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프레너미…적이면서 동지인 '그들'

일반입력 :2012/07/07 12:39    수정: 2012/07/07 18:45

송주영 기자

기업의 세계는 냉정하다. 경쟁은 경쟁, 협력은 협력.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들은 수익을 위해서라면 심지어 경쟁관계에 있는 기업들과도 언제든 손잡을 준비가 돼 있다. 그것이 기업의 생리다.

‘프레너미(Frenemies)’. ‘친구이면서 적’이라는 의미의 이 말은 탈냉전 시대를 상징하는 용어다. 미국, 구소련이 국제질서를 양분하던 냉전 시기.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렸던 양 진영은 냉전이 끝나고 데탕트(긴장완화) 시대가 도래하자 각자의 이익을 계산하며 어제의 적에게 손을 내밀며 친구를 자청했다.

최근에는 IT시장에서 ‘프레너미’라는 말을 자주 접할 수 있다. 삼성과 애플, 삼성과 소니의 관계를 말할 때도 프레너미에 가장 잘 어울린다. 특히 전세계적인 특허침해 법정 소송을 통해 스마트폰, 태블릿 헤게머니 쟁탈전을 벌이고 있는 삼성과 애플은 숙적관계다. 동시에 애플은 삼성의 최대 부품 고객사이기도 하다.

소니도 마찬가지다. TV 시장에서 양사는 경쟁을 하고 있지만 삼성은 소니에 디스플레이를 공급하고 있고 소니도 삼성에 이미징부품 등을 제공하고 있다. 눈을 우리나라로 돌려보면 또 다른 사례를 찾을 수 있다.SK와 삼성이다. SK는 SK하이닉스를 인수하며 삼성과 프레너미 관계가 됐다. SK텔레콤은 삼성전자에게 휴대폰을 공급받고 있다. 삼성전자의 휴대폰, 스마트폰은 SK텔레콤을 통해 출시되고 SK텔레콤이 제품을 잘 팔아줘야 삼성전자의 국내 휴대폰 이익이 올라간다. SK텔레콤 역시 삼성전자로부터 최신 제품을 가장 먼저 받는 이점을 누리고 있다.

서로의 이익을 위해 협업해야 하는 양사의 관계. 그러나 눈을 반도체로 돌려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메모리 업계 1위인 삼성전자, 2위인 SK하이닉스는 경쟁관계다. 특히 최근 모바일 시대를 맞아 급부상하고 있는 모바일D램 시장에서 양사는 애플을 잡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한다. 하지만 태블릿,휴대폰 등을 만드는 삼성전자는 완제품 제작용 메모리가 부족해도 SK하이닉스에게는 단 한번도 주문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애플-삼성, “가깝고도 먼 그들”

애플은 지난해 삼성전자의 가장 큰 고객으로 등극했다. 소니를 제치고 처음으로 삼성전자 부품을 가장 많이 사가는 업체가 됐다. 애플이 삼성으로부터 사들이는 부품은 아이폰, 아이패드에 들어가는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모바일D램, 낸드플래시, 디스플레이 등을 공급받는다.

핵심으로 불리는 애플 부품은 죄다 삼성전자에서 만들어진다. 동시에 양사는 스마트폰, 태블릿 시장에서 디자인, 특허 소송을 벌이고 있다. 지난 2010년 애플은 반도체 시장에서 가장 제품을 많이 사는 업체로 등극했다. 이 시기부터 삼성전자에서 제품을 공급받는 규모도 커졌다.

관련업계에 따르면 올해 애플이 삼성전자로부터 구매할 부품의 규모는 100억달러를 넘어선 것으로 알려졌다. 박영주 우리투자증권 위원은 “애플의 핵심 제품이 스마트 기기인데 모바일 D램, 낸드플래시, 디스플레이 등 애플이 필요로 하는 부품 시장 점유율 1위가 삼성전자”라며 “애플은 삼성전자 제품을 구매하지 않을 수 없고 오히려 구매금액 등에서 속도가 붙을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모바일 D램 분야에서 20나노급 LPDDR3를 양산할 수 있는 유일한 업체가 삼성전자로 알려졌다. 애플은 그만큼 기술력에서 앞선 삼성전자를 결코 버릴 수 없다는 것이 업계의 중론이다.

동시에 양사는 전 세계 법정에서 치열한 특허 싸움을 벌이고 있다. 양사의 특허 공방은 애플이 삼성전자의 최대 고객으로 등극한 지난 해부터 시작됐다. 전 세계 9개국, 40여개 시장에서 소송이 계속되고 있다.

양사의 특허 소송은 스마트폰 1위 시장 자리를 둘러싼 경쟁에서 기인한다. 삼성전자, 애플은 서로 1위 자리를 내주고 다시 빼앗으며 승부를 펼치고 있다. 지난해 3분기 삼성은 처음으로 스마트폰 시장 1위에 올랐으며 4분기에는 다시 아이폰4S를 발표한 애플에 1위 자리를 넘겨줬다.

이후 1분기에는 또 다시 1위 자리를 삼성전자가 가져왔다. 부품 시장 협력사이며 스마트폰 시장 경쟁관계인 삼성전자, 애플은 대표적인 IT 프레너미라 할 수 있다.

소니와 삼성전자도 마찬가지다. 소니는 에쓰엘시디(S-LCD)합작사 지분철수 이후 점차 삼성전자와의 부품 협력 관계가 줄어들 것으로 전망되지만 지난 2010년 소니가 삼성전자로부터 사들였던 부품 구매액은 53억달러를 기록하는 최대 고객사였다.

동시에 삼성전자, 소니는 TV 시장 최대 라이벌이기도 했다. 최근에는 소니가 몰락하며 이제는 삼성전자의 경쟁으로 보기엔 과거에 비해 소니의 위상이 많이 추락했다. 하지만 소니 역시 삼성전자와는 IT 프레너미 관계임을 부인할 수 없다.

■SK-삼성, 하이닉스 인수로 ‘프레너미’

올해 반도체업계에서는 새로운 ‘프레너미’가 탄생했다. 삼성, SK다. SK텔레콤은 삼성전자에게는 고객사다. 갈수록 삼성전자의 무선사업에 대한 비중이 높아지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더욱 그렇다.

동시에 SK하이닉스, 삼성전자는 메모리사업의 경쟁자이기도 하다. 삼성전자는 완제품 분야에서 메모리 공급 부족 사태를 겪어도 타사에 메모리를 절대 주문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SK하이닉스도 그 대상이다.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가 SK하이닉스로부터 메모리를 공급받은 적은 한번도 없다”고 설명한다. 과거 삼성전자가 메모리가 부족해지자 SK하이닉스에 제품을 주문하는 것을 검토한 적은 있지만 검토에서 끝난 것으로 알려졌다.

최태원 회장은 지난 3월 SK하이닉스 출범식에서 삼성전자를 가리켜 “시장 점유율 격차가 많이 나고 부족한 측면도 있지만 앞으로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메모리 시장에서 현재 삼성전자와 맞설 수 있는 업체는 없지만 SK하이닉스가 경쟁력을 키워 도전해보겠다는 의지가 담겼다.

비록 삼성전자로부터 휴대폰을 공급받는 입장이기는 하지만 경쟁도 해보겠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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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IT업계에는 적이자 동지인 관계가 곳곳에 산재해 있다.

PC에서 모바일로 넘어가는 포스트PC시대로 이행하는 과도기. 프레너미들은 경쟁과 함께 서로의 경쟁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협력과정에서 어떤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것인지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