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구코너]왜 우리는 반도체산업을 해야하는가?

1983년 3월15일 이병철 삼성회장 반도체사업 선언

일반입력 :2011/03/28 12:06    수정: 2011/03/29 07:46

이재구 기자

한국에 반도체 씨앗을 뿌린 사나이

“그렇다 한국으로 이 기술을 갖고 가서 전세계를 놀라게 하는 거다. 나 혼자 할수 있다. 한국에서 알아줄 사람이 없는 게 문제다. 그래도 어떻게 하든 한국으로 가는 방법을 연구해 보자.”

1972년 어느 날.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만 서니베일의 한 작은 모텔.

38세의 한 한국인이 서울에서 온 인사와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그는 세계최고의 반도체 생산회사 모토로라에서 생산책임자를 역임했던 인물이었다.

“모두 169만달러가 필요하지만 우선 해 봅시다.그는오하이오주립대에서 반도체로 학위를 딴 강기동박사였다. 그리고 그의 손님은 17년 전 서울에서 함께 한국아마추어연맹(KARL)을 창설한 멤버이자 서울에서 켐코(KEMKO)란 대규모 통신장비수입상을 하던 김규한사장이었다.

강박사는 자신이 개발한 NPN시리즈,PNP시리즈 반도체를 미 반도체 업계의 표준으로 정착시킨 실력자였다.

사막도시 피닉스에 있는 모토로라는 일본이 가장 배우고 싶어하는 반도체기술회사였다. 강박사는 최고책임자 레스터 호간, 연구소장 I.A. 레스크과 함께 그 중심에 서 있었다.

그러나 매사추세츠공대(MIT)물리학과교수 출신인 레스터 호간은 10년간 정들었던 모토로라 총 책임자의 자리를 박차고 떠났다. 그가 이른 바 8인의 핵심 엔지니어를 끌고 실리콘밸리의 꽃 페어차일드로 떠난데 이어 강기동도 독립을 결심하게 된다.

호간박사의 페어차일드행은 현지 신문에 대서특필되면서 떠들썩했다. 모토로라는 페어차일드를 영업비밀 유출 등의 혐의로 제소했다.

이런 과정에서 강기동의 한국행 결심도 굳어졌다. 그는 서니베일 스튜어트 드라이브 1010번지에 ICII(Integrated Circuit International Inc.)를 세웠다. 여기서 기술 및 지분 투자 50%를, 나머지는 김규한사장이 투자하기로 했다.

세계최고를 이식하려 했던 개척자의 불운

“내가 근무하던 모토로라 공장하고 똑같이 설계해 달라구.”

강기동박사는 자신이 다녔던 오하이오대 건축과의 한국인 동문에게 이렇게 주문했다.

“여기서 손목시계용 IC부터 시작하는 거야.”

그는 당시 최고기술인 이른바 C-MOS(상보성 금속산화물 반도체)라는 기술로 손목시계용 칩을 만들기로 했다. MOS는 저 유명한 IC의 아버진 잭 킬비와 밥 노이스가 개발한 집적회로(IC)의 전력소모를 크게 줄인 첨단기술이었다. 이를 개발한 사람역시 오하이오주립대 출신인 그의 선배인 강대원 박사였다.

하지만 그는 표면상으로는 ‘기술지원’ 책임자로만 활약해야 했다. 반도체 기술은 냉전시절 미국의 최첨단 기술이었고 모토로라 출신인 그가 대외로 유출하면 안됐다. 1974년 1월26일 경기도 김포군 오정면 내리(현재의 부천시)에서 한국반도체란 회사가 문을 열었다. 김규한켐코사장과 강기동박사가 총 100만달러로 설립했다.

그가 설계한 공장은 3인치웨이퍼를 가공해 칩을 만들고 테스트하는 진짜 반도체 공장이었다. 당시 한국에 진출한 외국반도체업체들은 반도체제작의 마지막 공정인 금속 캔을 씌우는 임가공 공장에 그쳤다.

강박사가 만들려는 LSI칩을 사용하면 디지털 전자시계에 숫자로 시간이 표시됐다. 일반인들도 좋아했다. 그는 빨간불로 숫자를 표시하는 디지털 손목시계용 CMOS회로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하지만 빠듯하게 100만달러로 창업한 것이 무리였다. 당시 미,일 반도체 팹공정 설립비용의 10%에 불과했다. 게다가 1973년 발발한 중동전과 제 1차 석유파동으로 모든 장비, 자재값은 치솟았다.

자금부족으로 쪼들리던 시달리던 한국반도체는 10월 4일 간신히 준공을 하지만 모든 일정이 당초계획과 어긋나기만 했다.

제품 생산 때까지 자금을 지원키로 했던 후원자의 약속도 이뤄지지 않았다. 이해 12월 4일 한국반도체가 부도났다.

이틀 후 이건희 동양방송이사가 한국지분을 50만달러(4억원)에 인수했다. 강박사가 기술을 지원하는 조건이었다.

하이테크산업의 매운맛을 보다.

강기동 박사는 어떻게든 자신이 시작한 반도체사업을 성공시키고 싶었다.

1975년 9월 1일 그는 6기능 LED전자손목시계용 반도체인 KS-5001 개발에 성공했다. 후일 삼성이 1메가D램을 만들때 고심하던 CMOS기술을 사용한 것이었다. 6~8달러선인 이 칩 가격은 수요확대에 따른 공급부족으로 24시간 풀가동에도 주문이 쇄도했다. 양산개시 3개월 만에 월간 손익에서 흑자전환이라는 쾌거를 이뤘다.

당시 전자시계는 전세계적 각광을 받고 있었다. 칩은 성공했다. 정부는 삼성시계와 관련업계로 하여금 시계산업을 스위스 수준으로 육성하는 방안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반도체의 개발과 생산, 그리고 판매 가격 사이클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강박사는 걱정스러웠다. “새로 나오는 하이테크 제품은 반짝하다가 사라질 수도 있다. 또 장래가 좋은 경우는 후발업체가 시장장악을 위해 가격 덤핑을 할 수 있어 예측할 수 없는 게 하이테크시장이다. 하이테크 실력은 시시각각 변하는 시장 주위환경에 대처해서 제품을 선정하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삼성파견 일부 경영진과 강박사 간에 견해차가 발생했고 강박사는 1976년 여름 한국반도체를 떠났다. 이 해 CMOS 시계칩은 수출실적 418만4989달러를 기록했다.

하지만 이후 한국반도체는 그보다 한단계 낮은 TR과 TV용 IC 양산에 눈을 돌렸다. 결과는 참패였다. 일본반도체업체들이 값싼 제품을 쏟아냈다. 국산화가 무색해졌다. 강박사의 걱정은 불행히도 맞아 떨어졌다.

“앞으로는 김광호 이사가 책임을 맡는다. 김이사로도 살리지 못하면 더 이상 반도체사업을 계속할 수 없다.”

1979년 9월. 강진구사장은 컬러TV 담당인 김광호이사에게 특명을 내렸다.

그의 선택은 디지털 시계용 칩이었다. 일본 오키가 가격을 치고 나왔지만 단순형 시계칩으로 경쟁을 따돌렸다. 2년후 김이사는 컬러TV용 색신호IC를 국산화하는 성과를 올렸다. 하지만 그것으론 뭔가 부족했다.

일본경제의 대부가 들려준 ‘경박단소화’산업

1980년 이른 봄. 삼성물산 가스미가세키(霞ケ関)빌딩 사무실. 도쿄를 방문중인 이병철 회장에게 이나바 슈조(稻葉秀三)박사가 찾아왔다. 그는 일찍이 요시다 시게루(吉田茂)수상 아래서 일본의 경제정책을 수립한 인물이자 후지화학 회장이었다. 73년과 79년 두차례의 오일쇼크로 휘청거리는 세계경제와 일본경제의 위기가 주제였다. 이병철회장이 이나바 박사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일본의 살길은 무엇입니까?”

“반도체 컴퓨터 신소재 광통신 유전공학 우주 해양공학 등 성(省)자원이며 부가가치가 높은 첨단 기술분야로의 전환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특히 반도체 및 그 주변의 기계공업에 치중해 왔지요. 일본 정부도 이를 적극 뒷받침해 전략산업으로 육성한 결과 수출은 획기적으로 늘어났고 외화수입은 급증했습니다. 일본의 살길은 바로 경박단소(輕薄短小)의 첨단기술산업에 달려있습니다.”

이나바 박사가 들려준 당시 일본 산업의 일대 방향전환에 대한 이 이야기는 이회장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82년 5월. 72세의 노기업가는 미일 전문가를 비롯한 국내 전문가들의 의견을 거의 다 들었다. 관계자료는 손닿는 대로 섭렵했고 반도체와 컴퓨터에 관한 최고의 자료를 얻고자 무한히 애를 썼다. 그는 “전혀 가능성이 없지는 않겠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반도체시장 조사를 해 오시오

“기존 반도체사업에 대한 전면 검토와 반도체 전체를 대상으로 한 철저한 시장 조사 및 사업성 분석작업 결과를 가져 오시오.”

1982년 9월. 이병철회장의 지시가 떨어졌다. 이에 따라 반도체사업부는 삼성그룹내에서 가장 중요하고 바쁜 사업부가 되었다. 추진팀장은 당시 반도체사업본부장이었던 김광호 상무였다.

이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해외지사를 통해 최신 반도체 정보를 입수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1974년 한국반도체 인수 이후 경영성과를 되짚어 나갔다.

1982년 10월 반도체사업추진팀은 이회장에게 방대한 분량의 보고서를 냈다. 그는 이 회장은 연필로 밑줄을 그어가며 읽었다. 보고서를 읽던 이 회장은 메모리란 항목에 동그라미를 쳤다. 그리고 메모리를 중심으로 사업계획서를 다시 만들어보라고 지시했다.

이 회장은 첨단 반도체 중에서 일본이 미국보다 유일하게 앞선 분야가 메모리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당시 일본은 미국에 D램, S램, EP,EEP롬 등 다양한 메모리를 수출하고 있었다. 메모리반도체는 당시 세계 시장규모가 30억1천800만달러로 전체반도체 시장의 20.8%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메모리중에서도 어떤 제품을 주력으로 삼을지가 과제였다.

반도체사업추진팀은 국내외에서 입수한 자료, 전문가 자문결과를 바탕으로 시장규모, 경쟁력, 생산효과, 향후 전망 등을 종합검토한 끝에 S램과 EEP롬으로 결정했다.

D램은 시장규모가 가장 크지만 미국 일본 업체들간의 경쟁이 어느 제품보다 치열하고 공급과잉에 따른 급속한 가력하락이 예상돼 처음엔 검토 대상에서 빠졌다. 후발 시장진입자인 삼성이 미국 ,일본과 가격경쟁을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회장과 반도체사업팀은 결국 D램위주로 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비록 치열한 경쟁이 있을지라도 생산 효과가 뛰어나고 시장규모가 가장 큰 D램을 중심으로 생산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미국,일본과 경쟁해서 이길 수 있을까

“과연 D램을 해도 되는 것일까?”

이병철 회장은 어느 정도 마음을 굳혔음에도 여전히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제부터 시작하려는 사업은 최소한 1억달러(1천억원)부터 시작해서 10억달러까지 퍼부어야 하는 대형 프로젝트였다. 너무나도 위험한 모험이었다. 정부의 한해 예산이 22억달러 아닌가.

또 자금을 조달한다 해도 이 첨단산업을 이끌어 성공시킬 전문인력도 없지 않은가?

이 회장과 삼성전자 경영진은 고심끝에 아이디어를 짜냈다.

“미국에는 숨어있는 한인 과학자들이 많을 것이다.한국에서 자신의 지식과 능력을 발휘한 만한 곳을 찾지 못해 미국에 주저앉아 활동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들 고급 브레인을 한곳에 모아 반도체를 연구시켜 개발된 것을 국내에 들여와 양산하도록 하자.”

삼성은 GE와 IBM을 거쳐 샤프사의 고문으로 있던 스탠포드대 전자공학과 출신 이임성 박사, 인텔을 거쳐 내셔널세미컨덕터에서 64KD램 개발담당 부장을 거친 이일복박사, 자일로그에서 반도체 공정개발을 맡던 미네소타대 출신 이상준 박사, 인터실과 사이너텍에서 C-MOS 제조수율 개선에 성공한 이종길 박사 등 32명을 이듬해까지 확보했다.

1983년 1월 9일. 이회장은 마지막으로 6명의 출장팀을 실리콘밸리 서니베일로 파견했다. 하루가 멀다하고 급변하는 반도체 본고장의 현황과 정보를 바탕으로 최첨단 반도체 신규사업계획이 만들어졌다.

‘1983년 초부터 VLSI(초거대집적회로)대량생산 공장 건설 착수. 향후 5년간 시설투자 4천400억원, 연구개발비 1천억원을 투입해 첨단기억소자와 마이크로 프로세서개발....2미크론의 미세가공기술 및 5인치 웨이퍼처리 설비로 256KD램을 생산...VLSI의 경우 미국 현지법인을 통해 미국시장을 집중 공략하고 유럽시장까지 확대한다....’

이로써 이 회장이 구상하는 삼성반도체의 투자계획과 밑그림이 그려졌다.

하지만 의문은 여전했다. 과연 미국, 일본과 싸워 이길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극도로 짧은 제품 사이클을 견뎌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도쿄의 밤

83년 2월 7일 밤.도쿄 오쿠라(大倉)호텔에 체류 중이던 이병철 회장은 그동안의 구상을 정리하며 최종적으로 반도체 신규투자에 대한 결심을 굳히려 하고 있었다. 며칠 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그의 얼굴은 초췌해져 있었다. 피곤해진 그의 얼굴에서 평소 단아하던 삼성제국 총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호텔 창밖의 야경을 바라보면서 햄릿의 고민을 하고 있었다. 삼성제국의 운명을 좌우할 사안이었다.

“과연 D램을 해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

이나바 박사와의 대화에서 나온 ‘경박단소’‘첨단’ 같은 말들이 맴돌았다.

이회장은 1년간에 걸친 철저한 기초조사와 밤낮을 가리지 않은 연구와 검토를 거치고도 고민하던 삼성제국의 운명을 가늠할 결단을 내렸다.

“반도체 사업에 투자한다.”

이날 밤도 꼬박 세운 이 노사업가는 날이 밝아오자 마침내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2월 8일 아침. 강진구 삼성전자 사장은 마침 중앙일보 홍진기 회장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 네 회장님...”

국제전화 내용은 반도체와 관련한 것이었다.

“호암(이병철의 호)께서 말씀하시길 누가 뭐래도 삼성은 반도체를 할 테니 이 사실을 내외에 공포해 달라시네.”

전화를 마친 홍진기 중앙일보 동양방송회장이 강진구 삼성전자사장에게 말했다.

“다음 번 그룹의 주력사업으로 마침내 반도체 사업이 선정되었구나...”

강사장은 이병철 회장이 다음 번 신규사업을 심각하게 물색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들어 알고 있었기에 통화의 의미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왜 우리는 반도체사업을 해야 하는가

“...이러한 상황 아래서 삼성은 자원이 거의 없는 우리의 자연적 조건에 적합하면서도 부가가치가 높고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제품의 개발이 요구되었다. 그것만이 현재의 어려움을 타개하고 제2의 도약을 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확신하여 첨단 반도체 산업을 적극 추진키로 했다 반도체산업을 그 자체로서도 성장성이 클 뿐아니라 타 산업으로의 파급효과도 지대하고 기술 및 두뇌 집약적인 고부가 산업이다. 이러한 반도체 산업을 우리 민족 특유의 강인한 정신력과 창조성을 바탕으로 추진하고자 한다.”

1983년 3월15일 삼성그룹은 ‘왜 우리는 반도체 사업을 해야 하는가’라는 제목의 그룹 발표문을 내놓았다.

하지만 이병철회장의 결단에 대해 삼성그룹 내부 경영진을 비롯한 국내외 산업계의 반발은 거셌다.

그 중에서도 일본 미쯔비시경제연구소에서 내놓은 삼성이 반도체를 할 수 없는 다섯가지 이유가 가장 그럴 듯 했다.

“반도체사업은 기본적인 내수가 있어야 하는데 고작 GNP 600달러정도인 한국에 기본적 수요가 생길 리 없다. 그런 만큼 전량 수출에 의존해야 하는데 도대체 어떤 나라가 (가전품도 제대로 못만드는 후진국)한국의 반도체를 사겠는가? 선진국과 경쟁하려면 훨씬 뛰어난 기술을 개발해야 하는데 이들의 기술이전도 받지 못한 삼성이 이를 해 내기란 불가능하다. 또 총매출액이 1억달러도 안되는 삼성이 투자비만 10억달러가 넘는 반도체사업 투자비를 어디서 조달할 것인가? 전기와 물이 1년 내내 단 1초도 끊기지 않아야 하는데 한국의 산업기반은 반도체사업을 시작하기엔 너무 취약하다.”는 내용의 보고서였다. 그러나 이병철 회장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반도체 선언 1년 째가 되는 84년 3월말까지 64KD램의 양산 제1라인을 완성키로 하고 완성시한에서 역산해 모든 일의 진행계획을 짜 놓았다. 그리고 매일 매일 그 진척상황은 확인한다. 그는 모든 장애를 돌파할 준비를 끝내 놓았다.

6개월만에 성공한 64KD램 개발

반도체선언으로부터 6개월 여가 지난 83년 12월1일. 강진구 삼성반도체통신 사장이 갑자기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상공부와 과학기술처기자들이 모였다.

“삼성반도체통신이 64KD램을 개발했습니다....생산 조립 검사까지 모든 공정을 완전히 개발했습니다. 미국 일본에 비해 10년 이상 뒤졌던 반도체 기술격차를 4년 정도로 좁히는데 성공했습니다.”

강사장의 발표를 들은 기자들은 깜짝 놀랐다.

“6개월만에 미,일 첨단반도체 회사들의 주력제품을 개발해 냈다니...” 64KD램은 칩속에 6만4천개의 트랜지스터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손톱만한 칩 속에 약 8천자를 저장할 수 있었다. 미국,일본에서도 6년 이상 걸린 칩이었다. 일본의 6개 반도체 회사가 80년 이전부터 개발, 80년부터 이 칩을 미국에 수출하고 있었다. 누가봐도 믿기 힘든 내용이었다. 외신을 접한 미일반도체업체들도 경악했다.

하지만 이들은 삼성이 보내온 샘플을 시험해 보고는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분명히 정상적으로 작동되는 반도체였다.

성공은 거저 얻은 것이 아니었다. 이 회장의 결단력과 추진력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74년 이래 부천공장에서 축적해 온 조립기술에 행운까지 따라주었다. 미 아이다호주에 소재한 마이크론테크놀로지가 삼성의 기술제휴 요청을 받아들였다. 일본의 저가 반도체공세에 재정압박을 받던 마이크론이 삼성의 로열티제안에 마음을 움직였다.

삼성은 이 해 6월17일 마이크론과 정식계약을 하고 64KD램 설계도와 3500개의 칩을 받았다. 개발팀은 부천 한국반도체 시절부터 닦아온 개발역량을 바탕으로 설계도를 바탕으로 조립 시험생산에 들어갔다. 40일만에 생산수율을 일본수준인 92%까지 끌어 올렸다. 309가지에 이르는 공정기술과 검사조립기술의 개발에도 성공했다.

이듬해 5월 “6개월 안에 완공하라”는 이회장의 엄명을 받은 성평건 공장장은 2년 이상 걸리는 반도체 생산라인을 기한 안에 완공했다. 이 또한 말그대로 기적이었다. 이렇게 힘들게 개발,생산된 64KD램은 오늘날 세계적 반도체 회사 삼성전자의 성장 초석이 됐다.

세계 D램 반도체시장을 제패하다

삼성의 반도체선언 10년 만인 1993년 5월 미국 데이터퀘스트사가 반갑고도 놀라운 소식을 전해 왔다.

‘1992년 반도체시장 분석 결과 D램 분야에서 삼성이 일본 도시바를 제치고 세계 1위 메이커로 올라섰다.’

우리나라의 메모리반도체 산업이 드디어 일본을 제친 것이다. 이미 92년 9월25일에 세계최초의 64메가D램을 개발해 내 전세계를 또한번 놀라게 한 만큼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몰랐다.

삼성의 64메가D램 개발은 곧바로 반도체 업계의 순위 변동으로 이어졌다. 삼성의 매출액은 11억9200만달러, 세계시장 점유율은 13.5%였다. 도시바의 11억2300만달러, 12.8%를 넘어서는 실적이었다.

반도체 산업의 초석을 놓고 간 고 이병철 회장의 유지가 그의 타계 5년 만에 더욱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64KD램 개발이후 한때 반도체 가격 폭락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후 후계 이건희회장의 일관된 투자결단과 리더십 아래 눈부신 성장을 거듭했다.

기술적으로는 진대제박사의 16메가D램, 권오현박사의 64MD램. 이후 황창규박사가 256메가D램이후 세계최초로 이어가면서 반도체코리아의 위상을 한껏 드높였다.

시장도 도왔다. 84~85년 반도체 불황이 86년 246KD램 호황,88년 1MD램호황으로 이어졌고 95년 윈도OS 특수로 이어졌다. IMF쇼크라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2004년 이래 플래시메모리, 2009,2010년 애플호황 등으로 메모리왕국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92년 이후 삼성은 D램 시장에서 단한차례도 1등자리를 내주지 않고 독주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메모리업계 점유율 30~40%대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절대강자로 군림하고 있다.

반도체선언 이래 30년 가까운 지금 삼성은 기술력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정상 자리를 확보하는 한편 고 이병철 회장이 예견했던 ‘천문학적 수익’의 기반을 확고히 다지고 있다.

기흥캠퍼스 16라인 기공...세계 반도체 1위 노리다

2010년 5월 17일. 이건희 삼성전자회장이 삼성나노시티 화성캠퍼스에서 반도체 16라인 기공식의 첫삽을 떴다. 세계최대 반도체 단지를 만들기 위한 웅대한 그림이다.

“지금 세계 경제가 불확실하고 경영 여건 변화도 심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이런 시기에 투자를 더 늘리고 인력도 많이 뽑아 글로벌 사업기회를 선점해야 그룹 성장 기회가 오고 경제가 성장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건희 회장의 치사가 이어졌다.

사실 이 날은 꼭 27년 전인 1984년 고 이병철 삼성회장이 64KD램 1라인 생산공장 준공식을 가진 바로 그날이었다. 이건희회장의 치사는 마치 83년 3월 15일 발표된 ‘왜 우리는 반도체 사업을 하는가’라는 반도체선언문 연장선상에 있는 것 같았다. 삼성전자는 이날 사상 최대 액수인 26조원 규모의 투자를 통해 시장 주도권을 확보하고 성장동력을 강화한다는 전략을 발표했다.

그 석달 후인 8월 25일 미국의시장조사 업체인 IC인사이츠의 보고서는 전세계 반도체업계에 화제를 몰고 왔다.

지난 1999년부터 10년간 반도체 산업분석에 근거해 내놓은 예측 보고서 내용은 이랬다.

‘2014년, 삼성전자가 전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인텔을 제치고 1위에 올라설 것이다.’

그 근거는 매출액 성장률이었다.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가 연평균 13.5%의 고속 성장세를 구가한 반면에 인텔은 3.4%에 그친 것으로 드러났다.

“삼성전자가 반도체 시장 활황을 발판 삼아 D램 시장에서 높은 성장세를 보였으나 인텔은 모바일로 변하는 최근 컴퓨팅 시장의 움직임에 빠르게 적응하지 못해 성장세가 늦어졌다”는 게 IC인사이츠의 분석이었다.

하지만 이는 24년 간 삼성을 지휘해 오면서 변화,위기,혁신을 강조해 온 이건희회장과 삼성전자반도체사업부의 당초 계획보다도 늦은 것이다. 이미 지난 2005년 세계 1위를 결의했을 때 2012년 인텔을 뛰어넘는 것으로 되어있었기에. 따라서 아직도 배고픈 반도체 강자 삼성은 더 박차를 가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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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결산 결과 삼성전자 매출은 154조원였다. 이 가운데 반도체사업부 매출은 20%에 불과했다. 하지만 영업이익은 단연 돋보였다. 삼성전자 총 영업이익의 58%인 10조원이 반도체에서 나왔다.

그룹의 운명을 건 도전과 결단으로 산업 보국을 내세운 기업가의 뜻은 변함없이 이어져 발전해 나가고 있다. 그의 판단은 옳았고 결정은 위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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