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산업 ‘사중고(死重苦)’ 시대?

일반입력 :2010/12/26 13:17    수정: 2010/12/26 18:33

전하나 기자

“해외 게임 수출 2조원, 스마트폰 보급 600만을 바라본다기에 호재라 여겼는데…”

중소 게임개발사 A대표는 게임이 우리나라 IT산업 대표 먹거리라는 자부심으로 3년 전 벤처에 뛰어들었다. 술술 풀릴 것이라 예상했던 사업은 초기부터 대기업들의 대작 라인업 경쟁에 치이기 바빴다. TV드라마에 나오는 벤처 성공신화는 쉽지 않은 얘기였다.

그럭저럭 사업을 꾸려가던 A대표. 그는 올해 초 스마트폰 시대가 열리자 환호했다. 때를 맞았다는 생각에 독특한 창의력과 기술력으로 승부하겠다는 부푼 꿈을 앞세워 신규 모바일 개발 인력까지 채용했다. 그러나 최근 직원들의 사기는 최저로 떨어진 상황. 정부가 겹겹으로 쏟아내는 규제 정책 때문이다.

요즘 게임 업계에는 A대표와 같은 사례가 셀 수 없이 많다. 복수의 전문가는 게임산업이 ‘사중고(四重苦)’에 빠졌다며 안타깝다는 반응이다. 업계 일각에서는 사(四)를 죽을 사(死)로 바꿔 ‘사중고(死重苦)’로 표현할 정도. 정부의 규제 일변도 정책이 장기적으로 산업성장성을 죽일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1苦 : 문화부·여가부 ‘셧다운제’ 극적 합의?…여전한 이중규제 불씨

먼저 게임 개발사의 발목을 잡은 것은 법이었다. 문화체육관광부(문화부)가 추진한 게임산업진흥에관한법률(게진법)이 여성가족부(여가부)의 청소년보호법(청보법)에 담긴 게임 규제안과 중복된다는 이유로 2년째 통과되지 못한 것이다. 청보법에는 청소년의 야간 게임이용을 금지하는 ‘셧다운제’가 담겨 있다.

그러던 중 이달 초, 팽팽히 맞서온 두 부처가 합의안을 도출했다. 하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업계의 표정이 밝은 것만은 아니었다. 문화부와 여가부가 동시에 게임 산업 규제에 나선다는 틀은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난 2일 여가부는 청보법에 강제적 셧다운제를 도입하고 자정부터 새벽 6시까지 만 16세 미만 청소년들의 게임 이용을 막겠다고 밝혔다. 이어 9일 문화부가 게진법에 16세 이상의 청소년도 본인이나 부모가 요청할 경우 게임 접속을 제한하는 선택적 셧다운제를 담겠다고 발표했다.

두 부처가 화해하는 모양새를 갖췄지만, 부처 간 이중규제 불씨가 여전히 남았다는 지적이 잇따른 배경이다.

■2苦 : 게임산업 이해 못한 여가부, 스마트폰용 게임도 셧다운?

여가부는 셧다운제를 온라인게임 뿐 아니라 온라인 연동이 되는 스마트폰용 게임 등으로 확대 적용한다는 방침을 내세웠다.

이로 인해 셧다운제가 글로벌 오픈마켓의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일부 연령층의 특정 시간대 접속을 차단하는 시스템을 해외업체에까지 강요할 수 있는 마땅한 방도가 없다는 게 업계전문가의 설명이다.

한 중견 게임사 직원은 “게임사가 이용자의 개인정보를 일일이 알 수는 없다”며 “더군다나 주민등록번호를 기입하지 않는 외국 스마트폰 게임은 무슨 수로 막을 거냐”고 지적했다.

스마트폰용 게임은 전 세계 이용자가 이용하는데, 국내 이용자 중 만 16세 미만 청소년만을 걸러내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상 셧다운제가 실효성 없는 눈먼 규제가 될 것이라는 비판이 나온 배경이다.

이대로 여가부가 비현실적인 스마트폰 셧다운제를 계속 고집하면, 국내 중소형 게임사들이 모두 사장될 것이라는 걱정도 커지고 있다.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을 눈앞에 두고도 온라인 접속이 안 되는 피처폰 게임에서만 매출을 기대해야 하는 상황을 초래하고, 해외 게임들이 국내 스마트폰 시장을 잠식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모바일게임사 관계자는 “국내 중소 개발사는 스마트폰 게임 내 이용자 접속을 차단하는 시스템 자체를 도입할 여력이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여가부가 게임업계의 현실을 제대로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고 목소리에 날을 세웠다.

■3苦 : 오픈마켓은 갈 길 멀고, 게임물은 안팎 고초

셧다운제 진통으로 일명 ‘오픈마켓법’이 지지부진한 것도 문제다. 게진법에는 ‘오픈마켓 게임 사전심의 예외’라는 조항이 담겨 있어, 법이 개정될 경우 오픈마켓용 게임은 사전심의 없이 앱스토어, T스토어 등을 통해 서비스가 가능하다. 게임업계가 연내에 관련 법이 통과하길 바란 이유다.

정부의 게임물 사전 등급분류제도는 이미 애플이나 구글 등 글로벌 기업에게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일종의 검열’이라는 지적을 받아왔다. 앱스토어와 안드로이드마켓에서 게임 카테고리를 볼 수 없는 이유가 국제적 흐름을 역행하는 정부 규제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의 공통된 의견이다.

이 때문에 게임업계에서는 “게진법이 통과돼도 시행까지는 3개월 이상 소요되니 여전히 갈 길이 멀다”며 “주무부처인 문화부가 오픈마켓법안만이라도 따로 떼내 조속히 추진해서 게임업계 고민을 덜어줬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불만을 토로한다.

아울러 게임물이 사전 등급 심의제도를 받고 있는데, 이를 또 다시 이용시간으로 제한하는 것도 지나친 규제정책이라는 비판도 일고 있다. 내용심의를 받은 게임물이 정당하게 서비스되고 있는데, 서비스 이용시간까지 강제하는 것은 세계적으로 어떤 문화콘텐츠도 유례가 없다는 설명이다.

■4苦 : “가뜩이나 힘든데…심의료까지 오른다고?”

지난 21일, 문화부와 게임물등급위원회(게임위)는 심의료 인상안을 발표했다. 국회가 게임사전심의 비용의 77%가까이 보조하던 것을 2012년부터 중단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조정안에 따르면 현행 모바일 게임 수수료는 보드·슈팅·스포츠 게임 9만원, 역할수행게임(RPG) 18만원에서 2012년 각각 15만원, 60만원으로 오른다. 오픈마켓 게임의 경우, 용량이 10~100MB 사이의 RPG 수수료는 12만원에서 40만원으로, 100~300MB는 24만원에서 60만원까지 인상될 예정이다.

유명 모바일 게임 업체 관계자는 “아무리 활황이라고 하나, 스마트폰 게임 시장은 여전히 작다”며 “모바일 게임에 올인하는 중소 개발사들에게 2~3배 가까이 오른 심의수수료는 적잖은 부담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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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유로 업계에서는 중소형 개발사에 대해서 심의료 지원을 오히려 확대해야 한다는 요구가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게임위 관계자는 “정부가 추진 중인 중소 기업 활성화 정책에 따라 오픈마켓을 포함한 모바일 게임물의 비용을 탄력적으로 축소했다”고 설명했다.

지난달 25일 국회서 열린 ‘청소년보호법을 통한 문화산업 규제, 무엇이 문제인가?’ 토론회에 참석한 한 전문가는 “국가가 만든 법률은 청소년에 대한 사회적 배려와 보호, 표현과 창작의 자유, 영업의 자유 등 다양한 사회적 가치와 균형적인 시각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