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동안 8명의 CEO'… HP의 숙제는?

일반입력 :2011/09/27 08:43    수정: 2011/09/27 17:24

HP가 레오 아포테커를 10개월만에 CEO자리에서 끌어내렸다. HP 이사회는 1999년 이후 여덟번째 CEO로 이베이 출신의 멕 휘트먼을 임명했다.

그의 경영 능력은 벤처기업 이베이를 오늘날의 모습으로 키워냈고 대형 조직을 관리해봤다는 점에서 일단 합격점을 받을 만하다. 문제는 뛰어난 경영 능력과 별도로 HP가 쉽게 일어서기 힘든 상황이란 점이다.

미국 지디넷은 HP가 장기적인 계획과 ‘연속성’을 갖지 못했다며, 멕 휘트먼이 풀어야 할 가장 어려운 숙제라고 분석했다. 장기적인 계획, 즉 '연속성'은 기업내부, 무수한 파트너, 고객과 포괄적으로 연결된다. 지난 10년 동안 HP가 걸어간 길을 보면 그 중요성은 더 분명해진다.

■HP, ‘연속성’을 잃어버렸다

지난 10년간 HP의 DNA에 ‘연속성’은 전무하다. 칼리 피오리나, 마크 허드 등을 거치면서 HP는 현재의 모습에 이르렀다.전략, 제품 라인, R&D 지출, CEO 모두에서 연속성을 찾기 어렵다. 지난 1999년 이래 7명의 CEO가 바뀌었던 것이 단적인 표시다.

HP는 PC사업을 위해 자신들의 솔루션을 버리고 컴팩을 인수했다. 컴팩 제품은 HP의 자체 개발 제품을 몰아냈다. 네트워크 사업에 대한 독자 행보도 비슷하다. HP는 쓰리콤을 인수하면서 오랜 시간 공생했던 시스코시스템즈와 결별했다. 시스코가 UCS 서버를 내놓으면서 서버시장에 진출하자, HP가 내놓은 처방은 M&A를 통한 전면전이었다.

특히 마크 허드는 HP에게 독약과 마찬가지였다. HP는 최근 몇 년 동안 R&D에 전체 매출의 3%밖에 투자 하지 않았다. 오직 M&A만 있었다.

레이 레인 HP이사회 의장을 비롯해 업계 관계자들은 “마크 허드 전 CEO가 지독하게도 엔터프라이즈 분야 R&D에 투자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마크 허드는 운영비용 절감에 모든 역량을 집중한 덕에 HP 주가를 끌어올렸지만, 기업 내부에 남아있던 혁신의 영혼을 모두 증발시켰다. HP CI에서 인벤트(Invent)가 사라진 시점이 마크 허드의 재임 시절이다.

지난해 레오 아포테커는 CEO 부임 후 IBM의 모습을 꿈꿨다. IBM처럼 고품질 기업용 소프트웨어를 팔고, 소프트웨어를 하드웨어에 통합해 제공하는 고마진 사업이 HP의 전략이다. HP는 지난 1년간 IT서비스 및 SW회사로 이동하는 행군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지휘자 자리에서 물러났다.

일단 멕 휘트먼과 HP 이사회는 아포테커의 계획을 이어갈 의지를 보였다. 장기적인 계획과 연속성이 HP에 살아날 신호일까? 내부의 상황을 넘어서면 다음은 외부의 적이다.

■샘 팔미사노와 IBM의 100년, 창업자 래리 엘리슨과 오라클

HP가 대적해야 할 상대를 보면 만만치 않다. 전 사업분야에 강적이 즐비하다. HP와 달리 라이벌들은 모두 연속성을 가졌다.

네트워크는 시스코와 창립자 존 챔버스 회장이, 스토리지는 EMC와 조 투치 회장이 버티고 섰다. PC도 마이클 델이란 숙적이 떡하니 버틴 채 HP를 비웃고 있다.

소프트웨어와 IT서비스 분야의 경쟁상대는 IBM과 오라클이다. IBM은 10년째 사무엘 팔미사노 CEO 체제다. 오라클은 래리 엘리슨 회장과 사프라 카츠 사장의 체제가 창립 이래 탄탄하게 이어졌다.

IBM의 CEO는 1999년 이래 루 거스너와 샘 팔미사노 단 두 명이다. 샘 팔미사노는 루 거스너로부터 2002년 대권을 넘겨받은 이래 10년째 CEO자리에 있다. 그의 후계자인 버지니아 로메티 수석 부사장도 오랜 동안 IBM에 몸담으며 역량을 쌓았다.

IBM은 2000년대 초반 PC산업의 변화 시기를 놓쳤고, 루 거스너 이전까지 만신창이였다. IBM은 힘든 시기 속에서도 R&D 투자를 계속했다. 수천년 계속되는 트렌드를 잡기 위해 자신들의 포트폴리오를 재조합해 5년 계획을 세웠다. 이 회사는 매년 전체 매출의 6%를 R&D에 투입한다. 그리고 올해 100주년을 맞이했다.

샘 팔미사노는 지난 20일 IBM 씽크포럼 기조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공한 회사를 만드는 작업을 충실히 하기란 쉽다. 마음을 얻는 제품과, 이익이 되는 사업모델이면 된다. 전문가로서 성공하는 것은 더 쉽다. 그러나 리더에게 부여된 핵심 책임 중 하나는 변화할 시점이 언제인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무엇이 변해야 하고 무엇을 유지해야 하는 지 이해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팔미사노는 장기적인 계획을 강조하면서 “제도적인 인내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장기적인 구상은 정치와 재정 모두를 관리해야 한다는 점을 가리킨 것이다. 회사는 고객, 주주, 직원, 그리고 훌륭한 플랜을 공유하는 커뮤니티를 만족시킬 필요가 있다. 팔미사노는 “영속하는 대기업은 그들 모두를 부양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IBM과 함께 오라클은 창업자의 절대군주체제가 계속되고 있다. 래리 엘리슨 CEO는 오라클의 아이콘이다.

2003년 래리 엘리슨 CEO는 “소프트웨어가 통합될 필요가 있는 성숙한 산업”이라고 말했다. 업계를 통일하겠다는 그의 야심을 엿보인 발언이다. 그는 이후 그 기조를 유지해나갔다.

엘리슨의 개인적 성향은 오라클이란 회사의 성향과 동일하다. 오라클은 큰 싸움을 만들어내고 경쟁을 즐긴다. 현재 오라클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한 시스템에 통합시키는 지점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다. 투자자들이 여전히 하드웨어 사업에 의문부호를 붙이지만, 오라클이 곧장 하이엔드 시스템을 포기할 거라 확신하진 않는다 .

래리 엘리슨뿐 아니라 사프라 카츠 사장 역시 걸출한 인물이다. 그는 오라클을 오늘날 모습으로 키워낸 철녀다. 파트너인 마크 허드는 HP에서 곧장 자리를 옮긴 탓에 HP를 잘 알고 있다.

비평가들은 오라클의 비전이 고객에게 매년 막대한 유지보수 비용을 물리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라클에게 잘되는 사업 중 하나에 불과하다.

IBM의 문화는 크게 생각하는 것이다. 오라클은 설전을 통해 라이벌에게 강펀치를 날리는 문화를 갖고 있다. 그에 반해 HP는 수많은 CEO를 교체하고, R&D에 소홀하면서 연속성을 잃었고, 개성도 흐려졌다.

■멕 휘트먼의 HP, 쉽지 않은 부활 계획

멕 휘트먼도 HP에 연속성을 불어넣으려 시도할 게 분명하다. 그러나 수차례 벌어진 잦은 CEO 교체는 휘트먼과 HP에게 좋은 예측을 하기 어렵게 만든다.

레이 레인 HP이사회 의장이 22일 그에 대한 힌트를 내비쳤다. 그는 CEO 후보자가 회사 내부에 있지만 그들은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CEO가 머지않아 내부인물로 교체될 수 있음을 배제하지 않은 것이다.

만약 HP가 연속성을 원했다면 내부 인물을 CEO로 앉힐 수 있었다. 400억 달러 규모의 사업을 경험하고, HP를 깊게 이해하는 인물이다.

영국 IT매체 더레지스터는 HP 이사회의 멕 휘트먼 선임에 대해 “왜 HP가 오랜 시간 회사에 몸바쳐온 앤 리버모어를 CEO로 택하지 않았는지 의문스럽다”고 평가했다.

앤 리버모어는 HP 외에 어느 회사서도 근무한 경력을 갖지 않은 순수 HP사람이다. 엔터프라이즈 사업부(EB)에서 오랜 시간 핵심임원이었던 앤 리버모어는 소프트웨어와 서비스 분야의 경력도 가졌다. 그는 칼리 피오리나, 마크 허드를 거쳐 레오 아포테커 시절까지 핵심에 있었지만, 얼마전 실무에서 물러나 HP 이사회 일원으로 합류했다.

씨넷은 HP가 정체성의 위기에 처했다고 평가했다. PC, 프린터, 기업용 솔루션 사업 모두를 복잡하게 운영해오면서 오늘날 정체성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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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 휘트먼의 과제는 산더미처럼 쌓였다. 그에게 주어진 숙제는 IT 역사상 가장 풀기 어려운 문제일 것이란 얘기도 나올 정도다.

멕 휘트먼은 CEO 취임 후 “HP는 실리콘밸리, 캘리포니아, 미국 그리고 전세계에게 중요한 존재”라고 밝혔다. 그는 HP를 위기에서 구해내고 장기 계획으로 연속성을 부활시킨 전설로 남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