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구코너]엥겔바트의 마우스 탄생

1968년 12월 9일,엥겔바트의 마우스 첫 등장

일반입력 :2010/12/09 23:40    수정: 2011/04/17 15:36

이재구 기자

■“사람들이 마우스를 사용하고 싶어한다는 증거가 없다 ”

“...그리고 정보화를 못하게 하는 독묻은 갈대는 역사의 쓰레기통속으로 버려졌습니다. 오늘 우리는 최초의 영광된 정보정화지침(Information Purification Directive)의 첫 번째 기념일을 맞이했습니다. 우리는 역사상 처음으로 순수한 이데올로기의 정원을 만들었습니다...우리의 적은 죽을 때까지 얘기하게 될 것이며, 우리는 그들을 혼돈 속에 묻어버릴 것입니다.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안경 쓴 빅브라더가 강당에서 커다란 스크린 속에서 이같은 연설로 사람들을 쇄뇌시키고 있는 가운데 그의 군대에 쫓기는 한 여성이 달려 나왔다.

상의로 입은 하얀티셔츠에는 검은색 매킨토시 컴퓨터 윤곽과 애플사를 상징하는 사과가 그려져 있었다.

이 여성은 커다란 해머를 거대한 연설화면 속 빅브라더를 향해 던져 버렸고 화면은 화얀 섬광속에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자막과 내레이션으로 화면은 이어졌다.

애플은 1월24일 매킨토시를 소개합니다.1984년은 1984년과 다를 것입니다.

시청자를 경악케 한 혁명적 광고였다.

1984년 1월 22일 제 18회 슈퍼보울 방송 광고 시간. 블레이드 러너·에일리언 등을 감독한 명장 리들리 스콧이 만든 ‘1984년은 1984(년)같지 않을 것이다’라는 광고가 CBS방송화면을 타고 1억명의 전 미국 슈퍼보울 시청자에게 다가갔다. PC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IBM에 대한 도전을 의미하는 광고이기도 했다.

CBS와 애플에는 단 한번 방영된 30초 광고를 보고 “도대체 저게 무엇인가?”라며 시청자의 문의 전화가 빗발쳤다. 시청률 46%였다. 그러나 그 광고보다도 더 혁명적인 것은 매킨토시 한쪽에 얌전히 놓인, 이전 컴퓨터에서는 볼 수 없었던 손에 쥐어지는 조그만 기기였다. 마우스였다. 한달 후 각 컴퓨터전문지들이 매킨토시에 대한 호평과 악평을 쏟아냈다.

“애플은 고객이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을 알고 있다는 오만한 가정을 하고 있다. 이는 불행하게도 ‘왜 내가 이걸 원하지?’라는 의문을 남긴다. 매킨토시는 ‘마우스’라고 부르는 실험적인 포인터(pointing device)를 사용한다. 사람들이 이들을 사용하고 싶어한다는 증거가 없다. 나는 이 새로이 유행하는 기기 가운데 하나를 사용하고 싶지 않다.”

2월 24일자 샌프란시스코이그재미너 컬럼니스트 존 C. 드보락은 이 파괴적 혁신을 가져다 준 기기에 독설을 쏟아냈다. 하지만 ‘마우스’는 한달 만에 평가받을 정도로 쉽게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정작 마우스를 만든 사람은 따로 있었다.

행동에 따라 즉각 반응하는 컴퓨터의 등장.

1968년 12월 9일. 비오는 아침. 샌프란시스코 시민회관 대강당에는 1000명의 관객들이 객석을 꽉 채우다 못해 벽을 기대고 줄줄이 이어서 서있을 정도로 몰려들었다.

“나는 여러분이 이 다소 생소한 장치가 설치된 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지금부터 제가 여러분들에게 소개하는 연구 프로그램은 말하면 그 즉시 특성화되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사무실에 늘 깨어 있어서 여러분의 행동에 따라 즉각 반응하는 컴퓨터 디스플레이가 있다면 그것에서 얼마나 큰 가치를 얻어 낼 수 있겠습니까?”

무대 위의 22인치 화면을 뒤로 하고 무대에 선 스탠포드연구센터(SRI)의 43세 중년 사나이가 말했다. 귀에 이어폰이 연결된 헤드폰을 쓴 짧은 흰색 셔츠에 타이를 맨 그는 90분 동안 관객들 앞에서 스탠포드대와 이 건물 사이에 연결하고 이들 간 통신으로 컴퓨터에서 영상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모습을 시연할 예정이었다. “저는 그렇게 되길 기대합니다.”

시연에 앞선 그의 소갯말은 거의 들릴락 말락하게 이어졌다.

전세계에 앞서 관객들에게 사이버스페이스의 세계를 보여주는 시연을 이끈 사나이의 이름은 더글러스 엥겔바트였다.

매너좋은 이 중년 사나이의 단조로운 목소리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당시 발표회에서 볼 수 있는 프레젠테이션 화면이라고 해야 슬라이드를 보여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사나이가 들고 나온 것은 그가 동료들과 연구해 오던 텔레컨퍼런스의 원형인 온라인시스템(oN Line System)즉, NLS였다.

인터넷혁명의 예고편을 쓰다.

“당신들이 이번 행사를 성공시키면 비공식 연구자금을 모두 공식연구자금으로 인정해 주지요.”

미국방부고등기술연구원(APRA)안에 세워진 정보처리기술사무국(IPTO) 국장 밥 테일러는 그를 지목해 연례합동컴퓨터컨퍼런스의 주제 발표자로 나서도록 했다. 그는 지난 여름 자신이 지원한 연구프로그램 시연이 성공하면 그동안 증강연구센터(ARC)멤버들에게 퍼 준 연구개발비용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주겠다고 약속한 것이었다.

하지만 엥겔바트 팀은 엄청난 역사적 사건이 기다리고 있는 이 행사의 성공과 그 이상의 의미를 알 리가 없었다. 관객들은 그의 시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대위 책상 앞에는 가로로 긴 컨트롤 패널이 놓였다. 가운데에는 타자기처럼 생긴 표준 키보드, 오른쪽에는 마우스, 왼쪽에는 다섯 개의 세로로된 피아노 건반 같은 키 세트가 있었다.

무대위에 설치된 NLS터미널은 팰로앨토 스탠포드대 멘로파크에 있는 SRI옥상 위 마이크로웨이브와 2대의 모뎀에 연결돼 있었다. 브룩스홀 바깥의 스카이라인대로에 세워놓은 트럭의 접시안테나는 40km남쪽 스탠포드대 SRI옥상과 연결됐다. 통신속도는 1200보드(baud)에 불과했다. 빌려 온 스위스제 최고급 비디오프로젝터가 무대 정면에 위치한 스크린을 비추었다.

이들은 카메라 두 대를 SRI에, 두 대를 시민회관 브룩스홀 무대위에 각각 설치했다.

무대 위의 카메라 한대는 엥겔바트의 얼굴을, 또 한대는 그가 마우스와 키보드 다루는 모습을 잡았다.

대형화면에는 엥겔바트와 멘로파크에 있는 그의 동료모습이 번갈아 비쳐졌으며 메시지를 주고받는 컴퓨터 화면의 모습도 나타났다. 875라인의 주사선을 가진 컴퓨터화면이 비쳐져 화면의 글자는 조악하기 짝이 없었다.

이 모든 것은 멘로파크에 있는 컴퓨터를 이용해 이뤄졌다. 컴퓨터 메모리의 용량은 고작 192kB에 불과했다. 그러나 하이퍼텍스트 링크까지 포함된 이날 시연은 다음해 시작될 인터넷혁명의 예고편이라 말하기에 손색이 없었다.

■모든 데모의 어머니-아니오 이건 진짜란 말이오

“제가 클릭하고 그리고 바로 점프해 보겠습니다. 마술같죠?”

엥겔바트가 마우스로 스크린 상에서 텍스트를 하이퍼텍스트로 링크했다.

화면을 여러개의 창으로 나눠쓰거나 서로 관련된 문서를 순식간에 보여주는 하이퍼텍스트 기능은 특히 사람들을 놀라움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이것은 엥겔바트의 ARC팀이 개발해온 LNS(oN Line System)의 일부이자 1년후 실현될 아파넷(ARPANET)의 기초가 되는 기술이었다. 엥겔바트는 이날 양방향 비디오컨퍼런싱까지 시연하면서 NLS기술을 맘껏 뽐냈다.

90분 동안의 시연이 끝나자 긴 충격에서 깨어난 관객들은 엥겔바트의 발표 마감과 함께 기립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이날 시연이 끝나자 브라운대에서 컴퓨터공학을 하고 있는 안드리에스 밴 댐교수가 화난 얼굴로 와서 따지기 시작했다.

“뭐가 잘못됐나요?”

“당신이 뭔가를 짜깁기 해서 데모하고 실제로 일어나게 하는 것은 무책임하고 비윤리적이오!“

“아니오, 이건 진짜란 말이오!”

엥겔바트가 침착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이날 시연을 믿지 않았고 SRI에 와서 보고 나서 그제서야 믿었다. 같은 컴퓨터 과학자인 그가 보기에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엥겔바트의 시연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안드리에스 밴 댐은 후일 이 데모에 대해 “모든 시연의 어머니(Mother of All Demos)”라고 부르면서 자신에게 착각을 가져다 줄 정도였던 이 위대한 발명을 기렸다.

행사 다음날 샌프란시스코크로니클에는 이날 행사를 극찬하는 ‘미래 컴퓨터의 환상적 세계’라는 헤드라인이 달린 기사가 실렸다.

하지만 이날 브룩스홀에 있었던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인상깊은 데모라야 겨우 마우스와 윈도우 기능의 시연 정도였을 뿐이었다.

■마우스-인터랙티브 실현의 총아

1963년 엥겔마트가 스케치한 최초의 마우스는 2개의 수직으로 향하는 버튼을 가지고 있었지만 SRI에서 개발한 마우스가 나오면서 1968년에는 3개의 버튼을 가진 모델로 등장했다. .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서 마우스를 개발하자고 생각해서 마우스가 개발되던가요?”

2008년 텔레그래프지가 마우스 등장 40주년 기념 인터뷰에서 짓궂게 물었다.

그러자 엥겔바트는 그 착상이 필리핀에서 레이더병으로 근무하던 시절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당시 레이더와 소나스크린에 숨은 전자지식을 이해했고 따라서 컴퓨터가 펀치카드로 작동하면 전자적인 방식으로도 원하는 무엇이든 스크린에 넣을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었다고 밝혔다. “레이더가 조작자의 입력을 받아들일 수 있듯이 컴퓨터도 그럴 것이라고 봤죠. 나는 우리가 더욱더 컴퓨터를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마우스와 달리 피아노건반 5개를 사용하는 이른 바 ‘코드 키보드’가 컴퓨터일반 자판 키보드와 함께 사용되고 있던 시절이었다.

그것은 시간이 걸리는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그의 연구팀은 아주 단순한 것부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컴퓨터가 스크린상의 아무위치에서나 객체를 만들 수 있는가가 그것이었다. 그리고 커서를 그밖의 다른 곳에 놓을 수 있는지도 체크했다. 또 사용자가 커서를 객체에 옮기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도 쟀다.

그 결과 마우스가 모든 다른 컴퓨터입력기구보다 빨리 작동된다는 것을 알아냈다. 라이트펜같은 것은 분명히 시간이 많이 걸렸다.

“마우스가 뛰어난 성능을 보여준다는 것은 금세 분명해졌지요“

이전에 만들어진 적이 없는 이 기기는 매우 빨랐다. 그리고 사람들의 컴퓨터 스크린 조작상 실수도 크게 줄여 주었다. 대여섯번의 테스트가 이뤄졌다. 그러나 누구도 누가 마우스라고 부르기 시작했는지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대화형 컴퓨터를 꿈꾼 사나이-하이퍼텍스트의 아버지

“나의 목표는 어떻게 집단적으로 더욱더 복잡한 문제와 당면한 문제를 풀어 세계를 바꿀 수 있느냐는 것이었지요.”

2001년 11월 엥겔바트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그것은 그가 1948년 필리핀 레이테섬에 레이더병으로 가서 미국 국방첨단기술의 아버지이자 물리학사령관이라는 버니버 부시의 저서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이란 저서를 읽은 이후 바뀐 인생관을 반영한 것이었다.

“버니버 부시의 글을 읽고서 전율을 느꼈던 것으로 기억해요.”2차대전종전(VJ)일날 샌프란시스코 항을 떠난 해군함에 몸을 실은 그가 필리핀 섬의 적십자문고에서 우연히 발견한 버니버 부시박사의 글을 읽었고 이는 20년 후인 1968년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엥겔바트는 모든 1968년 12월19일 시민회관 시연 10일 후 가진 SRI와의 인터뷰에서 19487년 필리핀 섬에서 운명적으로 읽게 된 당시 라이프지를 떠올렸다. 그 책에는 버니버 부시박사 글 ‘미멕스(Memex)'라는 하이퍼텍스트와 인터랙티브 기계에 대한 구상이 쓰여있었다고 그는 회고했다.

미멕스는 기계를 통해 자료를 찾아내는 색인 방식을 만들고 색인에 표시된 책의 코드를 키보드로 입력해 해당하는 책의 페이지가 바로 화면에 투영되도록 하는 기계 개념이었다. 이른바 하이퍼텍스트의 선구적인 개념을 담은 기계였다.

이 개념을 이해한 엥겔바트는 이미 50년대초에 “옆방에서 워크스테이션을 작고 있는 동료가 있고 이들이 매우 가깝게 일을 공유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는 생각을 털어놓았다. 그 성과가 NLS였고 하이퍼텍스트였으며 텔레컨퍼런싱과 인터넷(아파넷)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그것이 최초로 실현된 것은 1968년 12월 9일 샌프란시스코 시민회관 브룩스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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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덧 마우스는 탄생 42주년을 맞고 있다.

그러나 엥겔바트가 미래에도 살아남을 것이라고 확신했던 마우스기술은 그러나 새로운 기술로 대체될 수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의 도전을 받고 있다. MS의 키넥트라는 동작인식기술과 아이폰이나 아이패드에 나오는 터치스크린 기술은 마우스의 자리를 넘보고 있다. 또 엥겔바트가 이루고자 했던 증강인간지능이란 이름의 인터랙티브통신의 꿈도 구글의 시맨틱웹이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 페이스북을 통해 어느정도 실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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