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UCD, CCD, PCD

4인4색 UX를 말하다 - 9

김성우입력 :2011/12/14 10:20    수정: 2011/12/15 08:05

김성우
김성우

사용자경험(UX) 분야의 공부를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UCD 이다. UCD는 User Centered Design의 약자로, 우리말로 하면 ‘사용자 중심의 디자인’이다. 즉 UX를 디자인할 때 사용자를 최우선 순위에 두고 그들의 관점에서 그들을 배려하는 UX를 만들라는 원칙이다. UCD는 UX 분야의 근간 철학이자 대원칙으로 UX를 공부하거나 실무를 할 때 많이 사용하게 되는 용어이기도 하다.

학교에서 갓 UX 공부를 마치고 이 분야에 첫 발을 내딛는 신입사원들의 UCD 스피릿(정신)을 보고 있으면 신선하다 못해 신성한 느낌이 든다. 아쉬운 것은 그런 스피릿이 채 일이 년을 못 가 두터운 현실의 벽 앞에 무너져 버린다는 것이다. 술자리에서 1~2년 정도 된 UX 초년생들에게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가 “UCD는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요?”가 아닐까 싶다. UCD로 무장된 몸과 마음으로 고객들을 위한 최고의 UX를 만들겠다는 그들의 신념은 왜 그렇게 얼마 가지 못해 무너지는 것일까?

앞서 언급했듯 UCD는 언제나 사용자 중심으로 UX를 디자인하는 것이다. 즉 GUI 아이콘 한 개를 디자인하는 일이든 전사 UX 표준화 정책을 수립하는 대규모 과제이든 사용자를 항상 최상위로 고려하면서 의사 결정을 내리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정신은 기업이 추구하는 고객 중심적 경영과도 잘 맞는다. 혹시 “우리는 고객 중심적이지 않은 상품을 만드는데 최선을 다합니다" 라고 말하는 회사를 본 적이 있는지?

UCD와 기업이 추구하는 경영 방침이 이렇게 잘 맞는다면 도대체 왜 한껏 열의에 가득 찬 UX 초년생들이 1~2년 만에 술에 취해 “UCD는 학교의 교과서에나 있는 것"이라고 빈정대는 상황이 오는 것인가? 기업의 화려한 비즈니스 무대 뒤에서 돌아가는 현실은 사실상 고객 중심적이지 않은 때가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순수(naive)한 UCD 전도사들인 이들이 ‘고객 중심적이지 않은 상품을 만들지 않는’ 악마와 대면하면서 온갖 영적 갈등이 터지는 것이다.

■고객 외면하는 '사장 중심적 디자인(CCD)'

사용자 중심적 디자인. 그렇다면 여기서 사용자는 누구인가? 이들은 ‘우리 상품을 사주는 분들’, 즉 고객 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고객을 누가 정의하는가에 있다. 물론 많은 기업은 마케팅 리서치와 같은 고객 조사를 시행하고 이로부터 표적 고객군과 이들의 페르소나(persona)를 만든다. 대부분의 상품 기획이나 UX 과제는 이 조사에 기인하여 시행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UX 결과물을 임원이나 사장과 같은 핵심 의사결정권자들에게 보여 줄 때 종종 당혹스러운 상황을 직면할 때가 있다. “왜 여기서 이 색깔을 쓰지 저 색깔을 썼느냐?” “왜 이렇게 안하고 저런 식으로 메뉴를 만들었느냐?” 등 갖가지 주장이 쏟아져 나오는데, 대부분 본인의 개인적 선호도 내지 본인이 알고 있는 극소수 몇 명 (예: 자신의 가족)의 선호도에 근간하고 있어 보일 때가 그런 상황이다.

특히 흥미로울 것은 중년도 한참 지난 의사결정권자들이 20~30대의 젊은 고객군을 대상으로 한 상품의 UX를 논의할 때 “요즘 젊은 애들은 이런 것을 좋아하는데 이런 식으로 만들어야 하잖아"라고 말할 때이다. 이 표현을 오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표적 고객군과의 생물학적 나이의 차이가 반드시 그들을 이해 못 하는 것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유아를 위한 상품은 유아들이 만들어야 한다는 논리적 모순이 발생한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 등 아이들에게 인기 있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만든 유명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는 1940년대 출생이다. 이런 사람들은 개인적인 환경을 너머 자신의 전문 영역에서 고객의 니즈를 정확하게 읽을 수 있는 탁월한 안목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한다.

아쉽게도 기업의 대부분의 임원과 C레벨은 이런 정도의 안목까지는 보유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꼭 비난할 것만은 아니다(그들이 모두 그 정도의 안목을 갖추었으면 다들 스티브 잡스나 미야자키 하야오처럼 글로벌 유명 인사들이 되었을 것이다). 다만 본인들이 그 정도의 안목을 갖추지 않았음을 안다면 본인들보다는 더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고 보다 오랜 시간을 투자하여 고객들의 니즈를 읽어낸 전문가들을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기업 경영은 곧 인재 경영인 것이 바로 이럴 때 적합한 표현인데, 그 활용에는 전문가들의 의사 결정에 대한 신뢰와 지지도 포함된다.

UCD로 시작한 UX가 의사결정권자들의 입김과 압박이 들어가면서 UCD로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고 CCD로 전락하여 종결되는 경우를 필자는 많이 보아왔다. 여기서 CCD는 CEO-Centered Design로 ‘고객 중심적인 제품을 만들지 못하는 악마’의 두 번째 최악의 케이스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가장 최악의 케이스는? 바로 PCD 이다.

■최악의 경우는 'PCD'...회사 내부 정치력으로 좌지우지

UX는 단순히 ‘사용하기 쉬운 UI’만이 아니라 그 상품의 사업 전략과 방향이 실체화돼 나가는 기업-고객 간의 핵심 접점이다. 특히 서비스 상품의 UX에서는 이런 경향이 더욱 두드러진다.

한 스마트 TV 기반의 웹 포털에서 5개의 세부 서비스 상품을 고객에게 제공한다고 해보자. 이를테면 사진 공유, 채팅, 웹하드, UCD 동영상 서비스, 음악 서비스 정도를 잡아보자. TV 환경인 만큼 고객은 리모컨으로 이 서비스를 쓰게 되는데, 리모컨에 각 세부 상품을 한 번에 실행할 수 있는 숏컷 버튼이 총 3개만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면 5개의 세부 서비스 중 2개는 리모컨으로 바로 실행시키지 못하고 화면 GUI에서 몇 단계를 더 거쳐야만 시작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버튼을 배정받지 못한 서비스들은 아무래도 다른 3개의 서비스에 비해 사용 빈도수가 떨어질 것이고 이는 서비스 매출에 영향을 미치는 부정적인 요소가 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UX에서 말하는 접근성의 사업 전략적 차별성이다. 다른 분야에서도 유사한 예들이 많은데 대형 서점의 한쪽 구석에 있는 책장의 맨 밑 칸에 꽂혀 있는 책들은 눈길을 못 끌고 따라서 판매 부수가 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한 사업부에 각 팀이 세부 서비스를 하나씩 맡고 있다면 팀들 간의 내부 경쟁이 UX에서 갈등으로 점화될 때가 있다. 위의 사례에서는 숏컷 버튼 3개를 두고 5개의 팀이 경쟁을 벌이게 되는 셈이다. UX 디자이너의 입장에서는 UCD의 원칙에 따라 인기가 좋거나 빈번하게 사용되는 서비스들에게 숏컷 버튼들을 부여할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이 대의적으로 냉철하게 판단하여 UCD를 따라주는 것이 아니다. 숏컷 버튼을 배정받지 못한 팀은 당연히 매출과 이에 따른 팀 평가에 민감해질 것이다.

이때부터 상황이 복잡하게 진행될 수 있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버튼을 배정받으려고 하는 과정에서 UX 담당자들을 대상으로 회유와 협박(?)이 오가거나 윗선부터 라인을 타고 내려오는 등 온갖 불편하고 추한 사내 정치가 시작된다. 이 과정 속에서 ‘정치를 잘 못한’ 팀이 맡은 사용 빈도가 높은 서비스가 숏컷 버튼을 뺏길 수도 있고, 스마트TV에서 기본적으로 리모컨에 들어가야 할 버튼 하나가 엉뚱하게 잘못 걸려 희생 당할 수도 있다.

UX가 각 팀간의 사내정치 전쟁터가 되어 화약냄새가 난무할 때쯤이면 UCD는 온데간데없고 PCD (Politics-Centered Design)만이 모든 기준이 되어 버린다. 그렇게 해서 출시된 제품과 서비스치고 대체로 성공 가능성이 작은데, 사용자를 배려하거나 사용자가 원하는 방향에 대한 건설적인 토론과 비평을 바탕으로 디자인된 것이 아닌 만큼 당연한 결과라고 봐야 할 것이다.

■현명한 의사결정자를 위한 조언

CCD와 PCD는 UX가 개인의 착오과 집단이기주의로 말미암아 얼마나 고객한테서 멀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개념이다. 현명한 의사 결정자들이라면 아래의 조언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1. 고객을 읽은 안목에서 본인이 스티브 잡스인지 아니면 그냥 스티브인지를 냉철하게 판단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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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냥 스티브이면 다른 이들보다는 사용자 관점에서 고민하는 훈련이 더 되어 있는 UX 전문가들이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조언과 지지와 비평을 아끼지 말 것

3. 그렇게 해서 나간 상품이 꼭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CCD나 PCD를 거쳐 나간 상품보다는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잊지 말 것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성우 IT컬럼니스트

KT 종합기술원 중앙연구소 UX 매니저. "기술 너머의 철학"을 추구하는 UX 구도자로 최근에는 UX 생태계 구축 및 UX 디자인 경영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UI 소프트웨어 공학, 인터랙션 디자인, UX 컨설팅, 기업에서의 UX 경영 등 융합과 통섭이 기본인 UX의 다학제적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여러 공부와 실무를 통해 사용자 경험에 대한 안목을 쌓아았다. 실리콘벨리에서 UI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국내에선 삼성전자와 팬택의 UI 팀에서 일했으며 필립스 디자인(Philips Design)의 싱가폴 브랜치에서 UX 디자인 컨설턴트로도 근무했었다. 학부 및 대학원에서 컴퓨터공학과 HCI를 전공하였고 UX 경영 공부를 목적으로 MBA를 취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