있던 전국유통협회(National Grocers Association)행사장을 방문해 지지를 호소하고 있었다. 부시가 방문한 이유는 NCR 바코드스캐너를 사용해 보고 격려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의 방문은 오히려 재선가도를 달리는 그의 표를 깎아 먹는 일이 돼 버렸다.

뉴욕타임스 앤드루 로젠탈 기자는 부시가 처음으로 이 스캐너 시스템을 접한 내용의 기사를 쓰면서 그가 얼마나 미국인의 평균적 일상생활과 동떨어져 있는지를 대변하고 있었다.

그의 기사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오늘 조시부시가 워싱턴에서의 11년 가운데 가장 선택된 맨션에서 현대적인 슈퍼마켓을 만나보려고 나타났다. 전국유통협회 전시홀을 방문하면서 부시는 체크아웃 레인의 목업근처를 오락가락했다. 그는 가짜를 인식하기 위한 전자패드에 자신의 이름을 사인했다....”

“만일 누군가가 와서 조지부시라고 다르게 썼다면 알아낼 수 있나요?”조지 부시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부시는 놀라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밀크 한팩,전구, 캔디 한 상자를 들고 전자스캐너로 들고 갔다. 제품명과 가격이 금전등록기 스크린에 나타났다.

로버트 그레이엄 NCR이사가 그에게 새로이 개발된 바코드 스캐너 시스템을 보여주고자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부시후보는 여전히 이전에 기본 모델에 관심을 갖고 있기에 그는 기다려야 했다.

부시는 팩우유를 유리창에 건네며 언제 이 가격이 금전등록기에 드러나는지 보고 있었다.

그레이엄 이사는 부사에게 칼로 베어진 바코드도 스캐너로 얼마나 잘 읽히는지를 보여주려고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부시는 캔디 한 상자를 스캐너로 옮기면서 물었다.

이것으로 계산이 끝난 것입니까?”

또다시 그의 얼굴에 놀랍다는 듯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레이엄이사는 부시에게 새로운 스캐너를 보여주려했으나 그는 기존 스캐너에 너무나도 몰두하고 있었다

이튿날 신문에는 “기술에 놀랐어요(Amazed by some of the technology)라는 제목으로 조지 부시가 바코드스캐너를 보면서 놀라는 사진을 싣고 있었다. 그리고 이 날 행사는 그가 바코드시스템을 처음 본 것이라는 조롱조의 기사가 함께 게재되고 있었다.

논란이 확산되자 말린 피츠워터 백악관 대변인이 나섰다.

“대통령이 1년여 전에 케네벙크포트에서 부시가 식료품점에 간 적이 있습니다.”

뉴욕타임스 편집진은 즉각 부시의 놀라움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그가 이전까지 미국 보통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접해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비난했다.

보스톤 글로브는 “대통령부시는 그가 부통령이 된 1980년 슈퍼마켓에 바코드스캐너가 본격 도입됐고, 많은 사람들의 일상의 모습이 됐지만 부시에게는 놀라움이었다”고 비꼬았다. 그는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받았다.

사실 로젠탈기자는 그날 현장에 있지도 않았다.

풀(pool) 기사를 담당하는 그레그 맥도널드 휴스톤 크로니클사 기사는 부시가 놀라 하는 모습'이 그의 얼굴에 있었으며 자신의 글에서는 이 대회에서 별로 언급할 만한 것이 없다고 썼다. 심지어 “부시는 놀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까지 지적했다. 이 행사에서 새로이 등장한 스캐너는 무게를 달고 망가지거나 찢어진 바코드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뉴욕타임스는 당시 행사장에서 촬영한 부시의 비디오를 보고는 로젠탈 기자를 변호했다.

비디오는 일반 스캐너와 새로 유행하는 스캐너를 동시에 부시에게 보여주었음을 드러냈다. 그리고 부시는 분명히 일반 스캐너에도 익숙하지 않았고 거기에 인상을 받은 모습을 보였음이 분명하다는 게 그의 이유다.

부시의 재선 실패가 반드시 이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이 뉴스는 전국적인 화제가 되면서 그의 재선을 막았던 결정적 실수중 하나로 회자되고 있다.

이렇게 널리 보급되면서 유통혁명을 가져다 준 바코드시스템이지만 때론 심심찮게 범죄수단에 악용되는 모습이 불거지기도 한다.

11■유통업계 혁신, 바코드 혁명의 그늘

‘팰러앨토 SAP부사장, 레고블록 바코드 위조로 체포되다.(VP of Palo Alto's SAP Arrested in LEGO Bar Code Scam)’

2012년 5월 24일. 미 NBC뉴스는 실리콘밸리 소식을 전하면서 이같은 제목으로 실리콘밸리 IT업체 부사장의 바코드 위조 사기사건을 보도했다.

토머스 랑겐바흐라는 이 47세의 남자는 4월 26일 오후 2시7분 마운틴뷰시의 타겟 매장에서 범죄를 저질렀다. 그는 레고블록 박스를 고르면서 자신이 만든 가짜 바코드를 바꿔치기해 붙여 물건을 가지고 나오다가 들켰다. 보안요원은 폐쇄회로카메라(CCTV)로 그가 위조된 바코드 교체현장을 감시하고 있었고 현장기록은 디지털영상저장장치(DVR)에 생생히 담겨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가 세계적 SW업체인 독일 SAP의 실리콘밸리 팰러앨토 연구소및 통합인증센터 부사장이었다는 점이었다.

신디 실리 헨드릭스 산타클라라시 검사는 “IT전문가가 이런 짓을 한 것은 드문 일이다. 이런 짓을 한 것은 돈때문이기도 하지만 또다른 이유, 즉 재미 때문에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로 유통산업혁명을 가져온 바코드기술의 발상지 미국에서의 바코드사기 범죄는 한두번 발생한 게 아니었다.

2005년 11월에는 포틀랜드 근처에서 윌리엄 스완버그라는 사내가 체포된다. 그는 이전. 3년 동안 미국 서부의 수십개 매장에서 조립 장난감인 레고 60만달러어치를 훔친 혐의로 체포됐다. 그는 바코드를 조작해 100달러짜리 레고를 19달러에 사는 식으로 도둑질을 했다. 이렇게 해서 값싸게 구입한 레고를 인터넷에서 되팔아 이익을 챙겼다.

전년도인 2004년 6월. 토머스 웨스트 우드와 그의 아내, 장모 등 일가족 3명이 할인점 타겟 스토어의 바코드 조작에 가담했다가 들통나기도 했다. 이들은 컴퓨터를 사용해 상대적으로 값싼 바코드를 스캔한 후 이들의 복사본을 인쇄출력했다. 그리고 나서 비싼 다이슨 진공청소기, DVD플레이어,휴대폰 등에 바코드를 붙였다. 계산원은 이들이 계산대에 올린 제품을 그대로 바코드스캐너로 스캔해 대금을 계산하도록 하는 실수를 했다.

바코드는 사실 암호화(Encryption)가 아닌 부호화(Encoding)여서 허술한 틈을 노릴 만한 여지를 남기고 있다. 즉, 부호화는 하나의 정보를 다른 정보의 부호로 표시하는 과정으로서 맨눈으로도 규칙만 알면 누구나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암호화는 패스워드를 이용해 정보를 숨기도록 돼 있어 아무나 읽을 수가 없다.

스완버그를 기소한 워싱턴시의 제프 레소우스키검사는 “이런 새로운 방식을 사용하면 유통소매업체들이 대규모로 도둑질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힘들다. 그래서 이런 도둑들을 잡는데 상다잏 긴 시간이 걸린다”며 첨단기술 확산의 그늘을 설명했다.

지난 2006년 10월25일 매장도둑들 첨단기술 사용에 유통업계 손실 증가(As Shoplifters Use High-Tech Scams, Retail Losses Rise)라는 제하의 기사가 월스트리트저널에 등장했다.

기사를 쓴 앤 짐버맨 월스트리트기자는 “IT가 유통산업을 보다 효율적이고 생산적으로 만들면서 커다란 성장을 가져왔지만 이는 또한 유통산업에 대한 범죄방식까지도 바꾸었다”고 말했다.

12■바코드 전세계를 스캐닝하다

40년 가까이 지난 현재 전세계에서는 하루에 수십억번의 바코드 스캐닝이 이뤄지고 있다.

많은 다른 선구적인 인물과 회사가 수십년간 이 놀라운 기술에 기여를 하면서 기술의 진화를 이끌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가지는 분명히 드러났다. 그것은 효율성의 경제를 이끌었다는 점이었다. 에러율은 키보드 1000회에 10회, OCR스캐닝시 1만번입력에 한번, 바코드는 300만번에 1회, 레이저기술 도입후 7천만 입력에 한번의 실수가 기록된다.

초기에 바코드혁명에 관여된 사람들은 바코드가 새로운 비즈니스 방식을 전세계에 가져다 주었다고 말한다.

UPC제정시 위원장을 맡았던 하버만(Haberman)은 이것은 미국식으로 일이 되게끔 한 대표적 성공사례“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자신의 구상을 판매되도록 하고 전세계가 참여하게 했다. 이것은 많은 비전을 가진 작은 친구들에 대해 언급할 만한 것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또 “우리가 먼저 구상해 스스로 그것을 떠맡고 전세계가 참여하도록 만들었다”고 자부심을 펴보였다.

오늘날 UPC는 270개 가량되는 바코드 표준가운데 가장 널리 사용되는 표준이 되었다.

하지만 스마트폰이 확산되고 있는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새로운 QR코드라는 새로운 인식시스템이 급격히 바코드를 대체해 가고 있다.

1994년. 일본 도요타 부품자회사인 덴소웨이브가 차량 부품 추적을 위해 1차원 바코드에 이어 2차원 방식의 매트릭스 타입의 QR(QuickResponse)코드를 등장시켰다.

바코드보다 더많은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코드는 이제 전세계에서 누구나가 스마트폰 카메라를 이용해 웹사이트 URL정보를 읽을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숫자로는 7,089자, 영어로는 4,296자,바이너리로는 2,953비트, 한자로는 1,817자까지 사용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2012년 2월 10일 뉴욕타임스는 미체 딘이라는 신부가 자신의 결혼식 초청장에 스마트폰으로 볼 수 있는 QR코드를 인쇄해 보낸 일을 화제로 소개했다. 이 QR코드는 이를 받는 사람에게 스마트폰 캘린더에 자동적으로 웹사이트가 덧붙여지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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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