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구코너]'실리콘밸리'로 명명하다

1971년 1월 11일 돈 회플러의 칼럼 '실리콘밸리 USA'

일반입력 :2011/01/19 12:24    수정: 2011/04/12 22:04

이재구 기자

■HP차고, 실리콘밸리의 발상지가 되다

‘이 차고는 세계최초의 첨단기술지역인 실리콘밸리의 탄생지이다. 이런 지역을 만들 생각은 스탠포드대교수 프레데릭터먼교수가 자신이 맡은 최초의 두 학생들에게 동부의 회사에 취업하는 대신 자신의 전자회사를 만들라고 격려하면서 시작됐다. 그의 충고를 받아들인 최초의 두 학생은 1938년 최초의 음향발진기를 이 차고에서 만든 윌리엄 R.휴렛과 데이비드 패커드였다.’1989년 5월19일 캘리포니아 주립공원공단은 HP창업지인 팰러앨토 애디슨가 367번지의 한 허름한 차고를 기념해 이 앞에 ‘실리콘 밸리의 발상지’라는 동판을 설치한다.

HP는 창업 50년 만에 전세계 기업인들에게 기업가정신은 물론 IT 및 첨단기술의 대명사인 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실리콘밸리의 발상지’로 공인을 받았다. 이어 2007년 5월 17일 HP는 발표를 통해 빌 휴렛과 데이비드 패커드가 HP를 최초로 창업한 이 차고에 대한 미정부의 공인내용을 밝혔다.

“팰러앨토에 있는 2층으로 된 차고와 헛간으로 된 HP의 차고가 국립공원서비스공단에 의해 국가사적(the National Register of Historic Places)에 등재됐습니다.”

하지만 HP가 만든 최초의 제품, 실리콘 밸리의 발상지인 차고에서 최초로 만든 ‘음향 발진기(Audio Oscillator)'와 ’실리콘 밸리(Silicon Valley)'라는 말 속의 ‘실리콘’과의 연관성은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 이같은 사실은 데이비드 패커드가 1995년 쓴 회고록 ‘HP방식(The HP Way)’이란 책에서도 알 수 있다.

“1938년 봄 터먼의 연구소에서 일하던 빌 휴렛과 여러명의 학생들이 음성 피드백을 응용한 실험기구를 개발했다. 빌은 저항이 안정된 음향발진기를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빌의 음향발진기는 산업에서 필요한 고품질의 가청 주파수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실용적이고 경제적인 첫 생산품이 되었다......”

■‘실리콘 밸리’로 명명된 사연

“‘실리콘밸리'로 부르면 어떻겠나?”1971년 초. 샌프란시스코만 지역에서 반도체 이온장비를 만들던 랄프 바에르스트라는 사람이 그의 친구에게 제안했다.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네덜란드 출신 물리학자 닐스 보어와 일한 적이 있고 입자가속기를 제작한 경험자이기도 한 그는 이온이큅먼트라는 회사의 경영자였다.

“그거 좋겠군!”

잘 다듬은 턱을 쓰다듬던 바에르스트의 친구는 귀가 번쩍 뜨이는 것 같았다.

그는 반도체 회사의 홍보업무를 하다 그만두고 이 지역 첨단기업들의 소식을 전하는 타블로이드 주간지에 글을 쓰던 돈 회플러(1922-1986)라는 사나이었다.

회플러는 당시 산타클라라,마운틴 뷰,팰로앨토를 중심으로 한 지역이 벤처정신과 기업정신을 기르면서 커가는 미국 서부 기업들의 집단 서식지 중 하나였음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선 당시 샌프란시스코 남부 산타클라라 카운티에서 버섯처럼 솟아나고 있는 전자회사들을 집약해 독자의 눈을 사로잡을 단어가 필요했다. 하지만 적당한 말이 얼른 떠오르지 않아 고민하던 차였다.

사실 바에르스트도 이 지역을 방문한 동부지역 투자자들이 이곳을 일컫던 말을 귀띔해 준 것이었다. 돈 회플러는 당시 이 이름이 얼마나 이 지역을 묘사하는데 쩍 달라붙는 이름인지 모른 채 기꺼이 바에르스트의 의견에 동의했다.

이어 회플러는 1971년 1월 11일부터 3주간 3회에 걸쳐 자신이 발행하는 타블로이드 판 주간지인 마이크로일렉트로닉뉴스에 3주간 실리콘밸리 USA(Silicon Valley in the USA)란 칼럼을 썼다. 이로써 그는 실리콘밸리 취재의 선구자가 됐다.

우연의 일치라고 말하기엔 신기하게도 그가 홍보직원으로 근무했었던 회사는 페어차일드반도체였다. 실리콘밸리에서 20년동안 65개의 ‘실리콘’반도체회사를 세포분열시킨 바로 주인공이기도 했다.

■실리콘밸리의 창세기

“트랜지스터 특허 로열티를 하나도 나눠받을 수 없다니...게다가 내가 뭐가 부족해서 승진시켜 주지 않는단 말인가?”

1947년 겨울 세계최초로 트랜지스터를 발명한 이른바 벨랩 3총사의 팀장인 윌리엄 쇼클리는 회사가 못마땅했다.

게다가 자신의 도움으로 획득하게 된 트랜지스터 특허의 로열티도 나눠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몹시 분개했다. 1954년 그는 다른 기업과 대학에서의 일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대 최고 연구소인 벨랩에서 일하던 이 괴짜 천재에게 어떤 기업이나 보수도 성에 찰 리 만무했다.

1955년 직접 창업해 자신의 발명품을 사업화하기로 결심한 그는 뉴욕에서 고향인 캘리포니아로 돌아왔다. 창업을 위해 올린 후보지는 로스엔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 등 2곳이었다.

“우리가 자본금을 댈 테니 한번 해보겠소?”

로스엔젤레스에서 베크만인스투루먼트라는 회사를 차려 연간 매출 2천만달러를 기록할 정도로 잘 나가고 있는 전직 칼테크 교수출신 아놀드 베크만이 제안해 왔다. 그와는 칼테크 동문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스탠포드대학의 프레드 터먼 공대학장도 반도체산업의 미래를 내다보고 이 괴짜 천재 쇼클리를 고향으로 영입하고자 나섰다. 1951년 문을 연 스탠포드인터스트리얼파크로 들어와 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쇼클리는 1956년 2월 베크만 인스트루먼트의 자금지원을 받되 쇼클리반도체연구소는 고향 마운틴뷰에 세워 '실리콘'트랜지스터 개발에 나섰다.

이로써 윌리업 쇼클리는 1950년대와 60년대에 걸쳐 반도체 기술혁신의 온상인 실리콘밸리를 형성의 창세기를 연 첫 번째 인물이 됐다. 마운틴 뷰의 샌 안토니오로드 391번지에 소재한 허름한 살구나무창고에서였다.

■8인의 배신자

쇼클리반도체연구소는 현재 실리콘밸리라고 부르는 샌프란시스코 지역 최초의 반도체업체였다. 쇼클리는 퀀세트보다 약간 크게 작업장을 짓고 그리고 젊은 과학자들을 그러 모으기 시작했다.

이 지역은 1909년 스탠포드대 출신의 시릴 엘웰이 FTC라는 무선통신회사를 세웠고, 거기서 스핀오프한 마그나 복스가 차고창업을 하기도 한 유서깊은 벤처정신의 땅이기도 했다. 하지만 무선통신기술 위주로 발전해 온 이 지역에 반도체 기술자가 있을 리 만무했다.

연구소 설립 한 달 전인 1월 쇼클리는 필라델피아에서 당시 진공관생산으로 잘나가던 필코의 엘리트인 28세의 물리학자 로버트 노이스에게 연락했다.

“전화로 마치 신과 얘기하는 것 같았죠.”

필코에서 고주파 트랜지스터 개발에 참여중이던 MIT출신의 로버트 노이스는 후일 이렇게 회고했다. 그가 즉시 달려간 것은 당연했다. 영입 2순위는 후일 ‘무어의 법칙’으로 너무나도 유명해진 칼테크 화학자 출신의 고든 무어였다. 여기에 스위스출신 칼테크 화학자 진 호에르니, 클라이너, 제이 라스트, 셸던 로버츠 등이 가세했다. 최고의 인재 풀이었다.

하지만 쇼클리연구팀은 웬지 실리콘반도체를 만드는데 있어서 연일 실패하고 있었다. 게다가 쇼클리의 괴팍한 성격은 젊은 인재풀들과 심한 마찰을 겪었다. 그룹은 와해 위기에 빠졌다.

“쇼클리박사가 연구소의 직접 운영에서 손을 떼야 하며 기술컨설턴트로만 있어야 합니다.”

초기 멤버의 대표들이 베크만에게 이렇게 사정했지만 안 통했다.

“반란이 실패하자....우리는 우리의 최상의 선택이...상용 실리콘트랜지스터의 개발을 완성하기 위해 우리 자신의 회사를 만드는 것임을 알았다.”

고든 무어는 1999년 3월 29일자 시사주간지 타임에 기고한 글에서 8인의 배신자의 뒷얘기를 이같이 털어놓았다.

■실리콘밸리의 신화가 시작되다.

“만일 당신들이 나간다면 이는 부끄러운 행동이 될 겁니다.”

1957년 9월18일. 쇼클리반도체연구소의 실질적인 주인이던 베크만은 8인의 배신자들을 작은 방으로 불러 이같이 경고하면서 집단 행동을 자제해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이들에게 이날은 쇼클리반도체연구소에서 근무하는 마지막 날이었다. 8인의 배신자는 반란에 실패한 후 미 동부의 벤처캐피털리스트 아서 록에게 회사를 세울 테니 투자자를 알아봐 달라는 부탁을 받고 있었다. 투자자를 모집은 쉽지 않았다. 마그나복스, 제너럴 밀스, 버로우즈 등 30개가 넘는 회사들이 모두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가을이 되면서 페어차일드카메라앤인스트루먼트라는 회사가 기꺼이 투자하겠다고 나섰다. 발명가 출신 백만장자 셔먼페어차일드가 운영하는 항공카메라제조회사 페어차일드카메라앤인스트루먼트였다.

조인식은 1957년 9월19일 아침 샌프란시스코 클리프트 호텔 레드우드 룸에서 조찬과 함께이뤄졌다.

‘(페어차일드)카메라앤인스트루먼트는 향후 18개월간 138만달러를 투자하며 그대신 페어차일드반도체의 의결권과 함께 이 회사의 주식을 300만달러에 구입하는 옵션을 갖는다.‘

하지만 한가지 절차가 더 남아 있었다. 식사가 끝날 즈음 아서 록과 함께 온 아일랜드 출신의 버드 코일이 8인의 배신자에게 빳빳한 1달러짜리 새 지폐들을 꺼내면서 말했다.

“우리 모두가 이 지폐에 사인을 하면 서로 간의 계약이 끝나는 겁니다.”

8인의 배신자가 실리콘밸리를 만든 아버지(Founding Fathers of Silicon Valley)로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후 20년간 페어차일드는 실리콘밸리에서 65개의 반도체 회사를 세포분열 시켰다.

그들은 쇼클리반도체연구소에서 쇼클리에게 당했던 것과 정반대로 회사를 운영하면서 실리콘밸리의 문화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텍사스 애들이 실리콘트랜지스터를 만들어 냈어

하지만 실리콘밸리 이외의 지역에서 이미 ‘실리콘’의 큰 역사가 쓰여지고 있었다.

벨랩 3총사가 게르마늄 반도체 발명 5년째인 1952년 어느 날. 탐사측량회사였던 TI의 패트릭 해거티 사장이 벨연구소에서 고든 틸이라는 물리학자를 스카웃해 왔다.

“2달러 50센트 정도가격에 믿을 만한 품질의 트랜지스터를 개발해 주게.”

당시 게르마늄(Ge)로 만들어지던 트랜지스터는 아직 생소한데다 진공관 증폭기능을 대체하지 못했고 신뢰성도 떨어졌다. 가격도 개당 15달러 이상이나 했다. 해거티사장은 이를 대체할 실리콘반도체의 가능성을 내다 본 것이었다.

1954년 5월. 고든 틸과 애드콕 TI 부사장은 실리콘트랜지스터 제조상의 문제를 논의하는 기술회의에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하나같이 실리콘으로 트랜지스터를 만드는데 대한 어려움만 거론하고 있었다.

실리콘은 열에는 잘 버티지만 깨지기 쉽고 정제하는데 까다로왔다. 제조공정 중에 곧잘 부서져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고든 틸이 앞으로 나섰다.

“우리는 지금 두가지 유형의 실리콘 트랜지스터를 제품화했습니다...얼마 전 시제품 몇 개를 만들어 지금 여기 갖고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게르마늄을 사용한 레코드플레이어를 꺼내 실험해 보였다. 플레이어를 틀어놓고 연결된 트랜지스터를 끓는 기름통에 담궜다. 그러자 음악이 멈췄다.

틸은 이제 자신이 새로 개발한 트랜지스터를 연결했다. 트랜지스터가 뜨거운 기름속에 빠졌지만 음악은 계속 흘러 나왔다.

미 동부의 일류기업에서 온 참석자들이 정신없이 다투어 공중전화박스로 달려갔다.

“텍사스 애들이 '실리콘'트랜지스터를 만들어 냈어!”

이 해 텍사스인스트루먼트는 휴대용 라디오 사업에 착수, 폭발적 성공을 일궈냈다. 리전시라디오라는 회사와 함께였다. 몇 달후 소니의 트랜지스터(라디오)가 나왔다.

■실리콘밸리의 진정한 창시자는?

이 지역에는 누가 실리콘밸리를 만들었는가보다 중요한 것이 넘쳐 흐른다.

캐롤라인 태지네이 스탠포드 컴퓨터 포럼이사(1988-1997)의 회고는 실리콘밸리 이전의 거물들과 그들의 창업정신을 상기시켜 준다.

“1995년 6월 나는 스탠포드파크호텔에서 점심을 먹고 떠나려고 하다가 웬 사람이 지팡이를 갖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같은 느낌을 받았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가 혹시 휴렛씨가 아니십니까?하고 물으니 그는 '그렇소'하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실리콘밸리의 아버지인 프레드 터먼에 대해 글을 쓸 때 정보를 확인해 준 데 대한 감사를 전했다.

그는 '그러나 프레드 터먼은 실리콘 밸리를 시작하지 않았소. 실리콘밸리를 시작한 것은 초거대신성(supernova)이오' 라고 말했다. 그는 내게 '수퍼노바(초거대신성)가 뭔지 아시오'라고 물었고 나는 '압니다. 그것은 거대한 별의 폭발을 말합니다'라고 대답했다.

휴렛씨는 매우 부드럽게 말했고 모든 단어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는 '수퍼노바가 미래의 이벤트를 위한 무대를 마련하는 파급효과를 가져왔다'고 설명했다. 그는 세기 초 팰로앨토 지역에 살았던 전자산업의 선구자 리 드 포레스트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리고 '그의 업적은 수퍼노바'라고 말했다.”

사실 팰러앨토에 세워진 페더럴텔레그래프컴퍼니(FTC)의 설립(1909)은 HP의 설립(1939)보다 30년이나 앞선다. FTC를 기념하는 동판에는 1970년 5월 2일이라고 선명하게 쓰여있다. HP의 차고가 캘캘리포니아사적지로 지정된 1987년 8월 7일보다 훨씬 이전이다.이제 실리콘밸리 팰러앨토를 찾는 관광객들은 HP의 동판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며, 이 곳은 관광객들에게 필수 방문코스가 되어있다. 오늘날 시릴 엘웰이나 쇼클리연구소 자리는 잘 기억되지 않는다.

2000년 HP는 휴렛과 패커드가 창업했던 차고를 170만달러나 주고 사 들였다. 칼리피오리나 CEO는 가짜 HP 창업차고 앞에 서서 HP의 창업정신으로 되돌아가자고 캠페인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건물이 보여주는 것은 기업가 정신입니다.”

워싱턴 미 국가사적등기소의 역사학자 폴 루시그넌은 HP차고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실리콘밸리의 오늘

오늘날 실리콘밸리는 숨가뿐 패러다임의 전환을 만들어내고 있다. PC혁명과 인터넷 혁명, 을 거쳐 더 이상 진화가 없을 듯 했던 이 지역은 이제 검색엔진,소셜미디어, 스마트폰과 태블릿의 등장에 이르기까지 더욱 숨가쁜 패러다임 전환을 만들어내고 있다.

변하지 않은 것은 지형적 위치뿐이지만 그또한 지역이 엄청나게 늘어나 40개 도시가 포함되는 엄청난 세계 기술혁신의 엔진으로 자라났다.

태평양을 바라보는 도시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를 지나 가다가 나오는 커다란 오른쪽 만의 입구를 꺾어 쭈욱 들어가면 만의 주변으로 기업들이 모여있다. 만 좌우로 42개의 도시가 군집해 있는 이 거대 도시집합체를 우리는 실리콘밸리로 부른다. 서울면적의 약 7.8배나 되는 면적이다.

실리콘밸리인덱스는 이 곳의 지질학적 위치를 ‘서경 121도 47분 12초 ~서경121도 89분 23초 사이, 북위 37도 2분 16초~36도 7분 8초’로 규정하고 있다.

이 거대한 면적의 땅은 더 늘지 않고 지난 1900년대 초 이래 빼곡이 기업들의 수효를 늘려왔다.

현재 실리콘밸리의 도시는 모두 4개의 카운티에 총 40개 도시로 구성돼 있다. 산타클라라카운티 내의 15개 도시, 산 마테오카운티의 21개 도시, 앨라메다카운티 3개시, 산타크루즈카운티에서 1개 도시가 속해 있다. 실리콘밸리 소재 40개 도시는 ▲캠벨,쿠퍼티로,길로이,로스앨토스,로스앨토스힐스,로스가토스,밀피타스,몬테시레노,모건힐, 마운틴뷰,팰러앨토,새너제이,산타클라라,사라토가,서니베일(이상 산타클라라)▲애시턴,벨몬트,브리스번,브로드무어,벌링게임,콜마,댈리시티,이스트팰러앨토,포스터시티,하프문베이,힐스버러,멘로파크,밀브래,퍼시피카,포톨라밸리,레드우드시티,샌브루노,샌칼로스,샌마테오,사우스샌프란시스코,우드사이트(이상 산마테오카운티) ▲프레몬트,뉴아크,유니온시키(이상 앨라메다카운티) ▲스콧밸리(이상 산타크루즈카운티)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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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의 총면적은 1854평방마일 즉, 4859km²로서 시속 80km로 달리면 자동차로 1시간 반정도 달리는 정방형 지역으로 볼 수 있다.물론 현재 실리콘밸리는 베이 건너편까지 포함된다. 실리콘밸리인텍스의 2009년 통계에 따르면 이 지역 인구는 252만명,일자리는 141만2372개, 평균 소득 7만9116달러다.

실리콘밸리 직원의 교육수준을 보면 전문대 이상 나온 직원이 68%를 차지한다. 인구구성을 보면 ▲백인 및 비 히스패닉(40%) ▲아시아 비 히스패닉(28%) ▲히스패닉(25%) 등의 분포로 돼 있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