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코 SDN 투자…“오픈플로는 아니다”

일반입력 :2012/04/24 08:12

시스코시스템즈가 소프트웨어정의네트워크(SDN) 솔루션 개발업체에 1억달러를 투자한다고 발표했다. SDN은 네트워크 장비업계의 지각변동을 일으킬 것으로 전망되는 분야다. SDN에 부정적 입장을 취해온 거함 시스코도 대세는 무시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지난 19일(현지시간)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열린 ‘시스코 파트너 서밋2012’에서 시스코는 SDN 솔루션 개발업체인 신생벤처 ‘인시에미(Insieme)에 1억달러를 투자한다고 밝혔다. 향후 7억5천만달러에 인수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하고, 1년내 SDN 솔루션을 선보이고, 데이터센터 네트워크 제품에 결합하겠다는 계획도 언급했다.

여기까지는 시스코가 하드웨어를 벗어나 소프트웨어로 만드는 네트워크에 대대적으로 발을디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외 임원들의 입이나, 문건에 나오는 언급들은 SDN에 명운을 건듯 한 경쟁사와 뚜렷한 온도차이를 느끼게 한다. SDN에서도 시스코는 대세를 따르는 듯 하면서도 홀로 가는 길을 택했다.

■기꺼이 SDN 받아들이지만. 오픈플로는 아니다

시스코는 일단 SDN이 대세란 점은 인정했다. 다양한 인터넷서비스업체(ISP)들이 네트워크업체 종속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게 현실이란 것이다.

그러나 시스코는 경쟁사의 행보와 다른 자세를 취했다. SDN에서 가장 먼저 관심을 끌고 있고, 대다수 경쟁사가 지지하는 오픈플로는 개발하지 않겠다고 밝힌 것이다. 대신 ‘프로그램화 가능한(programable) 네트워크’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게다가 시스코는 SDN에 지극히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기존 네트워크 장비시장을 위협할 잠재력은 있지만 단시간 내 시장을 뒤흔들진 못할 것이라 계산한 듯하다.

공개된 시스코 내부 문건은 “SDN은 이제 막 태동하는 단계이며 아직 정확한 정의를 도출하는데 합의에 도달해야 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파드마스리 워리어 시스코 최고기술책임자(CTO)는 “많은 우리의 동료들이 시스코가 항상 강조했던 네트워크의 전략적 가치를 알아보기 위해 막 시작했다”라며 “SDN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마라톤이다”라고 밝혔다.

워리어 CTO은 “만약 5명의 고객에게 SDN의 의미를 묻는다면, 아마 5개의 다른 대답을 듣게 될 것”이라며 “고객의 (SDN에 대한)동기와 기대는 그들 각자의 사업상 문제나 배포 시나리오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라고 설명했다.

HP, IBM, 브로케이드 등은 SDN 중 오픈플로에 상당한 정성을 쏟고 있다. 오픈플로가 네트워크업계에서 시스코란 거물을 쓰러뜨릴 것이란 희망에 찬 상태다. 반면 시스코는 오픈플로와 선을 그으면서, SDN이란 분야 자체에도 온도차를 보이는 것이다.

SDN은 네트워크업체들이 제공하는 하드웨어의 기능들을 소프트웨어로 구현하는 것이다. 기본적인 패킷경로설정, IP주소할당, 보안설정, 가상화 지원, 멀티태넌시 등의 기능들을 가상화된 SW모듈로 만들어 서버에서 구동한다. 궁극적으로 서버, 스토리지, 네트워크, 보안 등 전체 IT인프라를 하나의 매니지먼트로 통합하고, 자동화하는 것이 목표다.

네트워크 장비는 제조업체마다 중앙처리장치에 다른 ASIC을 사용하며, 운영체제(OS)도 각각이다. 사용자는 라우터, 스위치 등의 공급업체를 복수로 유지할 경우 통일된 정책을 적용하기 어렵고, 각 업체에서 제공하는 기능과 성능에 의존해야 한다. 통합되고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선 벤더종속을 택할 수밖에 없다.

이같은 벤더 종속에서 벗어나 입맛에 맞고 전체 인프라를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방법을 만들자는 시도가 SDN이다.

SDN은 네트워크 장비업체가 갖고 있던 경쟁력을 사라지게 만들 움직임으로 평가된다. 특히 시스코가 가장 큰 타격을 입을 것으로 점쳐진다. SDN이 완성되면 시스코의 하드웨어는 경쟁력을 잃는다. 시스코 하드웨어를 사지 않아도 유사 기능을 SW로 개발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시장의 60% 이상을 점유해온 시스코는 표준화된 기능과 프로토콜 외에 자신들의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독자적으로 개발한 여러 기능과 프로토콜을 제품에 탑재해왔다. 이는 타사 제품과 호환을 불가능하게 하고, 시스코의 시장 장악력을 높이는 강력한 무기였다.

시스코는 SDN 대세론 올라타기의 방법으로 SDN 자체를 시스코 것으로 만드는 걸 택했다. 구글이 SDN을 도입한다면 시스코의 SDN 기술 전체를 이용하게 만들면 된다는 판단이다. SDN의 일종인 오픈플로와 클라우드 관리플랫폼 오픈스택도 연동할 수 있게 하는 최상위 플랫폼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시스코는 문건에서 “SDN의 일종으로 언급되는 오픈플로는 컨트롤과 데이터 플레인을 분리하는 것이지만, 시스코는 이를 초월하는 것을 보고 있다”라고 강조했다.

■SDN vs. 오픈플로, 네트워크업체의 두 흐름

SDN의 일종인 오픈플로는 한 장비안에 통합된 컨트롤과 데이터 플레인을 별도로 분리한다. 장비업체에 관계없이 사용자가 네트워크 통제권을 갖는 표준 프로토콜로서 스탠포드대학과 UC버클리대학에서 개발을 시작했다. 구글, 아마존, AT&T 등 대형 인터넷서비스사업자(ISP)가 개발과 표준화를 주도하고 있다.

HP, IBM, 브로케이드 등은 자사 장비에서 오픈플로를 지원하겠다며 활발히 움직였다.

시스코는 SDN을 프로그램화 가능한 네트워크라 정의했다. 이는 그동안 시스코가 움직였던 방향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시스코는 자사의 장비를 서버, 스토리지 관리콘솔과 각종 자동화툴에 연결할 수 있도록 API를 개방해왔다. 경쟁사들이 네트워크 이외 인프라와 연동되기 어려운 것에 비해 XML 언어로 프로그램을 바꿈으로써 이를 실현했다.

VM웨어, MS, CA테크놀로지 등의 각종 관리도구는 시스코의 네트워크장비를 전체 인프라 차원에서 관리할 수 있다. 이의 연장선에서 작년 12월 시스코는 클라우드버스(CloudVerse)란 클라우드 통합관리 플랫폼을 선보였다.

시스코 클라우드버스는 시스코의 유니파이드 데이터센터, 클라우드 인텔리전트 네트워크, 클라우드 애플리케이션 기술을 접목했다. 유니파이드컴퓨팅시스템(UCS)과 넥서스 유니파이드 패브릭을 활용해 데이터센터 내뿐 아니라, 데이터센터간 IT 자원을 자동으로 프로비저닝하고 유연하게 분배, 확장하도록 한다. 물론 서버, 네트워크 전체를 시스코 것으로 도입해야 한다.

이는 SDN의 방향성 중 효과적이고 쉬운 관리란 철학과 일맥상통한다. 이를 좀 더 개방형으로 바꾼다는 게 시스코의 SDN 전략이다. 이미 갖고 있던 기술을 활용하게 되므로 먼저 완성된 모습을 갖출 수 있고, 오픈플로마저 끌어안으면서 독자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측면도 있다. 시스코가 SDN을 개발한다는 건 결국 하드웨어 판매에서 벗어나는 결말을 예고한다. 그렇다면 현재 보유하고 개발중인 기술을 하드웨어 ASIC에 추가하는 게 아니라 x86 환경에서 돌아가는 독립적인 SW 모듈로 만들어 판매해야 한다. 또, 각종 SW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 하는 방법도 쉽사리 선택할 수 있다.

SDN이나 오픈플로나 모두 기본적으로 오픈소스를 지향한다. 네트워크업체들은 기능을 구현하기 위한 SW모듈을 기꺼이 무료로 제공할 듯을 밝히고 있는데, 이는 구축과 관리, 유지보수 등의 서비스사업 모델을 염두에 둔 움직임이다. 네트워크란 분야가 상당히 까다로운 작업과 전문성, 경험을 요하기 때문에 네트워크전문업체의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많을 것이란 판단에서다.

이는 현재 불고 있는 빅데이터 열풍 속에서 클라우데라, 호튼웍스 등이 취하는 사업모델과 유사하다. 클라우데라나 호튼웍스는 하둡 플랫폼과 각종 모듈을 개발해 무료로 제공하고, 서비스 라이선스를 판매하는 것으로 상당한 매출을 끌어올리고 있다. 하둡 등이 구축, 운영에 상당한 전문성을 요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SDN과 오픈플로 역시 전문지식과 경험을 요구한다.

■SDN과 네트워크, 어떻게 흘러갈까

시스코는 SDN에서 어느 회사보다 다양한 기능 모듈을 빠르고 광범위하게 내놓을 잠재력을 갖고 있다. 20년 넘게 쌓은 기술력과 노하우, 광범위한 채널 파트너를 보유했다.

여기서 시스코가 SDN에 투자하는 방식이 내부 개발이 아니란 점을 상기하자. 이번 투자계획은 시스코 출신 엔지니어 마리오 마조라, 루카 카피에로, 프렘 제인 등 3명이 설립한 벤처 '인시에미(Insieme)'에 대한 투자다. 외부업체가 개발하고 나중에 7억5천만달러에 인수하겠다는 계획이다.

일단 시장 상황을 지켜보자는 의도를 엿보인다. 하드웨어 사업은 유지하면서, 외부에서 소프트웨어 중심의 사업모델을 실험하자는 것이다. 시장성에서 하드웨어보다 인시에미 모델이 고수익성에 가까워지는 시점에 인수하면 상처없는 카니발라이제이션(Cannibalization)이 가능하다는 계산이다.

그러나 외국의 전문가들은 시스코의 전략을 낙관적으로 보지 않는 듯하다. 미국 지디넷 블로거 필 웨인라이트는 “소프트웨어에서 시스코는 성공한 적이 없다”며 “소프트웨어가 세상을 잡아먹고 있고, 시스코는 그 메뉴에 올라와있다”라고 적었다.

그는 2005년에 시스코가 내놨던 XML 하드웨어 수트인 AON(Application Oriented Networking)의 처참한 실패와 웹엑스와 같은 소프트웨어사업 인수합병의 실패 등을 상기시켰다. 시스코는 하드웨어에 소프트웨어를 심는 임베디드 기술은 잘할지 몰라도, 완전한 소프트웨어업체로 변모하기엔 너무 커버렸고, 너무 변화를 두려워하는 조직이 됐다고 그는 지적했다.

관건은 SDN에 대한 시장의 반응에 달렸다. SDN이 빅데이터나 클라우드만큼 파괴력을 갖게 된다면, 시스코의 SDN 대응은 더욱 빠르게 진행될 것이다. 네트워크업체들의 사업모델 자체도 빠르게 변화할 전망이다.

기업들이 클라우드, 빅데이터 등을 도입할 때 자체적인 역량으로 하기 어려워 벤더의 솔루션을 선택하고 지원을 요청하는 모습이 반복된다면, SDN은 네트워크업체에게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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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빅데이터나 클라우드의 난관에 부딪쳐 기업들이 도입을 포기한다면, 기존 네트워크 시장은 유지될 것이다. 시스코는 인시에미를 조직 내로 복귀시키지 않을 것이다. 구글, 아마존 등 대형이면서 고도의 SW역량을 가진 ISP들은 그들만의 세계를 꾸리는데 그칠 것이다.

아직 결론을 단언하긴 이르다. 시스코의 판단처럼 SDN은 이제 태동단계에 불과하다. 일단 한 몸이었던 SDN과 오픈플로는 두개의 진영으로 나누게 될 것으로 보인다. 시스코와 타 네트워크업체, 혹은 서버업체의 구도는 과거 네트워크 프로토콜 표준화 대립과 똑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