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스티브 잡스가 남긴 것

전문가 칼럼입력 :2011/10/21 11:48    수정: 2011/10/25 14:40

이재석 심플렉스인터넷 대표

‘iHeaven’ - 네티즌들이 애플의 전 CEO인 스티브 잡스를 추모하기 위해 아이폰과 아이패드처럼 ‘i’로 시작하는 애플의 모델명을 본 따 만든 신조어 중 하나다.

천국(Heaven)으로 간 잡스가 우리에게 남기고 간 것은 무엇일까? 경영인으로서의 잡스는 '혁신의 아이콘'으로 요약된다. 그는 기존과 다른 차원의 혁신을 보여줬다. 누가 더 얇고 빠르고 가벼운가를 겨루던 휴대폰 시장에 아이폰을 들고 나오면서 경쟁 기준을 바꿔버렸다. 기존에는 뛰어난 기술력 그 자체가 중요했다면 잡스는 한발 더 나아가 기술을 활용해 사용자에게 감성적 만족을 주는 데 집중했다. 단적으로 말하면, 기존에는 사람이 기계에 맞추는 식이었다면 잡스는 사람에 맞춰 기계를 만든 것이다.

아이폰의 사용법은 몹시 직관적이다. 기존 기기는 두꺼운 매뉴얼을 살펴보고 새로운 기능을 익혀야 했다. 하지만 아이폰은 '이렇게 하면 되겠지'하면 그대로 움직인다. 그 중 사용자에게 감성적 만족을 주는 대표적인 기술은 '마치 책장을 넘기는 듯한' 화면 스크롤이다. 종전 화면 스크롤 기술은 잔상 없이 빨리 넘어가면 그만이었다.

아이폰은 종이를 손가락으로 밀어서 넘기는 듯한 자연스러운 느낌을 전해준 최초의 휴대폰이다. 기존 디지털 기기가 주지 못했던 감성적 만족 때문에 아이폰은 얼리 어답터뿐 아니라 숱한 대중의 마음까지 사로잡고 있다.

잡스가 보여주는 이러한 혁신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잡스는 맥(Mac)을 만든 컴퓨터 엔지니어이면서 종교와 철학 같은 인문학 분야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종이를 넘기는 듯한 스크롤, 세살바기도 가지고 놀 수 있는 직관적인 사용법 등은 사람을 이해하려는 인문학, 인지 공학의 영역이다. 이처럼 잡스는 컴퓨터 공학이라는 기술적 토대 위에 인문학적 감성을 덧씌웠다.

공학적 기술과 인문학적 감성을 갖췄다 해서 잡스 수준의 혁신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잡스를 뒤쫓는 기업은 이른바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를 만나게 될 확률이 높다. 불쾌한 골짜기는 인간을 어설프게 닮은 로봇을 봤을 때 사람이 본능적으로 불편함을 느끼게 되는 현상에서 나온 말이다. 진화학자들은 이 현상을 시체나 병에 걸린 사람을 가까이할 때 생기는 감염 가능성을 피하기 위해 생김새나 행동이 정상인과 다르면 회피하도록 인간이 진화한 것으로 설명한다.

이론에 따르면 사람에게 호감을 얻는 로봇을 만들기 위해서는 사람과 일정 수준 이상 비슷하게 만들거나 아예 사람과는 다른 형태로 만들어야 한다. 어중간하게 생긴 로봇은 사람들을 불쾌한 골짜기에 빠뜨릴 위험이 있다.

불편한 골짜기는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 봄직한 현상이다. 조용한 곳에서 또박또박 말해야 알아듣는 음성인식 기술, 의도하지 않게 문장을 고쳐 버리는 워드프로세서의 자동완성 기능 등 의외로 많다. 마찬가지로 아이폰의 종이 넘어가는 듯한 터치 스크롤 역시 완성도가 일정 수준 이하였다면 사용자들은 불편한 골짜기를 경험했을 것이다.

선택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인간을 닮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즉 인간중심적·감성적 기술을 포기하고 기존 기술 발전에 매진하는 방식이다. 또 다른 하나는 어떻게든 골짜기를 건너 잡스가 보여준 혁신의 신세계까지 가는 것이다.

문제는 아이폰이 등장하면서 소비자들의 기대치는 이미 불쾌한 골짜기 너머까지 가버렸다는데 있다. 험난한 과정이 기다린다 해도 골짜기를 향해 전진해야 한다.

잡스 역시 처음부터 혁신의 아이콘은 아니었다. 실패나 괴짜로 불리던 기간이 더 길었으며, '불쾌한 골짜기'를 헤매던 시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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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일부 기술은 세계 정상급으로 통한다. 아이폰보다 뛰어난 하드웨어 사양을 갖춘 휴대폰이 국내 기술로 여럿 출시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사용자에게 감성적 만족을 주는 방법과 이를 완벽히 구현하는 기술적 완성도다. 국내 기업들이 보유하고 있는 특유의 저돌적 에너지를 통해 '불쾌한 골짜기'도 넘어설 수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이 골짜기를 지나면 우리도 iHeaven, 신세계에 합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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