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벨연구소 이야기...현대문명의 산실

일반입력 :2012/07/12 07:01

이재구 기자

존 거트너 지음, 정향 옮김, 살림비즈, 488쪽.2만5000원

벨랩(Bell Lab)으로도 불리는 벨연구소는 유선전화 발명자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1847~1922)이 설립한 AT&T의 자회사다. 80년대 중반까지 세계최고의 연구소라는 명성을 누렸지만 전성기를 보낸 게 사실이다. 이 책은 벨연구소 전성기의 비밀을 분석, 말 그대로 온고지신(溫故之新), 즉 옛것을 통해 새로움을 찾는 방식으로 교훈을 제공한다.

벨연구소를 읽는 시각에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 과거의 영광을 이해하면서 성공요인을 읽어내는 것이 그 하나다. 다른 하나는 ‘아이디어 산실’이라는 부러움을 사던 위대한 연구소가 어떻게 빛을 잃게 됐는지를 보고 이를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 경계하는 것이다.

우선 과거의 영광을 따라가 보자.

트랜지스터의 발명이 이뤄진 곳이란 점에서 벨연구소는 현대문명의 산실이라 할 수 있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가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면 가장 먼저 가보고 싶다고 벨연구소를 꼽은 이유는 벨연구소가 바로 트랜지스터 발명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벨연구소 연구원들이 개발한 트랜지스터는 1947년 세계최초로 만들어진 후 6년 만에 커다란 진공관 전축을 와이셔츠 주머니 속 라디오로 줄여내는 마술을 부렸다. 70년대까지 모든 진공관TV와 전자기기가 트랜지스터의 주문에 걸렸다. 최초의 무선 장거리 통신기술, 세계 첫 TV방송위성 텔스타도 만들었다. 바코드의 원천기술인 레이저로 위성통신신호를 빠르게 보내는 기술도 개발됐다. 소니가 상용화한 디지털카메라용 반도체인 고체촬상소자(CCD)나 최초의 실용적인 태양전지를 만들어 낸 곳도 벨연구소다.

저자는 벨연구소가 이처럼 인류문명사에 영향을 끼친 엄청난 양의 중요한 발명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일견 고지식해 보이는 공동연구의 원칙, 연구소장의 강력한 리더십, 그리고 연구원에 대한 최고의 대우가 있었다는 데 주목한다.벨연구소의 전통인 특허공유 등 공동연구의 원칙은 연구소 내에서 생겨난 모든 아이디어를 고스란히 남게 했고, 특허 출원의 기초가 됐다. AT&T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기업으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지만 정작 회사에 필요한 혁신적 기술개발을 위해서는 독불장군 천재들의 독점욕을 다스려 나갔다.

두 번째 교훈은 저자가 소개하는 이 거대한 아이디어공장의 쇠락 배경을 통해 읽힌다.

저자가 살펴본 벨연구소의 후반부는 ‘영광이 지나간 후’로 요약될 수 있다.

이에 해당하는 대표적 기업으로는 RCA를 꼽을 수 있다. 미국 무선통신 도입기이자 초기 진공관 시대인 1900년대 초부터 대활약을 보이다. 1970년대에 갑자기 스러져 갔다. 전자가 아닌 비전공 분야로 문어발식 사업확장을 하던 결과였다.

AT&T는 어떠했을까? 저자는 간단하게 소개하고 있지만 벨연구소의 적은 인터넷 바람이었다. (그리고 이를 적시에 소화하지 못하고 닷컴버블에 허우적거린 내부의 적도 함께 했다.)

벨연구소 전성기의 성과물은 크게 보면 주력사업인 통신을 더 잘할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나온 성과물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엔가 전자산업계의‘게임의 법칙’인터넷과 웹중심으로 바뀌었다. 벨연구소는 이를 정확히 예감지하지 못했다.

타이밍과 사업 운 역시 실력이라면 실력이랄 수 있다. 50년 이상 빛나는 혁신적 발명의 전통을 자랑해 온 AT&T조차도 90년대 중반 불어온 인터넷혁명의 바람을 이겨내지 못했다. 인터넷 혁명은 강했고 웹혁명의 여파는 닷컴버블붕괴와 함께 AT&T의 자회사(웨스턴디지털과 벨랩)를 크게 흔들었다.

묘한 것은 이 흐름을 이론적으로 예고하고 예언한 사람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 책에 소개된 그는 전자통신의 서막을 연 인물이자 디지털의 아버지로 불리는 클로드 섀넌이었다. 그는 예를 들어 어떻게 하면 상당히 많은 양의 전화통화를 한개의 전화선으로 보낼 수 있는지에 대해 자신의 이른 바 '정보이론'을 통해 밝히고 있었다. 그것은 IT에서 사용되는 이진숫자(Bininary Digit)라는 용어를 만들어 낸 인물이다. 하지만 그 이론의 수혜자는 AT&T가 아닌 인텔과 IBM이었다.

비유하자면 AT&T는 결과적으로 그리스신화 속 그리스군 트로이목마를 성문으로 들이면 안된다는 카싼드라를 물리친 트로이왕처럼 섀넌의 예언을 흘려 들은 셈이 됐다. (물론 섀넌은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받아들여야 할 대상인 정보이론을 AT&T에 제시했다.)

이미 1960년대 초 미 서부에서 시작된 미약한 인터넷 초기 기술 혁명에 눈뜨지 못한 벨연구소는 닷컴시대를 맞아 급작스레 무너졌다. 보통 30~40년 앞을 바라보고 계획하던 벨 연구소가 불과 3~4년 사이에 수명을 다할 제품을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은 비할 바 없는 어려움이었다.

존 거트너는 좋은 아이디어가 아니라 좋은 문제를 찾아라 더 좋거나, 더 싸거나, 둘 다거나를 강조한 벨 연구소 전통을 눈여겨 볼 것을 주문한다. 또 벨연구소의 성공비결으로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기업 AT&T의 독점적 지배력을 꼽고 있다. 기업이 시장지배력을 가졌을 때 강력했던 연구원들은 모기업이 흔들리자 따라서 떠났다.

저자는 80년대까지 세상에서 가장 강력했던 벨연구소의 배경에는 연구소장의 노력한 관리능력, 연구원에 대한 최고 대우가 빠지지 않고 있었음도 밝혀내고 있다.

인터넷 벤처기업들의 거센 파도에 밀려난 가운데 영광을 되살리려 절치부심하고 있는 벨연구소 부흥의 열쇠는 텔스타 위성을 개발한 존 피어스에게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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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더 좋은 것이나 더 싼 것, 또는 둘 모두는 혁신이란 목표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한가지 방법이다. 통신에서 실제로 중요한 한가지는 통신이 인간에게 얼마나 유용하게 사용되느냐 이다. 새로운 장치나 신기술은 실용적이고 새로운 좋은 것을 만들거나 에저의좋은 것이 더 싸지거나 더 나아갈 때만 중요하다”고 말했다.

20세기 전자문명을 연 '벨 연구소 이야기'가 반도체 문명을 연 주인공 이야기라면, 구글이야기는 포스트PC시대를 지향하는 선두주자 애플이란 기업 문화의 비밀을 소개한 책 '인사이드애플'(청림출판사 간)도 함께 읽을 볼 만 하다. 이 두 책의 중간 쯤 있는 책이 ‘구글드-우리가 알던 세상의 종말’(타임비즈 간)이다. 디지털세상의 지배자 칩(바다출판사 간)은 항렬상 벨연구소이야기와 같은 항렬에 놓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